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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 |
[서평│ 창조적 자본주의] 세상에 ‘착한 자본’이 있다고?
관리자(2009-03-03 14:00:10)
세상에 ‘착한 자본’이 있다고? 한때 자본주의는 우리의 적이었다. 지금도 핏대 올리며 외쳤던 우리의 구호를 기억한다. “가라, 자본가 세상! 오라, 노동해방!”   역사발전의 과정에서 합법칙적으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던 자본주의는 100년 이상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강력해져서 신자유주의라는 전대미문의 괴물로 변해서 전 세계 민중들을 극한으로 몰아넣고 있다. 과연 자본주의의 마지막 얼굴은 신자유주의일까? 신자유주의는 끝내 무너지지 않을 최후의 성채일까? 이러한 의문을 품은 사람이라면 이 책, <창조적 자본주의>(최혁준/이안에) 주목해 주길 바란다. 창조적 자본주의라고? 이건 어디서 굴러먹다 온 자본주의냐? 놀라지 마시라. 이 개념은 마이크로 소프트상의 빌게이츠 회장이 주창하고 있는 ‘따끈따끈한’ 개념이다. 전 세계에 컴퓨터를 대중화시키고 자선사업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빌게이츠. 그가 말하는 창조적 자본주의의 원전은 이렇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본주의는 100년 전 자본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또한, 100년 후 세상에 풍요를 가져 올 자본주의는 지금의 자본주의와는 또 다를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자본주의는 보다 친사회적이고 친환경적이며, 친인간적인 자본주의가 될 것이다. 요약하자면 ‘인간의 얼굴’을 한 ‘착한 자본주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사회공헌 활동’이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고용과 이윤창출이 기업의 경영전략이었다면, 이제는 이윤창출과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이해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 1달러 미만의 생계비로 살아가는 전 세계 10억 빈민을 도울 수 있는 창조적 자본주의의 길을 함께 모색하자!” 스위스 다보스 경제포럼 기조연설에 빌게이츠가 역설했던 내용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부나 자선의 틀보다 더 구체적이고 강력한 의미를 지닌 개념이다. 근본적인 시장의 힘과 작동원리를 활용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불평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강력한 시스템을 만들자는, 어떻게 보면 혁명적인 개념이다.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게 자본의 속성인데, 구조적으로 이윤을 줄이고 평등을 실현하자니? 이런 자본주의가 가능하단 말인가? 저자 최혁준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창조적 자본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있다.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과 ‘레버쿠젠’ 지역의 아름다운 관계는 판타스틱한 자본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300년 동안 가문을 굳건하게 유지해온 경주 최부자집 이야기도 흥미롭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부자집 가문에 전해온다는 육훈(六訓)이다. 어렵게 이야기할 것 없이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단어로 이해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나쁜 자본도 있지만 착한 자본도 있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적인 믿음이다. 나쁜 자본은 그 자체로 인간을 소외시키고 불평등을 가속화시키지만, 착한 자본은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고로 인류와 미래사회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려면 이 착한 자본의 힘, 창조적 자본주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업들이여, 이윤추구에만 목매달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할지어다. 그리하면 너희 기업은 영원히 지속가능하리라, 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이라는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여러 개의 기둥과도 같다. 경제, 사회, 환경이라는 세 개의 주춧돌을 중심으로 주주, 고객, 종업원, 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구성하는 여러 기둥들이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 각각의 기둥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그 지붕은 튼튼하게 유지될 것이고, 여러 기둥들 중 하나라도 흔들리거나 느슨해진다면 그 지붕은 기울어지고 얼마 곳 가서 무너지고 말 것이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 한다면 결국 그 기업의 미래도 없다고 한층 강력하게 충고를 하고 있지만, 과연 이 말에 귀 기울일 자본가들이 몇이나 될까? 세계 각국에서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두바이를 보자. 두바이는 불과 15년 사이에 기적 같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을 하지 못한다.  두바이가 추진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논리는, 국내외의 거대한 자본을 끌어들여 금융, 관광, 물류 등의 허브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전 세계의 수요를 꾸준히 두바이로 모여들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두바이의 지속가능한 발전이 보장될까? 불행히도 두바이는 지금까지 그 어떠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노력도 없었고 전략도 보이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개발과 책임간의 조화로운 융합보다는 지나치게 개발 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결국 지속가능한 발전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MB정권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적 자본주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반대개념, 혹은 보완개념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결국 창조적 자본주의는 “돈으로 흥한 자 돈으로 망하고 착한 일을 하면 3대가 복을 받는다.”는 우리 전통적 인식과도 궤를 같이 한다. 따지고 보면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논리지만 다양한 기업들의 사례 덕분에 읽는 재미는 쏠쏠한 편이다. 그렇지만 책을 덮은 마지막 순간에 끝내 허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쁜 놈을 앞에 두고 “우리 착하게 살자!”고 설교를 하고 있어야 하는 답답함이랄까? 있는 놈들은 끝내 있는 놈들 편이라는 것은 우리는 MB정권을 통해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있는 “이놈들아, 우리처럼 없는 놈들한테 착한 일 좀 하란 말이다!” 하고 외쳐본들 그 외로운 외침을 누가 듣겠는가? 한마디 해보려다가 불에 타 죽은 사람이 몇 명인가? 척박하고 천박한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창조적 자본주의란 말은 온상 속의 화초처럼 화사하고 부러운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정상도  문화시대 대표, 경실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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