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3 |
[명인명장 │ 내가 살아온 세상] 호남살풀이 명인 한국무용가 최선
관리자(2009-03-03 14:15:52)
호남살풀이 명인 한국무용가 최선
“지금도 무대에 오르면 힘이 펄펄 나”
최선 연보
1935년 아버지 최한필과 어머니 김옥주의 8남매 중 다섯 째로 출생
1942년 김미화무용연구소에서 무용에 입문
1950년 전주국악원에서 추월 선생에게 사사
1953년 최선무용연구소 개소
1969년 전라북도문화상 수상
1979년 대학민국 제1회 무용제 우수상 수상
1982년 시민문화상 수상
1984년 개천예술제 특장부문 대통령상 수상
1996년 호남살풀이와 동초수건춤으로 도무형문화제 제15호 선정
현 재 최선춤전수관을 운영하며 원광대 무용과에 출강
그의 무용연구소 창문너머로는 늘 구슬픈 가락이 새어나옵니다. 그 가락을 따라 문을 들어서니 맵시 고운 젊은 무용가가 가락에 맞춰 슬픈 춤사위를 짓고 있습니다. 한국무용가 최선 선생은 하루하루 늘어가는 제자의 솜씨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올해 나이 일흔다섯. 최선 선생은 평생을 한국무용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어머니 손을 잡고 당시 전동성당 옆에 있던 김미화무용연구소에 찾아갔던, 바로 그때부터이니 60년이 훨씬 넘는 세월입니다.
물론 한평생 무용을 하며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그는 단 한순간도 무용을 그만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무용은 그의 삶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한국무용의 춤사위로 살아온 최선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어려서도 율동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져
나는 원래 전주 태생이여. 본적은 임실군 임실면 이도리 473번지. 아버님이랑 호적이 다 거그가 있으니까, 나를 전주에서 낳으시고, 임실에 본가가 거그가 있으니까 호적은 임실로 되있어요. 그니까 낳기만 전주에서 낳았지. 긍게 전북 전주 완산동 태생이라고 그렇게 어머니한테 얘기를 들었거든. 그러고 인자 호적은 아버님 계시는 데로 했으니까 임실로 되아있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전주고, 임실은 인자 왔다갔다 했지. 임실에도 잠깐 있었지. 어렸을 때니까 그런디 살던 곳은 전주지.
사변 전에 우리 아버지가 임실에서 여관업을 하셨어요. 임실여관이라고 오수여관도 했고. 인자 사변 전에 일제시대 때부터, 원래는 오수에도 좀 사셨다고 하시 하더라고. 선산이 오수에도 있고. 그러다 임실로 옮겨서 거그 터를 잡고 사신거야.
무용을 처음 시작한지는 1945년 해방되던 그 해 무용을 시작했어요. 내가 열 살 되던 해에 해방이 됐거든. 일제시대 때 인자 학교를 입학을 해가지고 2학년 여름에 해방이 됐지. 내가 학교를 좀 늦게 가서, 인자 2학년 다니던 도중에 해방이 된거여. 그때 금구초등학교를 다녔어. 김제 가는 쪽에 그 중간에 있는 금구. 거기 지서 자리가 내가 살던 집 자리야. 삼거리에 있는 파출소가 우리 집자리야.
그런데 어려서부터 무용 이런 거를 좋아했어. 그때 당시, 내가 금구초등학교 다닐 때 학예회를 했었어. 지금은 예술제라고 하지만, 그때는 학예회라고 했지. 학예회 때 내가 뽑힌거야. 그때 인제 무용도 하고 음악도 하고 발표를 하는데, 나하고 친구들하고 네 명이서 교생실습 나온 선생이 그때 무용을 가르쳐줬어. 그 무용이 ‘방아방아 물방아야 콩콩찧는 물방아야’ 그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춘거야. 말하자면, 사범학교에서 막 실습 나온 선생님이 춤을 가르친거야. 그때는 유희라고 했어, 지금은 춤이라고 하지만 유희나 율동이라고 했지. 그 중에서도 내가 인제 제일 잘해보였나보지. 그때부터 무용하는거 좋아하고 연극하는거 좋아하면서 무용을 쭈욱하게 됐지.
거기에서 5학년 2학기까지 다니다가 전주완산초등학교로 전학을 와서 졸업을 했어. 그래도 모교는 금구초등학교로 되어있어. 그래서 지금도 금구초등학교에서 행사를 한다던지하면 내가 가서 가끔 해줘. 거기 가면 내 전시관이 되아있어. 학교를 빛낸 선배의 얼굴이다 해가지고 복도 유리에다가 사진 같은 것을 전시를 해놨더라고. 작년엔가 재작년엔가 학교 강당을 새로 지어졌을 때도 내가 가서 무료로 공연을 해줬지. 어린이 날이면 전교생 빵하고 우유를 보내주고 해요.
선배들 따라댕김서 춤을 배와
전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6.25사변 직후에 임실중학교가 최초로 생겨서 거기 1기로 들어갔다가 전주 남중학교로 전학을 왔어. 거기서 졸업을 했지. 그때 당시에 전주에 무용하는 사람이 몇 명이 있었어. 조원경이라는 북중학교 출신 선배가 있었고. 얼마 전에 그분 타계하셨어. 조원경 선생의 형이 있었고. 그러고 남중학교에 정석철이라는 우리 직속 선배가 계셨고. 그러고 인자 내가 있고. 정읍에 은방초라고 은방초 씨라는 선배가 정읍농고에 다니고 있었어. 그때 인자 그 선배들이 전주에 모여서 무용연습을 했지.
그때 중학교 1학년 때니까 열다섯 여섯 정도 됐나. 사변 바로 직후니까, 그 정도 됐을 거여. 근데 맨날 내가 따라 댕김서 연습을 했지, 심부름 해주고. 그때 당시는, 유성기, 축음기 틀어놓고 연습을 했었어. 지금처럼 전축이 있어가지고 연습을 한게 아니고, 유성기에다가 레코드 판 놓고 하던가 장고 장단에 맞춰서 했지.
사변 직후니까. 그때는 다 했어. 지금은 한국무용이네 서양무용이네 그러지만 그때는 다 할줄 알아야 혀. 인도 춤도 추고, 헝거리 춤도 추고. 지금처럼 장구에 맞춰서 전통이다 창작이다 뭐 그런게 없었어. 그냥 장구치고 구음하면은 거기에 맞춰서 춤을 췄었어. 그때는 삼현육각이라고, 음악이 삼현육각만 있었어. 물론 궁중음악도 있었겠지만, 전주에도 전주국악원이 있었네. 거기가면 가야금 하는 사람도 있고 했지만, 지금처럼 합주단이 있거나 하지 못했어. 긍게 춤추기도 힘들지. 그러니까 축음기에다가 레코드판 얹어서 ‘양산도’, ‘천안삼거리’, ‘노들강변’, ‘도라지’ 이런 민요음악에 맞춰서 춤추고, 그라나면 기녀선생 구음에 맞춰서 춤추고 그랬어.
그때는 너무 어려웠어 춤추기가. 우선 당장 배가 고프니까 밥 먹기가 힘드니까. 너무 힘들어서 공연하면은 옷을 해 입고 그러덜 못했어요. 그래서 우리어머니 치마저고리도 몰래 훔쳐다 춤추고 그랬어. 지금처럼 좋은 옷을 해 입고 그럴 수가 없었어. 그러고 남문시장에 구호물자를 산더미처럼 갔다 놓거든, 거기에서 인자 옷을 가리는거야. 여자들 입었던 옷 중에 스팡클이라고 반짝반짝 한거 있으면 다 뜯어다 옷에도 붙이고. 그런 걸 많이 사용했지. 그렇게 해서 입고 했지.
지금도 스승들 춤사위가 잊혀지질 않아
사변이 일어나기 전에 전주에 김미화춤연구소가 있었어. 그게 지금 전주 전동성당 옆 골목에 있었어. 일본사람 집이였는데, 거기서 일제시대 때부터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했어. 그런데 사변 나면서 그 양반이 부산으로 피난을 갔어. 그 양반 남편이 해군 대위였었거든, 그래서 인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시고.
긍게 일제시대 때 내가 여덟살 때 우리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거기를 간거야. 처음에는 거기 가서 했다가, 금구로 이사가는 바람에 그때는 별로 춤을 못했지. 무용을 하긴 했어도, 뚜렷하게 배운건 아니지. 그래서 인자 전주와서 선배들 만나면서 춤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고.
그때 당시 전주국악원에 추월이라는 기녀 선생님이 계셨어. 성은 잘 몰라. 국악하시는 분이 ‘어이 추월이, 추월이’ 하니까 그 이름만 기억을 하는거야. 그 양반한테 또 춤을 배우는 거야. 그 때 당시는 음악이 없으니까, 그 양반이 구음을 하면 거기에 맞춰 춤을 춘거야. 그래서 지금 무형문화재 선정된 것이 동초수건춤, 호남살풀이 춤이거든. 동초수건춤이 그 때 당시에 있었던 춤이야. 내가 동초수건춤하고, 호남살풀이춤 두 개로 지정이 된거지.
동초수건춤이 뭐냐하면, 옛날에 기녀들이 권번에서, 권번이 뭐냐
사진 유백영 사진작가ㅣ 정리 최정학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