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3 |
[저널초점 │ 일제시대 건축물 문화재등록반대법안 논란] ‘철거찬반론’을 넘어서야 할 이유
관리자(2009-03-03 14:22:41)
‘철거찬반론’을 넘어서야 할 이유
문화계의 오래된 고민에 다시 불이 붙었다. 광복이후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왔던 ‘일제문화유산 청산’에 관한 논란이 그것이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장세환 의원(민주당, 전주완산을)은 지난 1월 22일 일제수탈시설물이 문화재로 지정 또는 등록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문화재보호법을 국회에 발의, 제출했다. 장 의원은 "최근 근대문화재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일제 식민지배의 수단으로 이용됐던 문물이 문화재로 분류돼 보호받고 있다"며 "일제시대 문물을 문화재에서 제외해야 민족의 긍지와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장 의원의 주장은 이미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장의원은 지난해 10월 21일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문화재는 후손들에게 역사를 알리고 그 지역의 사회 시대적 배경과 생활상을 알리는 중요한 표상이므로 문화재 지정사유는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며 “일본 지주의 저택 농장이나 일본어 명칭을 사용한 문화재는 등록 취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번 법률 발의 및 제출은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장 의원의 주장에 일제시대의 문화유적을 활용해 관광산업을 육성하려 했던 군산시와 문화재 보존을 주장하는 문화계 일각에서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일제시대의 잔재라고 해서 무작정 배제하거나 없앨 것이 아니라 잘 보존하면서 역사의 귀감으로 삼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13년전 논쟁의 복사판
이번 논란은 13년전 일어난 ‘총독부건물 철거논란’과 닮았다. 일제시대문화재에 대한 문화계 미완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같은 논쟁이다. 1993년 문민정부 초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정기를 회복하겠다”며 구 총독부청사의 철거를 결정했다. 이에 정부는 광복 50돌인 1995년 3·1절인 3월 1일에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선포행사를, 8월 15일 광복절에는 총독부 건물 중앙돔의 상단부를 철거하는 행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철거대상으로 거론된 구 총독부 건물은 ‘일제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선의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경복궁 내에 지은 건물’ 로, ‘일제가 대동아공영권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10여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26년 완공’했으며 ‘부지 3만여평에 기초건평 2천2백여평의 지상 5층, 연건평 1만1백26평의 르네상스식 석조건물’이다. 『서울신문』은 ‘정부는 한때 역사현장의 보존차원에서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이전·복원문제도 검토했으나 지은지 70년이 지나 노후한 구조물인데다 재활용 자재도 건물표면에 부착된 화강석 등 석재의 15%정도에 불과하고 석재가 풍화돼 금전적인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감정됨에 따라 지난 93년 철거를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김 대통령은 그해 7월 31일 아침 청와대에서 가진 조찬모임에서 당시 문화체육부 장관이던 주돈식에게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시작되는 구총독부건물 철거는 치욕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물을 제거함으로써 민족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인 만큼 차질없이 추진해달라.”며 “이 작업은 여러차례 여론조사를 거쳐 다수 국민의 동의를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구 총독부건물 철거를 통해 일재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겠다는 것이다.
정부의 총독부청사 철거 결정에 여론은 ‘찬성’과 ‘반대’로 갈렸다. 여론은 ‘찬성론’이 압도적이었다.
압도적 찬성... 일제잔재 청산을 통한 ‘역사 바로세우기’
신문들은 광복50돌을 맞는 그해 3월1일부터 이어진 몇 차례의 사설과 칼럼을 통해 철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신문들은 ‘일본 우익들이 태평양전쟁을 구미의 식민지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 전쟁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며 전쟁사죄를 그릇된 역사관과 국가관에서 나온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는 가운데 광복 50주년의 뜻깊은 3·1절을 맞는다 … 전국 각지에서 7만여명이 참가하는 사상 최대규모 기념행사를 열어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 자존심의 회복을 다짐하고 있다’(『동아일보』) , ‘구총독부청사의 철거는 해방 반세기 많에 문민정부의 결단으로 이룩된 쾌거’(『서울신문』) , ‘3·1절을 맞아 국민들은 ‘속 시원한 사건’을 보았다’(『한국일보』) 며 극찬했다.
각계 인사들도 구총독부건물 철거를 환영했다. 최창규 독립기념관장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감개가 무량하다”며 “그 건물의 철거는 50년을 일관해온 민족의 호소이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역사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고, 신용하 서울대 사회학 교수는 특별기고를 통해 “식민지통치의 상징인 총독부청사를 철거하고, 민족문화의 상징과 교육장인 국립중앙박물관을 3,600억원의 총예산으로 (현재의 총독부청사 전시면적보다 약 6배나 더 큰 전시면적과 교육실을 갖춘) 세계 일급의 국립중앙박물관을 신축하며, 경복궁을 완전 복원하여 세계적 문화재를 정비하는 것은 일석이조를 성취하는 민족적 대사업인 것”이라며 “이것은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미래의 발전의 정신적 문화적 원동력을 만들며 바로 문화건국의 사업이 되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세곤은 “올들어 광복50주년에 즈음해 정부를 비롯 민간단체 언론등 각계에서 일제잔재청산 관련 행사·활동이나 해방50년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일제침략의 상징인 구조선총독부건물 철거 선포식이 그 대표적인 행사가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여론조사에서도 ‘철거찬성’이 압도적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96년 여름 어린이 박물관교실’에서 수강한 초등학교 4~6학년생 1백7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9.8%가 조선총독부의 역할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고, 철거와 관련해서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해야 한다’고 밝힌 학생은 83.7%에 달했다.
실제 철거가 이루어지던 8월 15일, 각계 전문가 및 시민들은 “민족의 맥을 이제야 이었다”며 크게 환호했다. 이날 행사를 지켜보던 성신여대 이현희교수(사학과)는 “총독부건물은 정궁인 경복궁을 헐어내고 우리 민족사의 맥을 잘라내 우리나라를 영구히 절멸시키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던 것”이라며 “따라서 이 건물은 광복과 동시에 철거되었어야 마땅한 것으로 만시지탄이지만 크게 환영한다”고 말했고, 시민 권용택씨(76·서울 동대문구 회기동)는 “구총독부 건물앞을 지날때마다 위압감과 공포심을 가졌다”며 “식민통치의 본산인 건물이 해체되는 것을 보니 가슴속까지 후련하다”고 말했다.
조심스러운 ‘반대론’
여론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기울다보니 반대측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반대론은 여러 주장으로 나뉘었는데, 크게 세 가지 논리로 압축됐다.
첫째는, ‘보존론’이다. ‘보존론’은 ‘일제시대도 역사의 상처이긴 하지만 한국역사의 한 페이지니만큼 상처는 상처대로 남겨둔 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극복’이므로 ‘역사현장의 보존차원에서’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철거 반대논리로 가장 강하게 제시된 주장이다. 당시 민자당 국회의원이었던 강인섭과 조일현은 대정부질문에서 “부끄러운 과거도 우리의 역사이니까 묻어버리지 말고 그대로 보존했다가 후세에 경각심을 심어주는 장이 되도록 하거나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했고, 소설가 고정욱은 『세종로 1번지』라는 책을 통해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반성과 극복은 우리 의식에서 형성돼야지, 껍데기에 불과한 건물을 파괴한다고 완성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중앙박물관 건물 보존을 위한 시민모임’ 등의 일부 시민단체는 철거자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 당시 영남대 교수이던 유홍준은 ‘3·1운동이나 일제시대라는 말이 갑오농민전쟁, 구한말이라는 단어만큼이나 활자로나 만나는 역사적 거리가 생기고 보니 총독부 건물인 줄 명백히 알면서도 이 건물의 잔혹성을 기억하지 못하는 신세대들이 이 사회의 중견이 되어간다. 그리하여 총독부 건물은 역사의 상처가 아니라 일본의 메이지건축학회가 주장하는 바대로 20세기초 동아시아에 세워진 가장 장중하고 공력이 깃든 건물이라는 표현에 내심 동조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둘째는, ‘시기상조론’이다. ‘시기상조론’은 전두환 정부때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된 구총독부청사에 보관된 유물이 이전될 새박물관 완공이 이루어질때까지 철거시기를 늦추자는 주장이다. 실제로 구총독부건물에서 보관되어 있던 유물들은 당시 완공을 앞두고 있던 왕궁역사박물관으로 1996년 9월까지 이전된 뒤, 이듬해인 1997년부터 용산가족공원 10만평 대지위에 3만3천평 규모로 세워지는 새박물관에 이전되도록 될 계획이었다. 때문에 자주 유물들을 이동시키는 과정에서의 손상우려와, 새박물관이 지어진 뒤 유물을 이동시키고 철거해도 늦지 않다는 ‘시기상조론’이 고개를 든 것이다.
셋째는, ‘국민 노이로제론’이다. 철거 논의가 활발하던 1990년대 중반은 앞선 성수대교 붕괴사건(1994년 10월 21일)과 삼풍백화점 붕괴사건(1995년 6월 29일)으로 인해 각각 49명과 1천4백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국민들이 ‘붕괴’나 ‘철거’ 등에 대한 노이로제 증상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나름 설득력을 얻어 철거를 보름앞둔 8월 15일 여당인 민자당이 대통령에게 ‘철거 보류’를 요청하기도 했다.
‘총독부건물철거’는 정치적 쇼인가
정부가 추진하는 구조선총독부건물 철거가 정치적 인기를 노린 ‘쇼’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주장은 야당의원들이 1995년 9월 열린 국정감사에서 제기했다. 야당의원들은 “관계전문가와 국민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족정기회복이라는 명분으로 첨탑철거가 깜짝쇼처럼 진행됐다”며 새박물관 건립후 해체를 주장했고, 여당의원들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정부가 정치적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구총독부건물철거를 건국50돌인 1995년에 맞추어 진행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시기상조론’과 맞물려 제기됐다. 새박물관이 지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굳이 서둘러 철거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문민정부는 철거를 광복50돌인 1995년에 맞춰서 진행했다. 철거선포행사를 가진 3월1일에는 오전11시부터 청사 앞 광장에서 2백50여명이 동원되는 축제형식의 행사를 벌였으며, 철거일인 8월15일에는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였다.
정부가 서둘렀던 데에는 김영삼 정부가 내세웠던 ‘역사바로세우기’ 실현에 대한 욕심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민주화세력 출신의 첫 대통령인 김영삼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과거 군사정권 세력과의 단절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취임 초기부터 금융실명제 전면실시와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대통령의 비리혐의 구속 등의 개혁적 행보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 당시부터 개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된 구조선총독부청사의 철거는 광복50주년이라는 국가적 이벤트와 맞물린 좋은 기회였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자당은 철거에 앞서 지방선거 패배와 연속된 붕괴사건 등으로 좋지 않은 국민적 분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철거 연기를 정부에 요구했고, 야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도 1995년 8월 1일 박지원 대변인을 통해 “국민의 의견을 차분히 수렴한뒤 철거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반대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강행했다.
김영삼 정부의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철거’는 세계일보사가 여론 전문조사기관인 월드리서치와 공동으로 1995년 8월 19일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등 전국 6대도시 거주 만 20세 이상의 성인 남녀 8백명을 상대로 실시한 ‘문민정부출범에 대한 종합평가’에서 전체 응답자의 49.9%가 ‘잘되지 않고 있다’고 응답했음에도 ‘문민정부가 수행한 정책 중 잘한 정책’으로 9.5%의 지지를 받았다. 김 대통령은 이듬해인 1996년 새해 국정연설에서도 “우리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 잔재인 옛 조선총독부건물을 철거하기 시작한 것도 역사를 바로 잡아 민족정기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며 “‘역사 바로 세우기’의 참뜻을 이해하고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결과는 일재잔재 청산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그만큼 높았음을 보여주는 결과이지만, 구조선총독부건물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들이 안정적으로 운반되기 전부터 광복50돌에 맞추어 행사를 진행해야 했는지는 여전히 비판의 대상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철거찬반론’을 넘어서
구조선총독부건물 철거에 대한 논란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본질은 찬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철거찬반론자들 모두 일제시대를 민족의 어두웠던 역사로 기억하긴 마찬가지고, 일제시대의 잔재를 많이 없애야 한다는 데에도 공감한다. “‘선 철거’ 후 박물관 이삿짐을 옮기자는 쪽과 박물관을 먼저 짓고 옮기자는 쪽의 성명전은 처음부터 대립되는 주장이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다.
유홍준 당시 영남대 교수는 이 논쟁에 대해 “돌이켜 보건대 이 건물만큼 “철거냐 보존이냐”라는 상반된 주장을 놓고 서로가 완벽한 논리를 제시한 예는 없을 성싶다.”며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식민지 문화의 극복, 식민잔재의 청산을 위하여 반드시 철거해야 한다는 논리와 아니다, 역사의 상처는 상처대로 남겨둔 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극복이라는 보존론이 모두 한치의 논리적 하자도 양보도 없이 첨예하게 맞서 왔다. 더욱이 전두환 정권이 이 건물을 개수하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식민지시대 총독부건물에 민족의 문화유산이 보존·진열되고 있는 것은 치욕이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극복의 상징이라는 논리로 맞대항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 길고 지루했던 소모적 논쟁은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아무리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철거된 마당에 새삼 복원을 주장할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니까. 그렇다고 하여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가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이 사라져가는 한 건물에 대하여 우리가 환희도 애도도 표할 수 없는 착잡한 심정에 서려 있는 숙연한 고뇌가 우리네 삶과 역사에서 영원히 살아 숨쉴 수 있도록 교훈을 새길 기념물을 우리는 거기에서 찾아 마땅한 일이다. 그동안 보존론자들이 주장한 바, 저 역사의 상처를 봄으로써 더욱 선명히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에 합당할 그 어떤 기념물이 필요한 것이다.”
양측 모두 역사의 아픔을 극복해야 한다는데 공감한다. 유홍준은 다음과 같은 대안도 제시했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거의 유일한 방법은 폐허로 남기는 길이다. 건물을 철거한다음 그 초석을 드러낸 채 잔디를 입히고 간간히 망초와 쑥대와 민들레가 피어나게 하여 여기가 일제의 총독부 자리였음을 영원히 기억케 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찬반론자들이 ‘구조선총독부건물’이라는 역사적 아픔의 상징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다. 찬성론자들은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길 원하고, 반대론자들은 좀 더 두고 새기면서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관점을 ‘망각의 해법’과 ‘기억의 해법’이라고 한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 교수와 안병욱 카톨릭대 국사학 교수는 1996년 1월 25일자 『한겨레』 특별좌담에서 두가지 해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억의 해법은 철저한 청산을 위해 오히려 과거를 빠뜨림없이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역사에 맡기는 태도는 망각의 해법이라 할 수 있죠. 과거에 매달리는 게 낙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선진국이 철저한 ‘기억의 해법’으로 오늘 그 위치에 올랐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손호철)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뒤, 옛 청와대 관저와 총독부 건물을 철거했습니다.이는 망각의 해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죠.”(안병욱)
‘해법’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에서 시작된다. 논란의 핵심 쟁점은 ‘망각의 해법’으로 기억할 것인지, ‘기억의 해법’으로 기억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방법론에 앞서는 인식론이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은 ‘일제 잔재는 건물 하나의 제거로 청산되지 않고, 우리것의 복원사업은 옛 궁궐 전각 몇 채를 재건하는 것으로 완수되지 않는다. 외형적 상징물은 철거함으로써 재건되지만 우리의 내부에 뿌리내리고 있는 총독부, 더 정확히 말해 무의식의 층위에 자리잡은 정신의 총독부가 문제’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총독부 건물의 철거가 선포되고 일본 대중문화상품에 대한 시장개방이 공식적으로는 무기 연기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는 바로 그 일본 대중문화의 음성적 유통과 향유에 골몰하고 있다.…입으로는 과거의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면서도 우리는 지금 나라 안팎에서 제국주의적 발상의 포로가 되어 있다.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거부냐 수용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두 얼굴을 가진 우리 자신의 비굴성과 이중성이 문제다.”
『서울신문』은 ‘외언내언’에서 ‘땅·학교 이름 고치고 구총독부건물 철거하는 것도 일제잔재 청산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그러나 국민들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일제잔재는 어떻게 할 것인가.일상대화에서도 무심결에 나오는 일본어도 그중의 하나’라며 ‘35년간의 지배가 이처럼 마마자국같은 흉터를 남겨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일보』는 ‘총독부 건물이 철거된다고 해서 바로 일제의 잔재를 말끔히 떨어내는 것도 아니며,과거 오욕의 역사를 완전히 씻어내는 것도 아닐 것이다.’며 ‘유념해야 할 것은 역사의 유훈이 후세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광복60년이 지난 2009년 현재에도 이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일제시대에 남겨진 문화유산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가 아니라 일제시대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다. 논쟁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에 대한 의견적 합의점을 찾는 것이 논란 해결의 첫걸음이다.
성재민 선샤인뉴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