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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특집 │ 전주국제영화제] 전주, 부활하는 영화의 역사 쓰기
관리자(2009-04-06 09:54:25)
전주, 부활하는 영화의 역사 쓰기
윤영래 편집장
한국영화사에서 전쟁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피아골>, <아리랑>이 전주를 비롯한 전북에서 촬영ㆍ제작되었고, 한국최초의 컬러영화 <선화공주>를 비롯해 <애정산맥> 등 당대의 흥행작들이 전주꼬리표를 달고 탄생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벌써 10회를 맞는다. 지역에서 무슨 국제영화제냐라는 비판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당당히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축제의 하나로 자리 잡았을 뿐더러 해외언론에서도 전주국제영화제를 주목하고 있다. ‘디지털·대안·독립’등을 기치로 내세우고 출발한 전주국제영화제. 그러나 전주토박이들에게는 화려했던 영화도시 전주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다. 50~60년대 제작된 많은 영화들이 바로 전주에서 촬영되었던 것. 그 기억을 더듬어 본다.
1950년대와 60년대 전주가 한국영화의 메카였다고 한다면 요즘 세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영화판에 인적·물적 자산이 넘쳐나는 충무로도 아닌, 그렇다고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환경이 특별히 좋은 대도시도 아닌 일개 지방도시에서 영화산업이 번성했다면 그 문화적 배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 그 시절. 전주는 한국영화의 중심이었고, 굵고 짧은 발자취를 한국영화사에 새겨놓았다.
한국영화사에서 전쟁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피아골>, <아리랑>이 전주를 비롯한 전북에서 촬영·제작되었고, 한국최초의 컬러영화 <선화공주>를 비롯해 <애정산맥> 등 당대의 흥행작들이 전주꼬리표를 달고 탄생했다. 한국전쟁 이후 극심한 혼란기동안 타 지역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영화부흥’이 전주라는 독특한 문화적 환경과 당대를 풍미했던 전북영화인들의 도전정신 속에서 잉태되었던 것이다.
전주표 영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그러나 전북영화의 씨앗은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군산에서 뿌려졌다. 당시 군산은 일제 때 개항이후 유입된 외래문화가 그 어느 지역보다도 풍성했던 탓에 영화에 대한 관심 역시 남달랐다. 설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북 최초의 공연장인 군산극장과 영화관인 희소관이 모두 군산에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군산에서의 영화제작은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됐을 것이다. 전주에는 1925년에 개관한 제국관을 전라북도에서 인계받아 도립전주극장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운영되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가설극장이 운영되다 1957년 1,000석 규모의 중앙극장이 개관하게 되는데 단발에 그치기는 했지만 현 전주국제영화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1959년에 전북일보와 공동으로 개최한 ‘단기 4292년도 제1회 전북영화상’이 바로 그것. 비록 1회 행사에 그쳤지만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영상문화발전을 위해 시도된 첫 작업으로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949년 이만흥 감독의 <끊어진 항로>가 선보인다. 이 작품에는 훗날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이강천이 미술담당으로 참여하여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한국에서도 몇 안 되는 일본대학 영화과 출신이었던 이 감독은 군산신문기자로 군산과 인연을 맺은 뒤 화려한 영화인생을 연다. 같은 해에 한형모 감독(1917~1999)의 <성벽을 뚫고>가 탄생한다.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특급감독이었던 한형모 감독은 이만흥의 소개로 전주를 찾아 좌·우익의 첨예한 갈등을 그린 반공영화를 내놓는다. 대부분의 반공영화가 정부의 제작지원으로 촬영된 반면 이 영화는 제작사의 자체제작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반공영화이자 영화배우 황해가 데뷔한 작품이기도 하다. 여순반란사건을 소재로 해 탄생한 <성벽을 뚫고>는 해방 이후 베스트3에 선정될 만큼 수작으로 꼽힌다.
한국전쟁 말부터 전북영화인들에 의해서 본격적인 영화르네상스가 펼쳐진다. 반공영화이자 경찰계몽영화였던 <애정산맥>과 <탁류>를 신호탄으로 전북영화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을 그린 것과 같은 이름과는 달리 <애정산맥>은 빨치산 토벌대의 무용담. 전북경찰국의 후원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스펙타클한 화면구성으로 공비토벌에 나선 전투경찰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만흥의 또 다른 영화 <탁류>는 채만식의 소설 <탁류>와는 전혀 별개의 영화로서 이 작품을 통해 한국영화계의 거성인 최무룡이 데뷔하게 된다. 자타공인 전북영화대표작들인 <아리랑>과 <피아골>이 각각 1953년과 1955년에 탄생되면서 전북영화는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는다. 한국 최초로 경무대시사회라는 영광을 누린 <아리랑>을 통해 1954년 한국영화계에 대한 면세조치를 이끌어낸 전주출신 영화인들이 제작한 자랑스러운 전북영화이기도 하다. <아리랑>에는 당시 악극단에 몸을 담고 있었던 허장강, 변종기 등이 출연하여 영화배우로서 자리 잡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당대의 명배우 김진규, 노경희, 이예춘 등이 대거 출연했던 <피아골>은 지리산 피아골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빨치산 아가리부대이야기다. 촬영에 참여했던 배우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실제 빨치산으로 오해받아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던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 이 영화는 또 현장감 있는 리얼리티로 철저한 반공영화였으면서도 오히려 용공시비에 시달려야 했다.
<아리랑>과 <피아골>을 비롯하여 모두 28편을 감독한 이강천 감독(1921~1993)은 전북영화르네상스를 주도한 실질적인 주역이었다. 영화에 대한 집념으로 간판을 그리던 그림쟁이에서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의 반열에까지 올라선 그는 현장에서 어깨너머로 익힌 영화에 대한 지식과 예술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강천이 전주의 영화문화를 주도한 주역이라면 한국영화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제작자 김영창은 든든한 후원자였으며, 역시 제작자였던 김병기나 시나리오작가 김종환과 조진구, 촬영기사 강영화, 탁광 등은 당시 영화판에서 동고동락했던 대표적인 영화인들이었다. 그러나 50년대 후반부터 불어 닥친 지방영화인들의 중앙무대 진출분위기로 인해 전북영화인들은 60년대 한국영화전성기를 정착시킨 주인공들이었지만 그와 반대로 전북영화는 급속한 내리막이 불가피했다.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서울이 복구되고 자본과 인력이 충무로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전북영화계의 주역들도 서울행 시류에 몸담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전주가 1950년대 한국영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전주문화의 새로운 이정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 전반이 서울로 집중되어버린 오늘, 50년대 전주의 화려한 영화이면사(裏面史)를 재조명해 오늘에 접합시키는 일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가장 화려하게 꽃피울 영상문화 중심지로서 전주를 가꿔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주국제영화제도 벌써 10회를 맞았다. 새삼스레 옛날을 추억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북영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선배 영화인들의 도전정신을 되짚어보자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아쉬웠던 시절, 한국영화를 주도했던 선배들의 도전정신과 열정을 되살려 다시 한 번 영화전성기를 주도하자는 얘기다. 전주국제영화제도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로 자리를 잡았고, 영화종합촬영소도 완공되었다. 전주시 고사동에는 올해 완공을 목표로 영화영상진흥센터(시네콤플렉스)가 한창 공사 중이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일수도 있지만 물적 인프라만 가지고 영상문화를 꽃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적 인프라는 만들었지만 이를 운용할 인력이 필요하다. 그것도 도전과 열정, 실험정신을 가진 인재가 말이다.
1950년대 전북영화(한국영상자료원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