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4 |
[신귀백 영화엿보기] 감동 드라마를 선호하는 그들
관리자(2009-04-06 10:01:44)
감동 드라마를 선호하는 그들
- 제 81회 아카데미상 관전기
인도 청년의 이력서 <슬럼독 밀리오네어>
쓰나미로 한참 뒤숭숭 할 때, 인도에 보름 동안 다녀 온 적이 있다. 말을 걸어주는 동네였다. 잠깐의 시간에도 매혹은 도처에 널려있었지만 거기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집에 있는 사람이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온 듯한 대로를 낑겨 탄 오토 릭샤 위에서 나는 깨끗한 생수를 마셨다. 버짐 핀 그 '신의 아이들'의 손을 잡지도 않았다. 가느다란 탄식이 나오는 좁은 골목길 식당에서 그들의 음식보다는 한국인답게 보라색 무로 만든 김치 비슷한 것에 밥을 챙겨 먹었다.
광활한 유채밭, 강가의 아름답고 소름끼치는 풍경 등 어디에 앵글을 두어도 사진이 되는 풍경에 자말 형제가 신발을 훔치던 타지마할은 아름다웠으나 통풍이 잘 안되는 백색궁전 안 냄새는 역겨웠다. 그리고 여행자 아닌 관광객이 보는 인도영화는 그저 그랬다. 렘브란트 조명,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여주인공의 머리카락, 뻔한 스타일의 노래와 군무, 우연의 반복, 권선징악과 그 슬픔이 맥락으로 연결되지 않고 그저 해피 엔딩으로 끝내는 그런 것 말이다.
물론 <슬럼독…>은 인도 영화가 아니다. 첫 번째 회상 장면은 매혹이다. 인도라는 천지인의 조화가 만든 뭄바이 빈민가의 녹슨 양철지붕이 만드는 디자인은 하나님이 쓱싹 붓으로 칠한 듯하다. 비슷한 패턴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반복의 파스텔 톤 그림은 누추함이 아닌 모던함으로 다가온다. 이제 그 모자이크가 완성하는 풍경이 빠르게 줌아웃되고 나면 아이들이 뛴다. 뭄바이 특유의 사회문화적 도상(圖上)으로 좁은 골목과 부감 샷으로 잡은 기막힌 색상의 빨래터와 그리고 기차 위까지 아이들은 뛴다. 쫓고 쫓기는 긴장에 잡히고 도망가는 스타일이라니. 그렇다. 이것은 <트레인 스포팅>의 대니 보일이 만든 영화다. 신의 아이들이 아닌 신도 버린 아이들의 기구한 운명이 어지러운 몽타쥬 장면으로 펼쳐진다.
이 슬럼가에 그분이 오셨다. '아미타브 밧찬'말이다. 인도 최고의 배우를 보기 위하여 대지미술을 방불케 하는 쓰레기장과 공동변소의 똥통 속을 기어나온 우리의 주인공 자말은 기어코 스타의 사인을 받아낸다. 이 아이의 삶이 어떤 어려움도 강한 의지로 극복한다는 암시렷다. 이교도의 폭동에 부모 잃은 자말과 살림 형제와 아몬드 눈을 가진 라띠까 이들은 콜라 한 병에 앵벌이가 되고, 장님 앵벌이를 만들기 위해 눈에 수은을 넣고 숟가락으로 파내는 삼촌새끼들을 피해 이들 형제는 타지마할에 흘러들어 안내원 겸 신발 도둑놈으로 살아간다. 이 거지 자말의 연기에는 이를 악물고 눈에 힘주고 그런 것 없다. 그저 선량하게 바라볼 뿐. 형은 갱단이 되고 라티까는 갱단 두목의 노리개가 되는 설정은 대니 보일의 솜씨라기보다는 원작에 충실한 결과일 것이다. 인도식 신파다.
모바일회사의 텔레마케터가 된 자말은 퀴즈쇼에 나가게 되는데 이제부터는 푸른 조명과 오렌지 조명이 막 섞인다. 이것은 예술가의 자아실현을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란 말씀(경제도 어려운 마당에 무슨 예술인가?). 쉽지 않은 문제가 출제되지만 그는 답을 척척 맞추어나간다. ‘모든 정답은 그의 삶이었다.’는 카피대로 그 문제들은 그가 이미 바닥에서 몸으로 체득한 삶이었으니까. 미국 100달러 지폐에 새겨진 얼굴의 주인공을 맞추는 문제는 눈을 잃은 친구에게 적선한 통 큰 이야기고 더 어려운 문항들은 부잣집 도련님 차심부름하면서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다. 차를 따른다고 어디 차만 따르겠는가. 그렇다. 생존을 위한 적응능력에서 생긴 어깨너머 배운 지식들이야말로 최고의 지식이고 근근이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란 말이다.
방송국의 거물과 경찰은 이 덜떨어진 녀석이 문제를 맞추는 데 무슨 음모가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 고문과 인권유린을 자행한다. 빈민가 출신이 어떻게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는가라고 따지는 것은 전문대 나온 백수가 무슨 미네르바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하하. 영화 속 악당님은 “남자는 돈과 여자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다”고 말하던가. 형은 돈 때문에 죽어가지만 동생은 라티까를 찾기 위해 퀴즈쇼를 포기하지 않는다. 부모의 죽음 끝에 죽어라 고생한 다음에 적들의 음모를 깨고 미인을 차지한다는 감동의 쓰나미는 영웅설화의 패턴 그대로다. 결국 개천(슬럼독)에서 용(백만장자)이 나는 이 이야기는 사람 징하게 많은 기차역 군무 댄스로 엔딩크레딧을 올린다. 당연하지 않은가. 당연하지 않은가.
잘 늙은 미국 노인의 유언 <그랜 토리노>
미국 중서부 어디, 포드 공장 조향 파트에서 50년을 근무한 한 노인의 마누라 장례식에 가족들이 모인다. 그런데 교회에 차려진 할머니의 관 앞에서 손자놈은 문자질이고 피어싱에 배꼽티를 입은 손녀 지지배는 담배를 피우면서 영감의 분신 같은 1972년산 그랜 토리노를 달랜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잘나가던 시절의 '각그랜저' 정도나 될까? 기름은 많이 먹고 외관은 투박하며 도요타의 기능에 비해 뛰어날 것도 없는 차종 말이다. 어림없다며 혀를 차고 때로는 눈을 부라리는 이 노인에게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거기다 귀때기 새파란 신부 녀석은 “죽음이란 쓴맛의 고통과 단맛의 구원”이라는 같잖은 말을 내부치면서 이 고집불통 노인에게 고해성사를 하란다.
한국전쟁에서 수많은 적(?!)을 죽이고 살아남은 퇴역용사 월트 노인에게는 살아남은 것 자체가 고해고 짐이다. 도요타 자동차 세일이나 하는 아들놈은 양로원에 가길 바라며 재산이나 탐내니 노인의 친구라곤 개 한 마리뿐이다. 참나, 백인들이 살던 미국인 중산층 동네는 이제 노랑둥이 검둥이들이 설치는 동네가 되었다. 떠나지 못한 이발사와 노가다 십장 정도만 남았고 의사도 중국인이고 옆집에 이사 온 사람들은 쌍거풀이란 없는 보트피플 출신이 분명할 소수민족인데 알고 보니 묘족(苗族)이란다. 얼치기 흑인 갱들과 잘못 얽혀 소란을 피우는 묘족의 알 수 없는 친절로 인해 노인은 피곤할 뿐인데, 어느날 저녁 누군가 토리노를 훔치려든다. 옆집 묘족 청년이다.
집 앞에 성조기를 걸고 무료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지키던 노인(아! 저 지친 모습의 노인이 시거를 씹던 <석양의 건맨>이고 매그넘을 들던 <더티 하리>란 말인가?) 은 '에무왕(M1)'으로 동네서 싸가지 없이 이 묘족 가족을 괴롭히는 갱들을 혼내준다. 질서 없이 돌아가는 동네 꼬라지에 침을 찍찍 뱉는 노인네는 맥주가 떨어지자 술 한 잔을 얻어 마시려 이웃에 들렀다가 이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의 고유한 음식을 맛본다. 베트남전 당시 미국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대학살이 감행되자 이를 피해 건너왔다는 사연에 자신이 살기 위해 총질을 한 동양인들의 삶이 새로운 무게로 다가섬을 노배우의 지친 눈빛으로 말해주는데….
이 귀찮은 아시아 사람들이 정이 많은 사람들이란 걸 깨달으며 묘족 얼빵 청년 토드와 노인과의 말을 걸어주는 관계가 시작된다. 이탈리아계 동네 이발사 아저씨에게 데려가 욕지거리를 늘어놓으며 남자답게 대화하는 법과 미국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친다. 노인의 작업실로 데려가 토드에게 보여주는 장면은 의미 깊다. 그 수많은 공구로 상징되는 연장들은 그토록 많은 일을 한 미국이란 나라의 부지런함과 세계를 이끌고 또 고치고 하던 중요한 역할에 대한 상징일 것이지만 구구한 설명은 하지 않고 다만 보여줄 뿐이다. 할베와 토드는 이제부터 서로에게 의미 있는 타인이 되느니만큼, 산업화 시대의 강대한 미국을 추억하는 상징물인 그랜 토리노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는 뻔한 예측을 자아낸다.
“사람에게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그가 주문하지 않은 것”이란 노인네의 말씀처럼 그에겐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동네 양아치들과의 최후의 대결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란 아이콘 그대로 역시 그는 총을 가진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이 총잡이 할베는 손가락으로 빵 하는 시늉을 해 보일뿐 마지막 장면에서 총을 사용하지 않는다. 반전 없는 반전인 것. ‘요즘 애들, 문제야’라는 뻔한 무책임이 아니라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숭고함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지만 노인도 할 일이 있다는 말씀 아닐까? 비록 퇴물 경호원 혹은 퇴물 노동자로 늙어갈 지라도 자존심 있는 꼰대로 늙어 갈 것에 대한 주문으로 읽힌다.
<미스틱 리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체인질링> 등 만년에 만든 작품마다 의미 깊은 작품을 남긴 이스트우드 영감님께 한 가지 여쭈고 싶은 말이 있다. 글쎄, 사람이란 것이 평생을 골수에 새겨온 생각을 죽음 직전 몇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단맛의 구원'으로 쉽게 변할 수 있냐?, 이거다. 물론 답은 필요치 않다. 내 삶을 이어줄 싸가지 있는 제자에게 그랜 토리노를 물려주는 늙은 백인 도사의 반성문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연장선상에 있으니 말이다. 총잡이로 인생을 보낸 도사의 이 고해서를 다시 한 번 해석하자면 이렇게 집안 가득 채운 공구와 총으로 살아온 거대 미국이 이제는 의미 있는 모션으로 조용히 사라지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좋을지…
<더 레슬러> 그리고 제 81회 아카데미 상
작년 제 80회 오스카 시상식은 예술영화 전용관의 모습이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작품상 감독상 등 4개의 상을 안겼고 <데어 윌 비 블러드>도 2관왕을 수상했다. 글쎄, 칸느가 아닌 아카데미가 이런 난해한 영화에 상을 몰아 준 것은 그들이 견지하는 영화 이념이 변했다기보다는 코엔 형제나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으리라. 그렇다면 올해 81회 오스카가 <슬럼독>에게 8개 부문을 몰아준 것은 과연 크리슈나가 모습을 드러내서 그랬을까?
형제애와 순정 거기다 돈과 퀴즈왕 등극 등 이런 것들을 속도감 있는 내러티브로 전달하는 몽타쥬 또 적당한 시간에 악인을 죽일 줄 아는 맺음도 좋았다. 가능한 변화를 넘어선 인생 역전의 <슬럼독>들이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해피엔딩도 나쁘지 않았고. 그럴 수 있겠다. 역시 아카데미는 감동드라마를 선호한다는 그들 심사위원들의 입맛대로 돌아온 것이었을 테니. 그 이면에는 불황을 따른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에 희망을 던지려는 것 거기다 인도 및 제3세계 관객을 위한 아부도 작용했을 것이니 말이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 고 히스 레저가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이나 <월E>가 애니매이션 상을 탄 것에 공감한다. 그러나 아까운 배우가 있다. 바로 미키 루크! 희대의 미남으로 킴 베이싱어와 아름다운 섹스의 모던한 파티를 보여주던 <나인하프 윅>의 그가 <더 레슬러>로 돌아온 것에 우리는 낮은 탄식으로 응원을 보냈다. 그러나 카메라는 한 번도 그의 얼굴을 정면 클로즈업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제 그는 결코 매력이나 기품이 있는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카메라도 관객도 너무 잘 알기에. <더 레슬러>는 짠한 이야기다. 또 다시 이런 마이너 정서에 상을 주기에는 경제로 보는 사회분위기가 너무 어두웠을까?
인간에 대한 애정이 <슬럼독>의 수상으로 연결되었다고 믿는다. 현란한 칼라와 멋진 조명의 <슬럼독>이 우리가 보듬고 가야할 것에 대한 칭찬이라면 카키색 군복색깔보다 조금 다른 낮은 채도를 가진 우울한 블루의 <그랜 토리노>는 와버린 길에 대한 회한 그리고 어떻게 남은 생을 영광스럽게 마감할까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이 미국판 <워낭소리>는 81회 아카데미상에서 배제되었다. 그래서 전북비평포럼에서는 감독상에 한 시대를 읽는 눈을 보여준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감님을 올린다. 그럼 남우주연상은 누구냐고? 배우에 대한 애정으로, 당연히 <레슬러>의 미키 루크 형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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