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3 |
우리 이제, 함께 문화를 ‘짓자’
관리자(2009-03-03 14:24:06)
우리 이제, 함께 문화를 ‘짓자’
최근 경제 위기가 심화되면서 사회 전 분야에 불안감이 커져가고 있다. 문화예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타 분야에 비해 그 실감의 정도가 크다고 한다. 정부·기관·기업체에서는 문화관련 예산을 축소하거나 동결하고, 소비자들도 문화예술 쪽 지출을 먼저 줄이고 있기 때문이란다. 하기야 먹고 살기 힘든 판에 눈·귀를 즐기는 일을 먼저 챙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경제가 윤택할 때 문화예술이 발전한 경우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경제상황과 문화활동과의 상관성을 무시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다른 예도 있다. 일부 아랍권·동유럽의 경우처럼, 우리보다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문화예술은 발전된 나라도 있다. 우리 주변에서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않아도 문화지수가 높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부자이지만 문화적으로는 가난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 또 우리나라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보다는 못살았던 때에 오늘날 우리가 본받을만한 문화를 일구었던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조선 시대 사회 엘리트들은 스스로 품격 높은 선비문화를 구가하였으며, 농민들은 두레라는 생활 공동체 안에서 자생적인 문화를 만들어 생활화하였다. 그것이 예술로 승화된 대표적인 예가 시조와 문인화와 풍물과 마을굿이라 할 것이다. 결국 경제와 문화는 정비례로 비견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오늘날 문화적 위기의 원인을 꼭 경제 탓으로 돌릴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최근의 문화적 위기의 궁극적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요 근래 가장 흔한 방식이라 할 수 있는, 관이나 기업이 예산을 지원하고 문화전문단체가 사업을 만들고 일반 시민은 구경만 하는 식의 행사문화를 생각해보자. 이런 식의 문화 유통은 일정정도 문화적 소통에 기여하기는 하였지만, 이로써 선진문화를 이룰지는 의문이다. 관과 기업은 물주(物主)요, 전문단체는 사업가요, 시민들은 구경꾼이기만 한 이런 식으로는 문화의 선진을 기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관과 기업은 구경꾼의 숫자로 그 행사를 판가름하고, 그러다보니 구경꾼을 더 모으기 위해 그 행사는 대중의 오감을 자극하는 쪽으로 더욱더 기울어져 가게 된다. 그 결과로 문화는 더욱 통속화되고 시민들은 문화 객체로만 전락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는 문화의 통속성을 부추기고, 또 일반 시민들이 문화유통 과정에서 일방으로 소외되는 불균형을 초래할 것이다. 이제 문화유통과정에 어떤 구조적 문제가 있는지 검토할 때이다. 또 문화를 바라보는 시대적 인식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지도 점검할 때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금 선비문화와 두레문화를 상기해보자. 이 찬란한 두 문화의 공통점은 그 주체자인 선비와 농민들이 공히 그 문화를 스스로 일상화·생활화하였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숫자놀음도 사업실적도 관계치 않는다. 구경꾼이 따로 없고 모두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문화행위의 주체자가 된다. 또 두 문화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글을 짓고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그 문화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짓기 문화’의 표본이라는 점이다. ‘짓기’의 개념은 ‘제작’에 가깝지만, 거기에는 ‘설정된 목표에 따라 원재료를 배열하고 일정한 시간 동안 정성이라는 가치를 투입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과정과 결과물로서의 제작’이라는 속뜻이 내포되어 있다. 또 짓기의 주체가 스스로 참여한다는 점에서 ‘자생성’을, 또 시간적 경과를 통하여 유용한 정신적·물적 가치를 생산·창조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산업적 속성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당시에는 대부분 스스로 농사를 지어 그 산물로 밥을 짓고 옷을 지었으며, 자신의 살 집을 스스로 짓는 경우도 흔했다. 평범한 아낙들은 밥 짓기와 옷 짓기에 한 생을 보냈으며 보통의 남정네는 농사짓기로 생업을 삼았고, 선비 계층은 농사 대신에 글짓기에 소홀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두레문화와 선비문화는 선인들의 일상과 의식주 행위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짓기 문화’의 탁월한 성과물인 셈이다. 문인화에서는 ‘난을 치는’ 일이, 두레에서는 ‘굿을 치는’ 일이 다반사인데, 난을 ‘치’거나 굿을 ‘치’는 것도 이 ‘짓기’ 과정의 일부로 간주할 수 있다. 농업의 일부인 목축을 ‘소 치기’, ‘돼지 치기’로 표현하는 데에서 ‘짓기’와 ‘치기’의 상관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일상은 어떤가? 옷 짓기와 집짓기가 이미 전문업체에 맡겨진 지 오래고 밥짓기도 갈수록 줄어가고 있어서, 머지않아 의식주 모두가 ‘스스로 짓기’로부터 결별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즉 현대인들은 갈수록 ‘짓기의 주체’에서 멀어져가고 있으며, 그 대신에 전문 사업체로부터 기성화된 상품을 돈으로 사들이는 ‘짓기의 객체’로 전락해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 짓기’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이 시대적 추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미 우리의 사회구조가 스스로 짓는 것을 충분히 허용하지 않는 데까지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짓기’의 가치가 변질되고, 이에 따라 문화적 대세도 바뀌었다는 데 있다. 근래에 이르러 ‘짓기’의 자리에 ‘돈벌이’와 ‘즐기기’가 변별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오늘의 문화도 ‘돈벌이’ 아니면 ‘즐기기’로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오늘의 문화는 사업성과 오락성이라는 두 개의 잣대로만 평가되기 일쑤다. 최근 들어 문화의 대세가 ‘즐기기’로 기운다든지 과거의 ‘짓기’행위들이 ‘문화산업’이라는 이름으로‘돈벌이’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증좌라 할 것이다.
이런 ‘변화’와 ‘변질’의 원인이 딱히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과거 ‘짓기 문화’의 기본속성과 최근 ‘사업 문화’(또는‘즐기기 문화’)의 그것을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가늠할 수는 있을 터. 양자의 비교에서 우선 눈에 띠는 것은 ‘정성’과‘자생성(자발성)’과 ‘공동체성’의 유무이다. 최근 문화에는 이 점이 약하거나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정녕 그런 것 같다. 오늘 우리는 문화를 정성들여 자발적으로 일구어 구가하는가? 또 거기에는 공동체적 가치가 내포되어 있는가?
오늘의 문화유통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과정에 참여하는 후원자·기획자·사업수행자·관람객들에게 자발성을 강화하는 방안은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후원자나 기획자가 사업성에 덜 매달리고, 또 관객이 기획과 수행의 역할에 참여할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또 모든 문화 종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정성을 들여 전 유통과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제도적 개선도 고려함직하다. 이 점에서 각 지방정부에서 운영하거나 준비 중인 민간주도의 ‘문화재단’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간 문화유통과정에서 서로 멀리 이격된 요인들을 합체시키고 각각의 역할에 ‘정성’과 ‘자발성’을 강화시키는 제도적 개선이 그 안에서 강구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즐기기’로만 치닫는 문화에 공동체적 가치를 접맥시키는 방법도 강구되었으면 한다. 가정·향토·민족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를 문화 속에 담아낼 필요가 있다. 각 가정·향토마다 전래되어 온 문화다양성(文化多樣性)이 보존되고, 나아가 민족 정체성을 담보하는 문화 속에는 공동체적 가치가 풍부할 것이 뻔하다. 최근 우리는 ‘즐기기 문화’에 익숙해가면서 이런 다양성과 공동체성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민족문화’ 또는 ‘민족예술’은 이런 문화다양성이 존중되고 민족정체성이 담보되는 문화와 예술이라는 점을 다시금 환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반도에서 민족이라는 공동체적 가치를 위해 민족의 정서적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예술이라면, 전 지구적으로 범람하는 세계화라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매우 의미 있고 유효한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요컨대, 이제 과거의 ‘짓기 문화’로 되돌아갈 수는 없으되, 오늘의 문화를 그 ‘짓기 문화’의 기본 속성으로써 개선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또 그래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오늘의 문화를 과거의 선인들이 그러했듯 정성들여 짓는다면 우리는 반만년의 문화민족답게 선진문화를 다시금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화를 지어야 한다. 그래야 행복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임명진 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