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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 |
[이흥재의 마을이야기 │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 어은마을] 어은마을에서는 왜 박사가 많이 나올까
관리자(2009-03-03 14:16:39)
어은마을에서는 왜 박사가  많이 나올까 어은마을은 임실 삼계면 어은리에 있다. 고기잡을 어(漁), 숨길 은(隱)자를 쓰는 어은리는 박사고을이라는 임실 삼계면에서도 유난히 인물이 많이 나온 마을이다. 왜 어은마을에서 박사를 비롯한 인물들이 많이 나올까? 주위에 나무가 울창해서 집들이 보일 듯 말듯하므로, 가옥을 고기로 보고 그 고기가 숲속에 숨어 있는 형상이라 해서 어은리라 한다. 또한 마을의 모습이 ‘낡시形’을 이룬 명당이어서, 공화당때 3선을 한 한상준 국회의원을 비롯해 많은 박사와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고 이 마을 출신 문학박사 이용숙은 마을회관 건립비에 쓰고 있다. 청주한씨 시조 한난(韓蘭)의 14세손 안양공(安襄公) 한종손은 조선 세조때 좌익공신 3등에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다. 500여년전 그의 부인인 광산김씨가 한희, 한석 두 아들을 데리고, 삼계면 어은리 당시 남원부 오지방(梧枝坊)으로 이사와 정착했는데 이곳은 부인의 친정인 광산 김씨들이 터를 잡고 살던 곳이다. 조선 초에는 여자에게도 균분상속이 이루어져서 여자의 친정, 즉 남자입장에서는 처가로 내려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진산군수를 지낸 청성군 한종손의 아들인 한희는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이었다. 김종직, 김굉필의 문인들이 집단으로 화를 당하는 연산군때 무오사화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이곳 임실 어은동에서 터를 잡고 살기 시작을 했던 것이다. 김씨부인이 지금의 말터재 상봉에서 연꽃잎을 냇물에 띄우면서 그 연꽃잎이 가라앉은 곳에 자리를 잡고 살자고 한 곳이 지금의 어은리라고 한다. 부인은 후손에게 산이 헐벗고 나무숲이 작아지거든 이곳을 떠나 둔남면에 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하였으나, 그 후 나무가 무성해졌고 청주한씨가 무리를 이루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때 마을에 108가구가 살았을 때 청주한씨가 78가구로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제는 총 60~70 여 가구만 남은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청주한씨 안양공파 후손들은 광산김씨 부인을 위해 귀후제(歸厚齋)를 지어 제향을 모시고 있다. 지금도 청양현부인김씨묘(靑陽縣夫人金氏墓) 아래에는 아들과 후손들의 묘가 있고, 옆에 귀후제 제각이 있다. 그 옆에 산지기가 살고 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산지기’라는 말이다. 산지기가 있는 제각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귀후제 산지기는 65세의 이영식 할아버지가 61세의 윤하옥 씨랑 함께 4년째 살고 있다. 이십여 마지기 논과 세마지기 밭을 지으며 서울에서 4년 전에 내려와 살고 있으며, 일년에 쌀 10가마를 문중에 내고 나머지로 생활하고 있었다. 4남매를 두었는데 32살의 막내 아들만 결혼을 안시켰다고 한다. 어은리 콩잎 궁중에 진상 삼계 어은리(언골)에서 자라는 콩잎이 조선 숙종임금의 명에 의해 궁중에 진상되었다고 한다. 숙종비 인경왕후 김씨는 광성 부원군 김만기의 딸이었고, 언골 청주한씨 한유랑이 인경왕후 외할아버지였다. 12세 때 세자빈으로 가례를 올리고 1674년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 후 6년 후인 20세 나이에 아이를 낳다 승하하고 말았다. 인경왕후가 어릴적 외가에서 자랐는데, 왕비가 되어 입덧을 하는데 온갖 진수성찬을 물리치고 오직 외갓집에서 먹던 콩잎만을 찾았다고 한다. 그 뒤부터 언골 종가 육우당 아래 평전(平田) 콩밭에서 나온 콩잎을 진상했다고 한다. 어은 마을은 숙종비 인경왕후 김씨의 외가 동네로 궁궐에서 심부름 온 사람들의 가마가 들어설 수 있게 1681년 당시에도 신작로가 나있었다고 한다. 인경왕후 아버지 광성부원군 김만기는 율곡의 조선 성리학 적통을 이은 사계 김장생의 증손이며, 송시열의 문인으로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분이다. 그 덕으로 언골 청주한씨는 육우당을 중심으로 아흔아홉칸 집을 짓고 살았다. 六友堂은 조선 인조때 수운판관을 지낸 한경생의 당호이다. 아흔 아홉칸의 집 주위에 담장이 빙 둘러 쳐 있어, 세칭 ‘담장안’ 집으로 불렀다. 지금도 언골 한씨들을 양반이라 하며, 밖에 사는 한씨들도 “다 언골 청주한씨”라 칭하며 다닐 정도로 근방에서는 다 알아주는 집안이란다. 이 마을에는 한창수씨 집 六友堂, 한강희씨 집 知止堂, 한상홍씨 翠松堂 등 사랑채에 당호(堂號)가 붙은 집이 있고 마을 중심에 花樹堂이 있다. ‘知止堂’은 ‘나아가지 말고 머무를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집’ ‘翠松堂’은 ‘푸른 소나무 집이라는 뜻’이다. 六友堂은 벗이 여섯인 집이라는 뜻인데, 여섯 벗은 밝은 달과 상큼한 바람, 고전과 당대의 글들,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 거문고와 술, 외로운 구름과 학, 가지런한 숲과 맑은 물이다. 이 여섯 벗 이외에 더 무엇이 필요할까? 마을 뒤 느티나무가 있는 계연정(桂蓮頂)과 마을 앞 산정(山頂)의 60여 그루 소나무 숲이 방파제처럼 둘러 있고 마을 뒤에는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있다. 한창수씨는 소나무숲 산정(山頂)이 동네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데 이 나무가 없으면, 굴레 벗은 소 마냥 아무 짜임이 없다고 얘길 한다. 풍수상 십승지지 못지 않은 길지여서 인물이 많이 나오기도 하겠지만, 사화나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어서 후손들에 대한 교육열이 유난히 더 강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계연정 아래 서당터가 있는데, 이 서당에서 大小科(대소과) 급제자가 40여명이 나왔다고 한다. 교육에 대한 인식과 열정, 그걸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만고풍상(萬古風霜)을 다 겪은 六友堂 주인 한창수씨는 올해 79세로 80세의 윤이호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교지 등 가보를 48점이나 소장하고 있지만 4명의 자식 중에 여기에 들어와 六友堂을 지키고 가풍을 이으며 살만한 자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죽은 뒤 마당에 잡초가 우거지지 않도록 보도블럭을 깔고 시멘트를 발랐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왠지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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