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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4 |
[명인명장 │ 내가 살아온 세상] 연 제작 명인 이영석 옹
관리자(2009-04-06 09:58:28)
연 제작 명인  이영석 옹 이영석 연보 1919년  남원 쌍교리 출생 1939년  김효남여사와 결혼 1944년  큰아들 이귀열 출생 1970년  새마을지도자협의회 전북지부위원장 1988년  88 서울올림픽 성화 봉송 “연은 재주를 부릴 줄 알아야 돼” 정리  윤영래 편집장ㅣ사진  유백영 사진작가 올해 아흔 한 살. 3·1만세운동과 더불어 태어나 한국사의 질곡을 다 겪어냈습니다. 작달만한 체구지만 어릴 적부터 운동으로 다져진 몸에서는 지금도 그 기운이 넘쳐납니다. 백발을 휘날리면서 올림픽성화봉송도 했고, 탁구와 테니스로 젊은이들과 겨루기도 했었습니다. 스키를 못 타는게 아쉽다고 토로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기운이 달려 더 이상 운동장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여전합니다. 손수 만든 방패연을 겨울 찬바람에 맞세워 띄워내면 마음도 두둥실 같이 떠오릅니다. 그 연이 원하는 대로 춤을 출 적이면 신바람이 납니다. 구십평생을 연과 함께 해 온 이영석 옹을 만나러 떠납니다. “놀음이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을 해 보먼은 이 연이 사람이 겨울에 추운 것을 방호해야 한게. 글고 갖고 놀기가 존게. 그래서 연을 맹들아서 띄워서 여러 사람이 보먼서 즐거헌다 그말이야.” 군사무기로 사용했던 우리 연 연이라는 것이 어쩌냐면 연 맨드는 것을 최초로 헌 것은 한국서 모냐 맨들었어. 제주도가 그전에는 해적만 살았거든. 해적만 살면서 에, 탱자나무라고 있어. 탱자나무. 고것을 휘딱 말하자먼 요걸 울타리를 탱자나무로 숨거 갖고 들어갈 수가 없어. 어찌 탱자나무를 많이 숨거서 들어갈 수가 없응게. 방패연을 맨들아서 낙화, 고놈을 연 끄트리다 달아서 불을 댕기갖고 고것을 탱자나무에다 불을 붙여. 그래갖고 제주도를 들어가고 그랬어. 김뭐이야 그분이 연을 맹들아서 함락을 시켜서 연이 그리서 맨들었어. 연을 태워 한 해 액운을 날린다 놀음이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을 해 보먼은 이 연이 사람이 겨울에 추운 것을 방호해야 한게. 글고 갖고 놀기가 존게. 그래서 연을 맹들아서 띄워서 여러 사람이 보먼서 즐거헌다 그말이야. 연 맨드는 사람은 부지기로 많아. 연을 왜 뭐시냐 달집이라고 있지. 정월 보름날. 그 때 거그다 달아서 다 태워분져. 말하자먼 사람들 액운을 빼서 날려버린다고 해서 불교식으로 해서 고렇게 해서 풍습이 생겼어. 연을 맹들고. 그리고 논 것이 달리 갖고 놀 것이 없어. 겨울에 뭐 달리 헐 것이 있어야재. 휘딱 말하자먼 연노는 것이 사램이 즐거워할 만한 운동이지. 연은 원래 겨울에 했어. 여름에는 멱감으로 댕기고 헌 게 안 허고. 농사 끝나고 겨울에 헐 일이 없응게. 대나무 깍아 갖고 바람도 좋고 헌게 연 맨들아서 날리고 그랬지. 우리 어린 아덜은 연만 띄먼 다른 거를 헐 새가 없어. 화투를 친다, 투전이다 뭐 그런 거 말고. 그거야 어른들이나 했고. 그래서 연을 맹글아서 연을 띄운거여. 연싸움도 많이 했지. 이긴 것이 아니라 아마도 내가 자새 여그다 메겨서 연이 우게다 얹히먼은 이긴 적이 많고 밑으로 들어간 놈은 떨어지게 돼 있어. 연 떨어져 나간 것을 연 띄운 사람은 가서 잡덜 안 혀. 연을 못 맨드는 사람은 고놈을 잡지. 그래갖고 자기 집으로 가져가 뿐져. 휘딱으로 말허자먼 연쌈이라고 그랴. 방패연 하나에 삼전 한 오년 전에 남원시에서 나한테로 연 30개를 만들어 달라고 그림도 보기 좋게 많이 기리놓고. 연을 맨들어 봤자 안 가져 가먼 거시기 허거던. 그래서 확인을 했어. 그래도 해달라고 그래. 그래서 맨들었어. 근디 안 가져 가서 그대로 있어, 시방. 내가 연을 맨들기는 아홉 살부터서 맨들았어. 남원에 연희당패가 송씨라는 분이 연을 맨들아서 여남 개 맨들면 방패연 하나에 저 삼전씩, 삼전. 엽전 다섯 닢이 일전이여. 삼전 헐 때 내가 그 집이 가서 연을 맨든 것을 보고 연 맨드는 심부름을 많이 했어. 둘째 아들이 연 맨드는 것을 많이 보조를 했지. 근디 연을 방패연이 으뜸가는 연이지. 가오리연 같은 것은 연을 맨들어서 한 오십 개도 띄우기도 허고 그러는디 그런 것은 재주라는 것이 없어. 방패연은 재주를 부리면서 재미가 있게 띄우고. 가오리연은 재미가 없이 똑같애. 연은 방패연인디 저것은 시방 연 네 개 맨들거 인디. 종우는 한 20개 될란가 몰라. 자새도 올라올 때 두 개를 가지고 왔는디 하나는 어따 뒀는지 잘 모르갔고. 나도 여그 와서 이렇게 오래 있게 되먼은 연을 맨들아서 띄우기도 허고 그럴라고 저걸 남원서 가져 왔는디. 나는 언젠가 한번 테레비가 나왔는디 혼차 연을 맨들아. 그래갖고 혼차 요렇게 한쪽 붙이고 요거는 머릿살, 연을 맨든디 혼차 맨들드라 말여. 근디 나는 잡아줘야 돼야. 근게 어디든지 혼차는 못혀. 저것을. 저것을 맨든 것은 내가 헌디. 남원서도 대방국민핵교가 있는디 근디 거그서 선생님 여섯 분하고 학생덜 여섯하고 일주를 갈쳤어, 내가. 연살 깍은 것이랑. 허 그랬더니 일주일을 해도 하나도 되덜 안 혀. 모자 벗기기, 비녀 낚아채기 연살이 얼기설기 되잖어. 깍을 때 휘먼은 이렇게 원이 나와야 되는데. 안 나오면 요렇게 살을 조정을 해가지고 원을 맹글어야 돼. 요렇게 원을 내야만 종이하고 붙였을 때에 균형이 잡혀 가지고 연이 돌지 않고 나간다 이거여. 올라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연을 띄울 때 보먼은 연이 90도로 올라가. 그런가 하먼 바람을 이용해서 올라가는데 90도로 올라가는데 연이 옆으로 가는 것도 90도로 가. 범위가 솔찬히 넓지. 다른 사람은 그렇게 허지를 못혀. 남원 요천수에 거 저 옛날 다리가 있는데 거기를 지나가면 모자를 연줄로 벗기고 여자들 비녀를 고걸 쳐서 실로 걸어가지고 이걸 벗겨내고. 그렇게 장난을 쳤어. 내가 가라는 데로 지시대로 가는 것이 방패연이여. 원하는 대로 가서 떨어져야 되야. 서울에서 보는 방패연하고 틀려. 동쪽으로 가라 그러면 쭉 그냥 가서 90도로 솟고 다시 떨어지고 하면서 재주를 부렸지. 젤로 중요한 것이 요거이 머릿살인디 요것이 중요한 역할을 허. 요것을 저 대방국민핵교 가서 갈켰는디 깍는 걸 그렇게 못해. 원이 안되먼은 그것을 깍아 가지고 원을 만드는 것이 중요혀.  대방국민핵교가 배껴서 지금 중앙국민핵교여. 이거 중량을 안 달아봤지만 중량이 거의 똑같을 거여. 그리고 이렇게 보면은 이게 완전히 진원이 되다시피 하잖여. 그것이 중요혀. 구멍을 뚫는 것도 틀려. 한 가운데가 아니고 약간 위쪽으로 뚫어야 되야. 이것이 중요한 것이여. 젤로 뭐냐면은 이것이 조금만 달라져도 연이 그렇게 재주를 못 부려. 구멍이 너무 위로 가거나 아래로 가면 재주를 못 부려. 그냥 오랫동안 해 와서 아는 것이여. 그림도 내가 다 그린 것이여. 다 문양을 생각해갖고. 문 문자여. 다 내가 고안해서 한 것이여. 창호지 한 장이먼 연이 세 개가 나와. 연 큰 걸로 보자면 6자x3자 그런 것도 날렸고. 연날리기 대회 같은데 나가면 항상 일등을 했어. 상장도 많애. 내가 만드는 것이 기법이 틀려. TV에서 본게 혼자서 만들고 하더만 나는 혼자서는 못혀. 누가 거들어 줘야 되야. 우리 둘째가 많이 했지. 지금 파는 것들은 기법이 옛날하고는 달라. 근게 재주를 못 부리지. 옛날에 만든 것들이 집에 불이 나서 인자는 다 없어졌어. 노름은 못해도 운동실력은 타고나 고향은 남원 광한루 옆에여. 시방도 방천으로 길이 났응게. 우리 집 앞으로 삼거리여. 요천 바로 옆에. 고것도 해방 막 되았을 때, 다른 사람들은 허가를 안내서 집을 지어서 나중에 철거를 하고 그랬는디. 나는 난중을 생각해서 허가를 내야되겄다 해서 허가를 해서 시방 사는 집이 165-8번지여. 거그다 집을 지어갔고 산 것이 시방까지 산 것이여. 내가 노름은 이제까지 해본 적이 없어. 휘딱 말하자먼 화토 같은 거, 장기 같은 거는 시방까지도 내가 헐 줄을 몰라. 근디 왜 그냐먼 뛰어서 댕기는 운동, 수영도 잘 했고. 씨름도 잘 했고. 씨름은 어머니가 젤로 좋아해. 씨름을 해서 대양도 따오고, 삽도 따오고 그런게 뭘 갖다 준게 좋아라 허지. 그런게 어머니가 좋아라 헌 것을 운동을 했지. 그런게 내가 단거리, 100m를 12초까지 뛰었어. 그런게 어디든지 가먼 일등이여. 그런데다가 릴레이라고 계주있잖애. 내가 3번으로 뛰었는디. 1번은 황인준이, 2번은 유재천이, 3번은 내가, 4번은 그담에 김한표라고 있어 소방대도 댕기고 지그 아버지는 뭐이야 포목점을 했어. 그리고 우리도 가난한 집이 아니고 네 사람이 부잣집 아들들이여. 긍게 네 사람이 희떡꿍이여. 한 조여. 우리 조가 그렇게 어디든지 가먼 내가 앞봉. 그래갖고 어디를 가먼 뭐시든 일등이여. 또 내가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했어. 귀엽게 놀아. 용성학교 후문 뒤로 가먼은 연못이 있어. 연못 새에 버드나무가 높이 커. 거그서 뺑 둘러서 버드나무가 서 갖고 있응게 거그가 코트장을 맨들만 혀. 돈이 없응게 판자로 탁구채 같이 맨들어서 운동을 허고 그랬어. 근디 일본교장이 와서 우리 넷한테 사정을 했어. “여서 놀지 말고, 운동장 가서 놀아라”하고. 노래도 잘 허고 춤도 잘 추고. 근게 교장선생이 와서 운동장에서 놀으라고 먹을 것도 주고. 너이 빤스입고 운동도 허고 춤도 추고 노래도 허구 긍게. 그래서 우리가 운동장에 나가서 놀고 그랬어. 광산, 그리고 평양에서 배운 양복기술 왜정 때 내가 광산을 했어. 산내면 있지. 거가 달궁이라고 있어. 고 앞에 가서 니켈광산을 발견을 했어. 형님이. 나보다 9살 더 자셨어. 형님이 광산하고. 내가 광산일을 감독을 했거든. 그래서 기부도 허고 그럴 수 있었지. 그래서 광산일도 십팔 년을 했지. 내가 장가가기 전에 열다섯 살부터 광산 십장노릇을 내가 했어. 굴에 댕기먼서 구멍을 뚫고 돌이 많이 깨진가 이런 거를 내가 지시를 했어. 일제 때는 일본사람들 시킨 대로 하고 살았지. 교장도 일본사람이고. 그때는 말도 허고 못허고. 애리기도 했고.  거 옛날에는 굴을 파서 광석을 파 내갖고 고놈을 군산으로 제련소로 보내갖고 빼가지고 고놈가지고 거시기 하고. 고것도 왜놈이 했어. 첨에는. 근디 구멍 뚫어진거 훤히 뵀는디 시방은 세멘으로 싹 막아갖고 그 자리에다가 저 나무를 숨거서 시방은 보먼은 매꼼혀. 좋아. 그거이 남원의 객산이라고 혀. 그 전에 산이 자꾸 주루룩 와 갖고 거시기, 기운이 뭉쳐서 산이 됐다고 해서 객산이라고 혔어. 우리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었어. 나는 돈을 모르고 살았응게. 우리 아버지도 유식허덜 못해. 국민핵교도 안 나왔어. 근디 어떻게 눈치가 빠른가 일본말을 배워갖고 동양척식회사 농감을 했어. 농감이 뭐이냐먼 논을 사서 다른 사람을 주는디 그것을 감독을 해. 농사 다 지먼은 감평을 해. 그 머냐먼 6.25 때 이북서 내려와 갖고 나락 세가지고 그것 계산해서 빼앗간 거 맨이로 그거이랑 비슷혀. 일년이먼 얼마냐먼 천오백 섬을 했어. 그것을 이리서 와서 사가, 그놈을. 가만히 봉게 거그서 온 사람이. 내가 열두 살 때 정도여. 근디 나를 그거를 못 허게 해. 가만히 본게 저울을 단디 저울 뒤 끝에다가 손을 대. 사러 온 그 사람이. 가만히 본 게 백야달 근을 쟀는디 야달 근은 쥐가 먹고 어쩌고 소비를 해갖고 백근을 혀. 한섬이 두 가마니인게. 우리 아버지 제사지낼 때는 그 노적 찍은 사진만 놓고 제사를 지내.   그래갖고 해방이 된게 촌에 가서 있으먼 먹고 살 것이 없잖애. 내가 스무 살에 장개를 갔어. 우리 때는 부모님 시킨대로 했지. 결혼 헐 때도 그놈은 신경도 모르지. 쳐다보도 못 했어. 근디 그때는 나두 스무 살을 먹었지만 가정살림 사는 거 그런 거 신경을 안 썼지. 그런디 인제 결혼을 허고 본 게 돈벌이가 없쟎애. 그래서 고향에선 기술을 못 배우고 그래서 평양으로 갔어. 평양 가서 기술을 배왔는디 삼년 만에 배워갖고 왔어. 양복기술. 그래갖고 거그선 일등기술자가 돼가지고. 학교가 아니고 일본말로 하자먼 사쿠라마찌라고 거그서 양복점을 해서 거그 들어가서 배왔지. 그때도 평양은 양장이 있었고, 우리 남원에는 양장이 없었지만은. 거그서 삼년 만에 와갖고 대방양복점을 했어. 스물세 살에 와 갖고 스물다섯 살부터 농사짓기를 시작했지. 말하자먼 겨울에는 양복일을 허고 봄에는 농사를 짓고. 근게 놀새가 없어. 그래서 내가 남원서 살아도 육자배기 하나를 못 배왔어. 게으르먼 못허거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다 내가 군인을 갈라고 본게 마누래가 못 가게 했어. 죽으먼 과부가 될 거 아녀. 그래서 내가 소방대를 댕겼어. 군인을 제대해 주드라고. 거그서도 내가 훈련반장을 했단 말여. 그 참 재미가 있지. 훈련시간이 닥치먼 ‘혹 내가 말을 잘못 허드래도 슝내만 잘 해라. 발만 잘 맞차라’ 그러고 시키지. 의용소방대지. 의용소방대인게 월급이고 머시고 없었지. 근디 어쩔 수가 없지. 훈련반장이 돼나서 매일 안나갈 수가 없었지. 군대 안가는 거 보고 들어간 거여. 내가 군대 가버렸으먼 죽었어. 남원서 3연대가 있었는디. 3연대 본부가 있었어. 여순반란사건 때 중대장 하나가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었어, 중위여. 그 연락이 왔는디 본게로 남원에서 말하자먼 짐차 고걸 열 대를 해 가지고 갔는디. 내가 거그 있었으먼 나는 그때 뭣을 했나먼 양복점포를 할 때였어. 자동차 열 대를 해 갖고 재를 넘어간디 거가 길이 좁아. 저 몬당에서 사격을 준비를 해 놓고 밑에서는 거그서는 또 한 거시기를 해 갖고. 열 댄게 5미터만 해도 백 미터 가차이 돼 잖여. 가운데가 온 게 우아래서 쏜 거여. 우게서 쏘고 밑에서 쏘고 올라가고. 그래서 몰살해버렸어. 그때 내가 갔으먼 죽었어. 근데 내가 이상하게 죽을 만한 자리는 빠져. 북한군이 오먼 사이렌도 불고. 불이 나고 그러먼 끄고 그러는데. 남원 요천수에서 남원역까지 하수구가 상당히 큰 놈이 있어. 거그서 피난민들을 안내를 허는디. 입구에서 미군을 만났어. 근데 암호를 잊어버려서 총격을 받았거든. 근디 하여간 거시기 권총가지고 신호를 해 가지고 통했어. 그렇게 굴 속으로 들어가서 남원역 쪽으로 나왔는데 내가 죽었다고 식구들한테는 연락이 갔었나봐. 하여간 전쟁 때는 역할을 많이 했어. 불 잡는 것도 다 방법이 있다 소방대를 다니면서 느낀 것이 많애. 옛날에는 다 초가집 아니여. 불이 나면은 사람들이 농이 그렇게 중요해서 그걸 꺼내려고 하는데, 나는 농을 못 꺼내게 했어. 농을 꺼내면 집이 무너지고 농을 그대로 두고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낼 수는 있는디 농을 꺼내려고 볼려면 집이 무너지지 않겄어. 우리 애덜 어릴 적에 우리 집에서 불이 났는데. 남원만 해도 시내라고 하잖아. 용담 그 정도 가면은 동네에서 불이야 하먼 세수대야에다가 바께쓰에다 물을 들고 나오거든. 근데 시내사람들은 불이야 하면은 전부 쳐다보기만 해. 어떻게 불을 끄냐면은 내가 입은 옷을 가지고 벗어서 불을 비비는 것이여. 비비니까 불꽃이 사라지잖아. 그러니까 물을 천천히 갖다 부어도 꺼질 수가 있는 거여. 우리 집에 불이 났는데 홀라당 태울 수도 있었는데 누가 물을 갖다 주는 사람이 있어야재. 근데 내가 옷을 벗어가지고 옷으로 비벼서 불을 껐거든.  우리 큰아들이 나한테 치사 받을 때가 어느 때인가 하먼은 톱밥난로 땔 때여. 톱밥. 그런디 큰아들 보고 나가서 톱밥 널어라. 그런게 나갔어. 근디 아버지 불 그래. 나는 하도 소방대를 댕긴게 불을 많이 봤응게 내가 사다리를 맹글아 논지가 일주일 됐어. 근디 그게 불이 붙어서 타니까 얼렁 뛰어갔어. 얼렁 가서 사다리를 갖다 놓고 올라가 있어도 물이 안 와. 소방대 단체복을 내가 했어. 소방대를 갔다 와서 밥을 먹는 순간이야. 올라간게 물이 와야지. 그래서 물을 집에다 담아두라고 그려. 시방도 낙수물, 고놈 받아서 이만한 통에서 받아서 고놈 데와서 목욕도 하고 그래. 시방도 그래. 서울올림픽 성화봉송 내가 사람도 많이 살렸어. 어디 놀러가먼 미리서 나 혼차 가서 수영을 다 해봐. 깊이 같은 거시랑 돌이 물 속에 있는가 보고. 사람을 살리먼은 앞에서 잡으먼 둘 다 다 죽어. 근디 물속으로 들어가서 발을 바챠 줘. 내 어깨에다 발을 대고 일어서먼 깊어도 숨 쉴 틈이 있잖여. 요렇게 해서 요천수에서 사람 내가 많이 살렸어. 겨울에도 그래. 겨울에도 다른 사람들은 옷을 벗고 못 들어간디 내가 삼각빤쓰만 입고 들어가요. 죽었다 허먼은 내가 끈을 내 몸에 달아. 물 속에 들어간게 고드름이 있잖여. 삐짝삐작하고 우에는 매꼼해. 싹 벗고 막대기로 얼음을 깨. 그래갖고 들어가서 물속에 들어가서 뜨먼 많이 못가. 한손으로 사람을 잡고 7초 안에 오십 미터를 가. 그런 것도 내가 다 시험을 해 봤어. 내가 칠순땐디 자식들이 잔치해 준다고 달궁을 갔어. 거가 계곡이잖여. 그래서 다이빙을 하고 그랬지. 근디 우리 큰아들이 폼을 잡고 바우로 올라가드라고. 그래서 내가 밥먹다 말고 다시 물에 들어갔지. 근게 물어봐 왜 물에 들어가세요 하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너 뛰먼 밑에서 있다고 건질라고 그런다 했지. 요즘 태어났으먼 내가 철인삼종경기를 했을거여. 내가 시대를 잘못 태어났어. 장마가 지먼 물이 세게 내려간 디가 있고, 물이 안 내려간 디가 있어. 물살이 없는 디는 들어가먼 오히려 못 나와. 그러먼 물 속에 들어가서 바닥을 치고 쑥 나와. 내가 스키를 못 타는게 아쉬워. 88올림픽때는 성화봉송도 했어. 내가 운동을 좋아헌게 시에서 선택을 헌거지. 남원서는 나 모르는 사람이 없어. 십만원이나 주고 테이프로 맨들어 논 것도 있어. 조가 있어. 열 명씩. 열 명씩인데 내가 봉화를 잡고 선두에 스지. 근디 나는 천천히 간디 그 사람들은 못 따라 온게 죽겄다고 천천히 가재. 천천히 뛴다고 뛰었는디. 마라톤은 초등핵교 때부터 했응게. 고무신 신고도 뛰었응게. 테니스코트에 등장한 백발 할아버지 내가 운동을 좋아해서 많이 했어. 탁구를 시작헌 것도 조기축구회 회장을 허는디 막상 끼워달라니까 회장님은 쉬세요 하더라고. 그래서 저놈들 이길게 뭐가 있나 하다가 탁구를 한 거여. 서울 큰아들네 와 가지고 탁구장을 갔는데 누가 탁구 좀 받아줄래 그러니까 어떤 고등학생이 제가 받아들일게요 그려. 근디 내가 잘 치거든. 갸가 어떻게 떨구도 내가 계속 같은 쪽으로만 받아줬거든. 그러니까 얘가 재미가 없으니까 할아버지 저하고 내기 하실래요 그려. 그럼 내가 발 하나 안띠고 하마. 그래서 하는데 당연히 못 받지. 그러니까 그때서야 주인이 와서 죄송합니다 제가 받아들일게요 하더라고. 그렇게 탁구를 쳤지. 근디 고렇게 고등학생들이 쳤는디 그 녀석들이 대학을 가더니만 치니까 할아버지 탁구 그만치시고 저희랑 테니스 해요 하니까 테니스를 시작한 거지. 그래서 테니스를 야든 야답살 먹을 까지 했어. 남원 법원 옆에 코트장이 있거든. 내가 그래도 누가 보먼 그냥 치는 폼이 아니고 내기를 하는데 지먼은 다 식구들 밥도 사고 그랬어. 상장도 많이 있고. 근디 내가 서울을 왜 싫어하냐면은 테니스를 매일 치는데 코트장에 가먼 갸들이 말은 안해도 아침에 우리도 바쁜데 할아버지가 귀찮게 하느냐 이러는 거지. 실은 내가 젊은 애들보다 잘 치는데. 근데 우리 아침에 시간 없는데 할아버지가 왜 귀찮게 하느냐 이런 거지. 머리는 하얗지, 하얀 유니폼에 하얀 백에 딱 나타나면 치매 걸린 노인네인 줄 알고 안 넣어 주거든. 그러니까 내가 서울 큰아들네 와서 있기가 싫어. “세상에 늙은게로 외돌내미여” 내가 반장도 오래 했어. 내 뒤로 우리 작은 아들이 또 오래 했구. 난 술먹는 것도 싫어. 박정희 대통령 때는 새마을지도자 전북지부 위원장도 허고 그랬어. 하여튼 나라에서 하는 일, 동네에서 하는 일, 돈 되는 일 빼구 봉사로 하는 일은 내가 다 했어. 내가 지금 화투 안치고 계집질 안 하고 이게 유일한 취미가 스포츠 쪽에 테니스, 축구, 탁구, 마라톤 이런 거여.우리 애들 어렸을 때부터 도로공사 비포장도로니까 자갈 까는 것도 가져다가 깔아주고. 글고 내가 양복기술이 알아주는 기술이여. 70년대 초반에는 양복에는 최고 대표기술자였어. 우리 작은 아들이 내 뒤를 받아서 하고 있어. 살아온 길은 내가 봤을 때는, 자식헌티로는 빵점이고. 세상 사람한테 피해 안주고 남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줬다는 거. 우리 형제간이 칠남매여. 딸이 세 명, 아들이 너이. 근디 시방 여자만 살아있어. 나보담 여덟 살이 작어. 누이동생이 그 담에는. 늙으먼은 구성이 없어. 참 이제 아이 엠 소린디. 살아봐. 내가 아흔 세 살이여. 세상에 늙은게로 외돌내미여. 큰아들네서 노인정에를 댕겨. 시방 나겉이 건강한 사람이 없어. 우리 아들이 잘 대접을 허고 그런게 내가 이렇게 건강하지. 그리고 그전에 내가 어릴 때는 전염병이 많아서 대개가 열 명은 다 낳아. 잡덜 못해. 나는 뭐이던지 내가 경영을 해가지고 애기들도 했어. 내가 시방 낳기는 열둘을 낳았는디 하나 놓쳤어. 그러고는 열 하나가 남았어. 저그 노인정을 가도 나같이 많이 난 사람도 없어. 나이도 많지. 아들 딸도 많지. 노인정에 가도 내가 최고로 많지. 어른대접 받는 것이 안 좋은 것이여. 똑같이 농담도 허고 웃고 자꾸 먼 얘기를 해야 사람이 따리고 그러는디 거 가먼 영 아니여. 전통을 잃어버린 우리 연 내가 팔십 살까지 연을 날렸어. 아마 팔십 살 넘어서까지 했을거여. 겨울에는 이게 스포츠지. 운동이 되거든. 주위사람들은 구경하면 재밌고. 근디 연은 배울라고 허는 사람이 없어. 살 깎는 거 배울라고 허는 사람은 있었는디 오래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은 없어. 연이 애덜 갖고 노는 것인게 잠깐 와서 배우고 잠깐 만드는 걸로 사람들이 안게. 근디 살을 못 깍아. 글고 사람들 인식이 연을 만드는 기법이 있는 거이 아니고 연을 날리는 기법이 있다고 생각을 혀. 연이 좋고 나쁘고를 일반 사람들은 몰라. 연 날리는 것만 잘한다 그렇게 얘기하지. 요 연은 잘 만들었다 못 만들었다 그런 것이 없어. 그러니까 만드는 것은 배울려고 안 하지. 그러니까 길거리에서 파는 것이나 내가 만드는 연이나 똑같이 생각을 하는 거지. 나는 것은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볼 때는 저 연은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지. 웬만한 사람은 어떤 것이 잘 만든 것이고 아닌지 알덜 몰라. 전통이고 뭐시고 그런 것은 모른게. 서울서도 한강에서 연 띄우먼 올라가는 것만 봐. 방패연은 재주부리는 것이 목적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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