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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4 |
[이흥재의 마을이야기]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탑립마을
관리자(2009-04-06 10:02:14)
타임캡슐의 보고 탑립(塔立)이란 탑이 서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향교가 있으면 교동(校洞), 경기전이 있는곳은 전동(殿洞), 서원이 있는 마을은 원촌(院村)이다. 이 마을은 보물 167호인 은선리 3층석탑이 있어서 탑립마을이다. 타임캡슐 1번 - 은선리 3층석탑 고려시대 만들어진 은선리 3층석탑은 전형적인 백제계통의 탑으로, 늘씬한 몸짱같은 모습이다. 1층 탑신의 길이가 2층과 3층 상륜부를 합친것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길다. 이렇게 1층 탑신이 기다란 탑은 그 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2층에는 두 개의 돌문을 달아 붙였고 그 안에는 조그만 공간의 감실이 있다. 옛날에 이 마을에 살던 아이들이 감실에 돌맹이를 던져 집어넣는 놀이를 하기도 했으며, 기단위 난간에 앉아서 쉬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탑을 올려다 보면 시원하게 하늘로 치솟아 경쾌한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타임캡슐 2번 - 백제시대의 고분 이곳 탑립마을 3층 석탑 주변 뒷산에는 백제시대의 수혈식 및 횡혈식 등의 고분군 100여기가 넘게 분포되어 있다. 또 마을 뒤편에는 나주, 반남고분군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봉분이 즐비해 있어, 이곳이 백제시대에는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백제의 오방성 중의 하나인 중방성(中方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임캡슐 3번 - 영광 정씨 정려각 탑립마을 입구에는 열녀 영광 정씨(丁氏) 정려각이 있다. 누구든지 이 마을에 드나드는 사람은 이 정려각을 보게 된다. 이 시대에 열녀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조선시대에는 왜 이렇게 효자, 열녀, 충신이 중요한 덕목이었을까? 열녀 정씨는 23세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김방수(金芳洙)라는 선비였다. 혼인은 하였지만 신행을 가지 못한 상황에서 남편이 중병에 걸려서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온갖 정성을 다했으나 부음 소식을 듣고는 기절하여 쓰러졌다. 스스로 죽고자 하자 아버지가 꾸짖으면서 “너는 뱃속에 아이가 잇어 다행이다. 아들을 낳으면 네 남편의 후사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네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했다. 정씨가 이 말을 듣고 남편의 상을 치르기 위해서 이틀 길을 걸어가면서 한 알의 곡식도 입에 넣지 않고 시집에 당도하여 남편의 시신을 거두었다. 몸에 맨 허리띠와 얼굴 가림을 풀고 말하기를, “혼인한지 2년동안 지아비의 얼굴도 익숙하지 못한데 이제 지하에서나 얼굴 익히기를 바란다”며 크게 소리치면서 많은 피를 토하고 기절하였다. 시어머니가 타이르기를 “네 남편 핏줄이 네 뱃속에 있으니 어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겠는가?”하고 말하였다. 시어머니가 거처를 같이 하면서 가까이서 보살피는데, 어느날 시어머니가 잠든 것을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나가서 처마 끝에 목을 매어 죽으려 하니 잠을 깬 시어머니가 만류하여 죽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 정씨가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리기를 “한 넋이 떨어져 삼종지도가 끊어졌으니 살아서 자식을 낳은들 무엇 하리요”하고 남편을 장사지내는 날에 같이 묻히기를 원했다. 시누이에게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도록 부탁하고 자신이 끝까지 봉양치 못함을 불효하다하고 남몰래 남편의 관에 의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같은 날에 함께 장사지냈다. 고을 선비들이 ‘이는 참으로 열부이다’라고 말하고, 고부군과 전라 감영 그리고 조정에 알려 마을에 열녀정문을 세웠다. 영광 정씨 정려각 안내판에 이렇게 씌여져 있다. 타임캡슐 4번 - 권순명의 태산사 권순명은 조선시대 유학자이며 항일운동가이다. 18세때, 율곡의 학풍을 이은 기호학파의 마지막 선비인 간재 전우의 제자가 되어 16년 동안 왕등도와 계화도로 들어가 스승을 따르며 공부를 했다. 간문(艮門)의 화도삼주석(華島三柱石)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간재 문하의 계화도에 있는 주춧돌 같은 세사람의 제자’라는 뜻이다. 3주석은 권순명, 김종희, 유영선을 가리킨다. 간재 문집 편찬과 관련하여 일본의 승인을 얻어 출판해야 하는냐는 문제로 영남과 호남으로 나누어 다투었을 때, 권순명은 스승의 문집을 펴내야 한다는 영남제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호남에서는 문 밖 출입도 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1937년 47세때 스승인 간재 전우의 편지를 모아 편집하기위해 전국 8도에 통문을 발송한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문집 편집에 있어 간재 선생 문집에 오르지 않은 서신이 있으면 보내라는 통문을 일본경찰이 문제 삼은 것이다. 일본경찰이 연행 할 때 미리 옷 속에 칼과 약을 가지고 갔는데 일본 순경이 삭발을 강요하자 장도(粧刀)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감옥에 갇혀서도 한복을 고집했다. 옷은 조상들이 입은 옷이며 머리는 부모님께 받은 것이니 자를수 없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말에 일본의 창씨 계명 요구에 반대를 했다. 마을 뒤 제일 높은 곳 대나무 숲에 있는 태산사(台山祠)에 스승 간재와 함께 모셔져 있다. 주변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백제시대의 고분 그리고 고려시대의 3층석탑은 모두 1,000여년에서 2,000여 년 전까지 이 마을 일대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조선시대 최고 덕목중의 하나인 열녀 정문과 유학자를 모시는 태산사라는 사당 또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을 엿보게 하는 타임캡슐이다. 이 마을 김맹철(75세) 할아버지는 1988년 부인과 사별한 뒤 20여 년간을 혼자 살면서 논 여섯마지기와 밭 서너 마지기를 짓는다고 했다. “포도시 먹을 만큼만 진다. 식량 헐 만큼만” 어떻게 20년간을 혼자 사느냐고 묻자, “젊은 놈도 결혼을 못하고 사는데 - 혼자 살아야지” 하시는 할아버지의 굵은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삶의 여정이 묻어난다. 62세의 최규성씨는 태산사 사당을 관리하는 ‘고지기’이다. 위토답 여섯마지기를 지으며 제사 때는 쌀 두가마니를 내놓는단다. 터가 좋아 살기가 좋고, 영원면에서 공무원이 제일 많은 동네라고 마을 자랑이 그칠 줄 모른다. 지금 이 시대의 타임캡슐은 무엇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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