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4 |
[저널특집 │ 전주국제영화제] 제10회 전주국제영화제를 말하다
관리자(2009-04-06 09:52:27)
작은 역사의 문턱 넘기, 더 파격적으로 더 자유롭게
전찬일 영화 평론가
사실 영화제에 대해 말하기란 마냥 만만하면서도 여간 성가시지 않기 십상이다. 그 말을 하는데 별다른 수고가 요청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무방한 한편, 그 어떤 대단한 영화 전문가가 제 아무리 그럴 듯한 말들을 쏟아내더라도 그 말들이 현실적 효력이나 영향력을 발휘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탓이다. 그런 의구심 탓일까, 어느덧 열돌을 맞이하는 전주국제영화제(이하 JIFF)에 대한 내 나름의 총체적 평가 및 바람을 담은 이 글의 변변찮은 서두를 끄집어내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몇 차례나 원고 마감을 어겨가면서까지.
혹할 만한 <디지털 삼인삼색>과 <10주년 기념 상영>
원고 요청에 응한 이상, 그럼에도 무슨 말인가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기념일, 그것도 열돌맞이 생일을 기리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 10주년에 걸맞거나 튀는 프로그램 등이 있을까 싶어 영화제 사이트를 찾았다. 비평적 측면에서 <밤과 낮>을 통해 2008년 한국 영화계를 한층 더 살찌운 홍상수 감독을 비롯해, 2007년 <너를 보내는 숲>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차지하며 화제의 감독으로 다시금 부상했으나, 일찍이 1997년 장편 데뷔작 <수자쿠>로 칸 황금카메라(신인감독)상을 거머쥐며 화려한 신고식을 치른바 있는 일본의 가와세 나오미, <멜랑코리아>로 2008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부문 대상을 안은 필리핀의 명장 라브 디아즈 세 감독으로 구성된 디지털 삼인삼색의 면면부터가 제법 혹할 만하나, 새삼스러울 것은 없으니 넘어가자.
3월 25일 현재, 총 11편으로 이뤄진 ‘한국장편경쟁’과 12편의 ‘한국단편경쟁’, 4편의 전북지역 독립영화로 짜여진 ‘로컬시네마 전주’, ‘회고전 :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특별전: 스리랑카’ 등의 프로그램들이 발표되었으나 아주 특별할 것은 없는 데다 최종 프로그래밍은 발표 전인 만큼 그 역시 넘어가자. 와중에 “그들이 전주로 돌아온다!”라는 슬로건 하에, JIFF를 찾는 관객들에게 가장 특별한 선물이 될 프로그램으로 준비했다는 ‘10주년 기념상영’ 섹션에 눈길이 향한다. “지난 9년간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감독의 데뷔작을 재상영하는 ‘JIFF가 발견한 감독열전’, 전주국제영화제 수상작 감독들의 신작을 상영하는 ‘수상자의 귀환’, 일반 관객의 설문조사를 통해 선정된 다시 보고 싶은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을 상영하는 ‘다시 보고 싶은 JIFF’”가 그 주인공들이다. 무엇보다 2000년대 세계 작가 영화의 최전선으로 부상한, 태국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장편 데뷔작 <정오의 낯선 물체>를 만날 수 있다니 적잖이 설렌다. 그러나 이 특별 섹션마저도 그다지 튄다고 할 수는 없다. 어느 모로는 평범한 기획에 지나지 않는다.
전주, 수렁에 빠진 평론을 건져 올리다 <영화 평론가 마스터 클래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던가, 평론가인 내 눈이 의심스러운, 단연 튀는 프로그램은 정작 엉뚱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다름 아닌 영화 평론으로, 2004년부터 선보인 마스터클래스를 꾸민다지 않는가. 그것도 구조주의적 분석으로 유명한, 프랑스 톱클래스 영화 연구자 레이몽 벨루 같은 이를 전면에 내세워서. 이 특별 프로그램에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바야흐로 영화 평론이 위기를 넘어 사망선고까지 내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탓이다. 특히 천박할 대로 천박해진 이 땅의 영화 풍토에서는 더욱 더.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 땅의 영화제들 중 그 어느 곳에서도, 영화 평론에 이처럼 일말의 예우 내지 존중이 내포된 파격의 ‘장’을 마련해준 전례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관객들에게 영화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 주고 이론적인 잣대를 통해 영화를 분석하는” 것은 고사하고, 평론이 “매주 개봉하는 수많은 영화들 중 관객들이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조언자의 구실”조차 변변히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자괴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주지의 현실이다. 일반 관객을 위한 영화 안내 가이드는 이제 더 이상 영화 평론가들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종종 그들 이상으로 영화에 밝기도 한 일부 네티즌들의 몫이 되어버렸지 않은가. 영화 평론가나 기자의 전문적 평가보다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확산되곤 하는 이른바 입소문이 영화 보기 및 흥행 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은 클리셰가 되었고….
영화제 측의 말대로, 그럼에도 여전히 “평론가들은 좋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규모에 밀려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는 작품들을 재평가하거나 발굴하는 중요한 기준을 마련해주기도 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와 연관해 평론가 김영진이 문화전문계간지 『쿨투라』에서 펼친, “주류가 되려는 욕망을 포기한다면 21세기 한국의 평론 지형에서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을 것”이라는 주장은 되새길만한 가치가 있다. 그 주장이 과연 현실화될 수 있을지 여부는 장담할 순 없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이 특별한 기획이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언론인이자 영화학자라는 미국의 리처드 포튼이나 호주의 영화 평론가 애드리안 마틴이 벨루 같은 톱클래스 인사가 아니어서가 아니다. 3인 모두를 벨루 같은 최상급으로 채우길 바란다면, 과욕이요 최고 지상주의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자주 마련될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 어렵사리 성사된 뜻 깊은 장이라면 한국 평론가 한 명쯤은 함께 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아쉬움을 못내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적임자를 찾기 쉽지 않을 거라는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10년이 주는 안정감의 근원
영화 평론 마스터클래스를 위시한 2009 JIFF 프로그램들을 둘러보면서 스며든 느낌은, 숱한 우여곡절들을 뚫고 10년이란 작은 역사의 문턱 앞에 서게 되었다는 영화제 주최 측의 어떤 안도감과 자신감이다. 그 안도감, 그 자신감은 민병록 집행위원장과 정수완 수석 프로그래머의 인사말에서부터 선명히 배어있다. “…지난 10년 간 독립영화, 예술영화, 실험영화들을 통해 관객들과 새로운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습니다. 낯선 영화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가는 많은 관심을 통해 영화제가 소통을 이루는 진정한 장이 될 수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위 안도감 및 자신감은, 상대적이긴 하나 8회를 기점으로 영화제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으로 방향 선회했기에 품기 가능했을 터. 2년 전 이 지면에서 나는 “정체성 및 방향성 등을 둘러싼 크고 작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전주영화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안정되어가고 있다’고 단언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 단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9회에 이르면 그 평가는 더 호의적이다. 다소 길긴 하나, 9년 째 연재 중인 어느 지방 일간지 내 고정면을 인용해보련다.
“영화제 분위기는 과연 어떨까. 지난 해 관객 만족도에서 국내 7대 국제영화제 중 부산과 더불어 최하위를 차지했다는데. 워낙 상영관이 작은 터라 게스트 및 프레스에 배정된 좌석이 적을 수밖에 없고, 그 탓에 여간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티켓을 구할 수 없다고 투덜대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건만. 게다가 다분히 경직된 '정시 입장' 고수로 인해, 시비 발발 가능성이 여전히 농후하지 않은가….
겨우 이틀이라는 제한적 체험으로 판단컨대 그 분위기는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장 고사동 영화의 거리에서부터 일찍이 맛볼 수 없었던 열기가 마구 뿜어 나오고 있었다. 만나는 이들마다 거의 예외 없이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지난 해 일부 매체를 중심으로 드러났던 부산영화제를 향한 일말의 적의 내지 적개감과는 대조적이었다. 심지어는 상기 투덜거림 속에서도 일말의 반가움이 배어 있었다. 부산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류의 짜증 섞인 불평·분노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저렴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전주 특유의 먹거리를 새삼스럽게 들먹거리진 말자. 혹 초청 영화들의 전반적 수준이 올해 유난히 상향되기라도 한 걸까. 혹시 '관객친화적인 프로그램들'이 대거 늘어나기라도 한 것일까. 그건 아닐 터. 루마니아 크리스티안 네메스쿠 감독의 <캘리포니아 드리밍> 등 친-관객적 수작들이 없진 않지만, 그 수가 많은 건 결코 아니다. 프로그래밍은 대체로 여전히 '대안 지향적'이며, 그래 적잖이 버거운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혹 영화제 운영이 전반적으로 안정·성숙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영화제의 전반적 평가를 겸해 전주를 찾은 동료 비평가 역시 무척이나 호의적 태도로 엇비슷한 의견을 피력한다. 무엇보다 자원봉사자들이 한층 더 친절해졌단다. 우려와는 달리 정시 입장도 정착된 느낌이란다. 영화제 열기가 전례 없이 뜨거워졌다면서. 결국 영화제 주최 측과 더불어 영화제를 방문한 관객들이 그만큼 더 성숙해진 것이다, 반갑게도.”
난해함, 전주영화제를 구분 짓는 자리
2000년 출범할 때만 해도 JIFF가 지금과 같은 순항을 하리라 기대하긴 어려웠기에, 이런 호의적 평가가 더욱 유의미하게 다가선다(면 내가 지나치게 호의적인 걸까). 내 진심이기에, 그래도 하는 수 없다. 게다가 상기 “숱한 우여곡절들”을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대표적 우여곡절은 “자유·독립·소통”을 기치로 내건 영화제이기에 독립 영화, 예술 영화, 실험 영화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영화제가 지나치게 난해하다”느니 “전주 시민들을 위한 여지가 없다”는 등의 크고 작은 비판·불만들을 전주 내, 외부로부터 줄곧 받아 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을 테고. 영화제가 뚝심 있게 견지해온 그 디지털 및 대안 지향적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난해함에 대해서는 역시 이 지면에서 피력한 바 있는 내 요지를 다시금 반복하는 걸로 대신하련다. “…조금만 다른 눈으로 바라보면,…‘난해함’은 여타 영화제들과 전주영화제를 구분지어 주는, 전주 만의 어떤 차별성으로 변이, 승화되는 것도 사실이다…따라서 난해함은 ‘다름’ 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이해 수용되어야 마땅하다. 새삼 역설컨대, 영화제의 주된 존재 이유 및 기능은 ‘학습’과 ‘교류’의 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돈벌이의 대상만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 소통으로서의 영화를 관객들에게 학습시키고 국내외 지역에서 모인 영화제과 그들이 창작·생산해낸 산물을 교류시키는 ‘공론장’(Public Sphere)!"
이 순간, 영화제 측이 고집스러움 등의 의심·비판 등도 마다않고 그 정체성을 고수해온 결단에 대해 큰 상찬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에 대한 논란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진행 중이나, 정체성 부재의 영화제는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JIFF가 보다 전격적으로 직면, 풀어야 할 과제는 다름 아닌 이것이다. 그 정체성을 잃지 않고 국제 영화제로서 국제성을 보다 전격적으로 확대시켜 나가면서도 어떻게 하면 시민들의 보다 폭넓은 참여를 끌어낼 것인가 하는 것! 그 문제는 물론 이 땅의, 나아가 세상의 모든 국제 영화제들이, 그 생명을 존속시키는 한 끝까지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난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JIFF는 사방팔방의 다양한 비판·의견들을 보다 폭넓게 경청·수렴해 영화제 운영에 반영해야 한다. 당장 JIFF가 “영화제 기간에만 총력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문제다. 영화제에 참가한 감독이나 영화 등이 영화제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회자되고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거나, “영화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시민들과 소통하자는 것이 아니다…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등의 따끔한 지적을 귀담아 듣고 전격적 변신을 꾀해야 한다. 그 변신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더라도.
시민성과 국제성의 조화… 아니올시다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세계 최고·최대 국제영화제라는 칸영화제는 과연 국제성과 시민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을까? 11차례의 경험으로 판단컨대, 천만의 말씀이다. 5월 중순부터 말까지 칸영화제가 열리는 2주 동안 2, 3만밖에 되지 않는다는 칸 시민들은 시쳇말로 ‘봉’이다. 그들은 영화를 보고 싶어도 그들에게 티켓 구하기란 흔히 하는 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칸은 자기네 시민들 따윈(?) 아랑곳없이 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수천, 수만의 해외 게스트 및 타 지역 시민들을 위한, 철두철미한 국제영화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메인 상영관인 그랑 팔레 앞을 관통하는 크롸제트 거리를 허구하게 통제해도 그들은 별 다른 불평 없이 우회한다. 혹시 아주 운 좋게 티켓 한 장 구할 수 있을까 싶어 티켓을 ‘구걸’하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 악명 높은 레드 카펫이 펼쳐질 때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를 차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스타들을 볼 수 있을까 싶어 몇 시간 전부터 장사진을 친다. 세계3대영화제 중 하나라는 베를린에서도 목격할 수 없는 칸만의 진풍경들이다.
그렇지만 한 번도 자기들을 푸대접한다는 식의 푸념을 그 어떤 채널을 통해서건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칸영화제는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의 ‘국제’영화제인 것이다. 아니, 이렇게 말해야 한다. 시민들의 그런 암묵적 인내와 지지, 성원이 있기에 오늘날 칸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자꾸 시민성을 내세우며 영화제를 비판, 아니 비난하(려)는 이들에게 물어보자. 세상의 그 어느 국제영화제가 소위 시민성과 국제성을 이상적으로 완벽히 조화시키고 있냐고? 많이는 아닐지언정 그 간의 경험으로 말하건대, 내가 아는 한 그런 영화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까진. 베니스야 아직 경험하지 못했으니 모르겠으나 별반 다르지 않을 듯. 칸, 베를린은 말할 것 없고 체코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불가리아 소피아 영화제, 아르메니아 예레반 영화제, 인도 캘커타 영화제 등 그 어느 영화제건 국제성이나 시민성 어느 한쪽에 무게중심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국제영화제를 표방한 마당에 해외 내지 비지역 손님들에 대한 예우에 좀 더 커다란 신경을 기울이는 거야 우리네 인간들의 보편적 손님접대법이요, 인지상정 아닌가.
전주만의 향기가 필요한 때
내가 강조하고픈 것은 우리나라 영화제들의 소홀하고 무심하기 짝이 없는 손님접대법과 그 손님들에 대한 사후관리다. 그 사례를 열거하는 것은 또 다른 지면을 필요로 하니만큼 인상적인 몇몇 예만 들련다. 며칠 전 난 칸영화제 아이디 담당으로부터 몇 년째 이어지는 국제 전화를 받았다. 올해도 칸에 올 거냐는 용건이었다. 나는 "물론, 간다“라고 답했다. 그들의 여전한 성의에 내심 감탄하면서. 그뿐만이 아니다. 2년 전부터 난 칸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모든 단편들을 모아놓은 DVD를 받고 있다. 그 때의 기쁨이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뿐이 아니다. 그들은 이 나라의 대다수 영화제들이 목숨 걸고 사수하려는 듯한 ‘정시 입장’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영화를 보게 하려는 배려를 훨씬 더 중시한다. 평생 잊지 못할 인상적 사례를 하나 들련다. 이미 ‘만석’이 되었다는 어느 인기작의 공식 프레스 스크리닝 때였다. 최상위 등급의 아이디카드-위에서부터 크게 흰색, 붉은 색, 푸른 색 순이다-를 지닌, 나이 지긋한 누군가가 전화로 프레스 책임자를 찾았다. 혹시 싶어 난 그 사람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레드 뱃지일지언정 혹 운 좋으면 그 사람을 따라 들어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프레스 책임자가 나왔다. 그녀는 이미 여유석을 체크한 뒤였다. 그러더니 그 수만큼 정확히 세어 들여보내는 것 아닌가. 그 안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영화가 뭔지는 난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때의 그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고백컨대, 내가 프랑스라는 나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없는 돈 있는 돈 다 들여가며, 중독적으로 칸을 찾는 작은 이유 중 하나는 단지 월드 프리미어 수두룩한 그 영화제의 프로그래밍 때문만은 아니다. 비용에 대한 부담감도 그렇거니와 일정의 고됨 등 탓에 다음 해엔 쉬어야지 싶으면서도, 어김없이 칸을 찾는 데는 그들 특유의 손님접대법이 선사하는 성의와 감동도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칸만이 아니다. 내가 경험한 해외의 모든 영화제들은, 예외 없이 유사한 감동을 안겨줬다. 2007 베를린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프레스 스크리닝 때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바로 또 다른 상영관을 섭외해 시사회을 개최했다. 카를로비 바리에서는 프레스용 티켓이 매진되어 혹시나 여유석이 있으면 들어갈 수 있을까, 싶어-그 영화제는 영화 시작 5분 전부터 비어 있는 좌석 수만큼 기다리는 순서대로 입장을 시켰다-30분 전에 미리 갔더니, 괜찮을 테니 들어가란다. 객석이 텅 비워 있건 말건 원리원칙이라며 티켓 없는 아이디카드 소지자들의 입장을 거부하는 이 땅의 대다수 영화제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수준 이하의 그렇고 그런 영화제들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 아니라는 것쯤은 굳이 강변할 필요 없을 터. 별 격식 없이 JIFF 10주년을 돌아보며 써본 이 원고를 마감하면서 JIFF에 한 가지만 바라련다. 역발상적 사고로 나를 놀래키며 영화 평론 마스터클래스를 열 수 있는 영화제라면, 비록 비상근 전문위원 자격이나 올해부터 월드 영화 프로그래머로 동참하게 된 부산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다른 영화제들이 하지 못하거나 않는 파격적 축제의 장을 연출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보다 자유롭고 보다 신명나는, 말 그대로 한바탕 축제로서 영화제를. 상기 해외 영화제들의 사례들을 참고삼아, 전주만의 향기 가득한 축제의 마당을….
전찬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독어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국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현재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영화 프로그래머, 한국영화저널리즘포럼 공동의장,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사무총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