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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 |
[박물관대학 │ 사군자의 이해] 중세의 불꽃과 오늘의 시대정신
관리자(2009-03-03 13:59:00)
중세의 불꽃과 오늘의 시대정신 좋은날, 변절과 배신을 거듭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간송미술관에 들어섰다. 사군자를 배관하러 가는 길이므로 마음가짐 바로 하겠다는 다짐 하나 해 둘 참이었던 게다. 그런데도 자꾸 흐트러졌다. 비틀려 살아가는 변절 지식인들의 사치스러움이 떠오른 탓만은 아니었다. 올곧게 사시던 20세기 참 지식인들의 고난이 떠올라서였다. 내가 겪은 그 짧고 얕은 고난의 추억까지 겹쳐 눈 앞이 흐려졌던 탓이었다. 전시를 꾸민 간송미술관 부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 전영우 선생은 사군자에 대해 쓰기를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고매한 인품으로 주변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사람을 군자라 하므로 이에 비유한 이름이다." 그것을 어찌 감당할까 싶은데 어느덧 전시장 안에 즐비한 사군자 명품과 마주하고야 말았다. 두 눈으로는 폭포처럼 밀려드는 사군자의 빛을 받아들였으되 머리 속은 온통 20세기 지식인들의 천박한 삶이었으니 내내 휘청거려야 했다. 사군자의 종언   10여년 전, 예술의 전당에서 한국사군자전이 열렸을 때다. 그 때 출품된 작품들은 거의가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이른바 근대 시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느낀 것은 어딘지 충분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 땐 내 안목 탓이라고 여겼다. 물론, 명가들의 작품이 즐비했고 게다가 내 스스로 워낙 무지한 까닭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돌이켜 이번 사군자전과 빗대보니 그 때 느낌이 터무니 없지 않음을 어렴풋 헤아릴 수 있었다. 거기에 요 몇년간 사군자 공부에 빠져 무지한 때를 조금은 벗겨냈으므로 그나마 안목이 얼핏 생긴 것이겠다. 이 대목에서 조금 다른 이야길 해 보자. 어이가 없고 놀라운 일인데 사군자 그림에 관한 조사와 연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그렇다. 몇 연구자가 개설식으로 흐름을 정리한 글이야 있으되 개괄일뿐 사상과 미학, 방법과 양식 그 어떤 쪽에서도 열매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꾸로 학습용 실기교재는 숱하게 출간되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20세기 사회상황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을듯 하다. 20세기에 접어들어 특히,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사군자는 주부교실이나 문화센터의 교양과목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아 나갔다. 절개와 인격을 품어내는 절정의 수단 자리를 물려버린채 어느덧 보통사람의 고상한 취미로 바뀌고 말았던 게다.   그같은 현상은 귀족의 예술이 민간의 예술로 바뀌었으니 민주주의 시대를 거울처럼 비추는 일이다. 다시말해 사대부가 사라진 터전에 사대부 예술이 있을리 없다. 중세 문인이 사라졌는데 어찌 사대부 문인의 예술인 사군자가 의연 숨쉴 수 있겠는가. 일찌기 뛰어난 미술비평가 윤희순은 1941년, '사군자의 예술적 한계'라는 글에서 현대에 이르러 미의식이 바뀌었고 따라서 사군자가 살아 남으려면 새로운 미를 개척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앞으로 사군자는 사군자라는 관념에서 해탈하여야 할 것이다. 군자의 의취(意趣)를 담고 안담고 간에 대상을 순수한 조형미로서 보고 표현하는데에서 새 길을 찾을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사군자의 운명을 예감하고 활로를 헤아린 통찰이었다. 나아가 윤희순은 사군자의 정신성이야말로 표현파 이후 근대예술의 주관화와 일치하는 것이라면서 사군자의 현대화 가능성을 전망하기도 했다. 나아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동양 사상의 이해가 박약한 시대라고 탄식했던 김용준은 1938년에 쓰기를 '모든 이욕에서 떠나고 모든 사념의 세계에서 떠난 가장 깨끗한 정신적 소산'만이 진정한 미술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사군자의 세계를 거듭 옹호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망, 희망에도 불구하고 사군자는 20세기 미술사의 주류로 떠오르기는 커녕 이른바 '민간화'의 길을 철저히 걸어갔던 것이다. 그 길은 중세 문인 계층의 몰락, 사대부 계급의 소멸과 더불어 예정된 것이었다. 1930년대 식민지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 사이에 조선전통을 부흥하자는 이른바 조선학 운동의 물결을 타고 김용준을 비롯, 상고주의자(尙古主義者)인 이태준, 전통계승과 혁신론을 펼쳤던 윤희순 들이 그토록 사군자를 옹호했음에도 사군자는 스스로 종언(終焉)을 고하고 말았다. 중세의 추억과 감동   20세기 지식인들이 그 아름다운 전통을 지키지 못한 이유를 감당치 못할만큼 엄청난 격변을 겪은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 어설프다. 시대의 격변이 거친 때일 수록 사군자의 정신성이 굳세졌음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사군자의 종언은 중세 봉건 지배이념의 쇠퇴, 근대 민주주의 이념의 부상에 따른 결과로 보아야 한다. 지조와 절개를 초개처럼 저버린 지식인들만 넘실거려 사군자와 그 정신이 소멸한 게 아니라 20세기 지식인들이 키워나간 민주주의 이념이 그 정신을 뿌리채 흔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윤희순은 당대 사군자 대가들인 김진우, 김응원같은 이들의 작품에서 새로운 미의 개척을 기대하기 보다는 '전통의 미를 재음미 하는 기회를 얻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전시된 작품들을 보며 숨막히는 예술정신의 향기를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디지털 시대에, 감성과 이성의 변화가 뿌리채 뒤바뀌고 있는 이 시대에 그 감동을, 함께 간 벗들에게 이처럼 놀라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저 전통의 아름다움을 재음미하는 수준을 뛰어 넘었던 것이다. 때로는 무언가 살아있는 서릿발같은 아픔이 때론 요염하여 타오르는 욕망의 불길을 느꼈으니 그것은 현실이었다. 되풀이하지만 변절과 야합을 경계하는 시대정신이 살아났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처음 보는 작품들이 즐비하여 아득했으니 이 대목에선 이념이니 절개 따위가 눈녹듯 사라져 버림을 맛보아야 했다. 이정(李霆 1554-1626)의 대나무 그림 앞에 마주섰을 때 왜 동시대 사람들이 이정을 일러 '신(神)과 사(似)를 겸비'한 일세지보(一世之寶)의 화가라 부르는지를 깨우치는 것은 쉬웠으되 지금의 내가 그것을 비슷한 감동으로 느끼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야말로 전시장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중세의 공간으로 바뀌어서였을까. 그래, 나는 어느덧 중세의 공간으로 진입했던 것이다.   이름만으로도 경건함이 절로 밀려드는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대나무, 국화, 매화 그림 앞에선 흔연스러움이 절로 솟아났다. 지나치게 단아한 강세황(姜世晃 1713-1791)에 견줘 오히려 그 감각이 날렵했으니 뒷날 그의 화풍이 조선 천지에 만개했던 일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을 게다. 하루도 붓을 놓은 적이 없다던 심사정의 매서운 필력이 없었다면 그 힘이 뒷날까지 그렇게 이어지지 않았을 터이다.   게다가 나는 최북(崔北 1738-1786)의 국화와 대나무 그림 앞에서도 숨결이 다급해짐을 느껴야했다. 폭발하는 감성을 한치도 속임없이 화폭에 쏟아부었던 만큼 대나무그림에서도 날렵할대로 날렵한 즉흥성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니 거기서 중세의 마력만이 아니라 현대의 속도를 새기기에 바빴던 것이다. 시대를 내려가면서 심사정과 최북의 그같은 경쾌함이 문득 19세기로 넘어와 난초와 대나무 그림의 거장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마력은 19세기 묵장의 영수 조희룡(趙熙龍 1789-1866)에 이르러 비로소 현란한 폭발을 일으켰다. 얼핏 근대의 문을 열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18세기 예원의 총수 강세황이 자랑했던 단아함 또한 신위(申緯 1769-1847)로 이어지면서 19세기 사군자를 사로잡은 커다란 줄기였고 사대부의 격조를 헤아림에 그들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난초 그림이 강세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격조높은 경지에 이르러 조선스런 데 이르를 수 있었음을 떠올릴 일이다.   거리낌 없는 성령(性靈)의 폭발은 비단 김정희(金正喜 1786-1856)만의 것은 아니었다. 스러져가는 중세의 그림자를 안타까워 하며 격정을 터뜨리는 19세기 지식인들의 거친 숨결은 오직 황실의 이하응(李昰應 1820-1898)만이 아니었다. 제왕의 기운을 품어낸다고 해서 그의 난초그림은 지금도 사랑받고 있거니와 중세의 추억은 지금도 여전한 모양이다.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마지막 의병 출신인 김진우(金振宇 1883-1950)는 물론, 염세의 은사였던 윤용구(尹用求 1853-1936)에 이르기까지 즐비한 행렬은 바로 그들에게서 멈추고 말았다. 이제야 봉건과 근대의 엇갈림을 마감할 때가 왔던 것이다. 새로운 이념이 불꽃처럼 타올랐고 사군자는 중세의 상징이자 그 무덤인 박물관에 자리를 잡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게 헤아리는 가운데 어느덧 나는 중세의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꿈결같은 순간이 지나가자 곧장 이데올로그로 행세했던 숱한 지식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북정상회담으로 말미암아 분단시대의 장막이 거두어지는 이 감당치 못할 격변 속에 야합과 별절을 되풀이 했던 지식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윤희순과 김용준의 간절히 희망했던 재창조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소멸해 버린 사군자의 빛바랜 영광을 떠올리며 내가 사는 속세로 벗어나려던 순간, 영화감독 장선우 형을 만났다. 20세기에야 생긴 예술을 다루는 영화감독에게 사군자는 무슨 말을 해줄까. 사라져버린 천년의 예술을 만나 무엇을 느낄까. 다시 만날 때 묻고 싶은 말이다. 사군자시대 - 민족의 상징, 사군자 19세기 말, 일본 제국의 총칼이 휘몰아치는 위기 상황에 마주친 민중들은 무력 항쟁을 펼쳤지만 지배계층은 무기력했다. 보수적 지식인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기치를 들고 민중들의 힘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향촌 서원 따위에 둥지를 틀고 외세에 저항했다. 보수적 지식인들은 19세기 민족사적 과제인 봉건성 극복과 근대성 획득에 무기력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성을 지키고자하는 일에 주역으로 나섰다. 주로 그들이 의병장이었음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개혁과 개방 구상을 갖고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려했던 개화파들은 민중들의 반봉건 역량을 충분히 이끌지 못했다.   19세기 말의 시대상황은 지식인들이 지향해야 할 가치를 일찌기 바꿔놓고 있었다. 봉건성 극복이나 근대성 획득 보다는 민족 자주성을 제대로 세우는 일이 최고의 가치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같은 시대 정신은 화가들로 하여금 전통을 지키는 쪽으로 나가도록 했다. 문인 전통을 대물림하고 있던 우국지사들은 자신의 태도와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 사군자에 눈돌렸다. 사군자의 오랜 전통은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담는 것이었다. 민족 위기 상황에 마주친 지식인들의 뜻을 표현할 최고의 그릇으로 사군자만큼 적절한 도구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사군자가 이 때만큼 시대 정신을 상징할 수 있었던 때도 드물었다. 사군자는 동북아시아 그림 세계에서 대단히 돋보이는 국제적 전통이다. 사군자가 사대부들의 정신 세계를 상징하는 소재로 자리잡은 때는 중국 송나라(960-1279) 시절이며 특히 원나라(1279-1368) 때 크게 유행했다. 몽고 민족이 한 민족을 지배하던 시절이었으니 자기 민족에 대한 지조와 충성심, 굽히지 않는 저항 정신 따위를 강렬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던 사군자는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각광을 받았다. 이를테면 도화서 화원 시험 과목 가운데 대나무 그림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때 사군자는 감상화로서 사대부들의 고상한 품격을 드러내는 성격이 강했다. 19세기 전반기에 활발한 창작을 꾀했던 신위(申緯 1769-1847),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조희룡(1789-1866) 들은 모두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지식인의 이러저러한 정신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군자를 그렸다. 신위는 예순이 넘어 세차례의 귀양길을 떠나야 했고 김정희는 1840년부터 무려 8년 동안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했으며 1851년에도 2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조희룡 또한 그들에 못지 않은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조희룡은 유배 생활을 다음처럼 그렸다. “나는 날마다 바닷가로 간다. 그리고는 고기가 입을 벌리며 오가는 것도 보고 새우가 뛰노는 것도 보면서 시사(詩思)를 움직여 시 백수를 지었다. 이 시들은 한결같이 슬프고 괴로우며 목이 쉬고 답답한 소리들 뿐, 나는 다시는 시를 짓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속의 시가 열 손가락으로 튀어나와 매화그림이 되고 난초그림이 되고 대그림이 되었다. 시가 연달아 그림으로 바뀌니 작은 집에 그림이 가득찼다. 뒤에 이들을 한데 모아 불에 태워 버렸다. 그림들이 타서 재가 될 무렵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 주워 가는 것이야 내가 알 바 아니다. 기개와 기교, 이하응과 김응원 신위의 대나무 그림은 부드럽기 짝이 없으며 김정희 난초 그림은 힘에 넘쳐 거칠기조차 하고 조희룡의 매화 그림은 화려하여 지극히 아름답다. 그들 보다 한세대 아래로는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 과 개화파의 비조 오경석(吳慶錫 1831-1879) 이 사군자를 잘 그렸다. 세상을 일찍 등진 오경석의 매화 그림은 호방한 기개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하응의 난초 그림은 무척 아름답다. 이하응은 왕의 아버지로 나라의 운명에 깊숙히 개입했던 사람답게 초기의 그림은 힘차고 날카로웠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잃어버린 만년의 그림은 가느다란 잎새에 부드러움이 넘쳐 흘렀다. 1881년에 그린 <묵란> 은 그 힘찬 붓놀림이 살아 있어 나라를 다스리던 기개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잎이 꺽이고 삐치며 화폭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잎새가 싱싱하다. 이하응의 그림은 가짜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빼어난 구도 감각은 빗댈 이가 없을 정도다. 윗쪽 잔글씨는 여백 구도를 방해하고 있는 데 뒷날 정인보가 덧붙여 쓴 것이며 왼쪽 위아래 긴 글씨는 이하응이 쓴 것이다. 이 그림이 중국으로 나갔다가 한 해를 못채우고 되돌아왔음을 신기하게 여기는 내용이다. 이하응이 중국에 납치 당했다 되돌아왔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다. 김응원(金應元 1855-1921)은 어릴 때 부터 이하응을 따르며 그림까지 따랐다. 이것은 대원군의 기개마저 따라 배웠음을 뜻하거니와 대원군 섭정 시절 그림을 대필 할 정도로 기량이 눈부셨다. 대원군이 세상을 뜨고 세기가 바뀌어 나이 쉰이 넘어선 김응원은 주인이자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 기교미 넘치는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깔끔한 맛은 스승으로 부터 대물림했거니와 때로 소담스럽고 때로 우아한 개성을 발휘하던 말년에 그린 대작 <석난(石蘭)> 10폭 병풍은 걸작이라 할만하다. 옅고 짙은 먹으로 그린 바위의 굴곡에 뿌리듯 찍은 점이 깊이와 무게를 더해주는 작품이다. 장엄한 바위 틈 사이 피어 있는 난초들이 꿈결처럼 아름답다. 놀라운 것은 왼쪽 상단에 거꾸로 자리잡은 바위의 모습이다. 파도 끝에 거꾸로 매달린 난초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영광을 잃어버린 왕조의 환상처럼 물구나무 선 난초의 운명은 대체 어떤 것일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왕 순종의 명으로 그린 이 작품이 신비와 환상을 머금고 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19년 3.1민족해방운동을 겪은 다음 해에 꿈꿀 수 있는 절망과 희망을 떠올린다면 말이다. 1920년에 그린 이 그림에는 난초의 풍아(風雅)함과 바위의 영원한 무게를 이야기하는 글씨가 자리잡고 있다. 반외세의 상징, 윤용구   윤용구(尹用救 1853-1936)는 19세기 말 스러져가는 왕조의 고위 관료였다. 윤용구는 예조, 이조 판서를 지냈지만 젊은 나이에 관직에서 은퇴했다. 또한 갑오개혁 및 농민전쟁을 겪은 1895년 이후 열차례나 관직을 거부하고 서울 근교에서 은거 했다. 한일합방 뒤 남작 작위 또한 거부하였으니 윤용구가 소극적이지만 절개와 지조 넘치는 저항 지식인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윤용구는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렸다. 1989년 학고재화랑 주최 구한말의 그림 전람회에 나온 두 폭의 <석난>에는 다음과 같은 제시가 있다.   “칼 기운은 구름을 뚫고 지사는 한을 품었다. 그윽한 향기는 방안까지 퍼져와 선인(善人)과 벗하는 증표(證表)가 된다.” 바위의 모습이 마치 칼처럼 보이는 것은 검기(劍氣)란 싯귀 탓이다. 하지만 치솟는 분위기는 감출길 없는 절망과 희망의 엇갈림에서 우러나는 것임을 깨우치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다. 가벼운 붓놀림의 속도감, 듬성듬성 크게 찍은 몇 개의 점이 뿜어내는 거친 맛은 한을 품은 지사의 기개일 터이다. 옆의 그림 또한 허공에 매달린 난초를 그려 이룰 길 없는 민족 자주화의 꿈을 상징한 것이다. 그 제시는 다음과 같다. “깍아 세운 절벽은 천 길이나 되는 데 난초 꽃이 푸른 허공에 있다. 그 밑을 지나가는 나뭇군 하나 손을 들어 꺽고자 하나 미치지 못한다.”   식민지 백성인 자신을 나뭇군으로, 민족 자주를 난초로 빗대놓은 이 시의 안타까움은 형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사선 구도에 아래를 향한 난초 잎과 직선과 곡선이 어울려 아득함을 표현한 것이다. 식민지 땅에서 반외세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창작 세계를 추구한 화가의 이름과 작품을 들라면 나는 결코 윤용구란 이름과 <석난>을 빼놓지 않겠다. 망명객, 민영익   난초 그림에서는 춘란(春蘭)과 건란(建蘭)을 가장 많이 그리는 데 김정희와 이하응이 즐겼던 춘란은 잎의 길이가 길고 짧으며 한 줄기엔 한 송이의 꽃이 피는 난초다. 건란은 잎이 넓고 뻣세 곧으며 한 줄기에 아홉송이 꽃이 핀다.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춘란과 건란을 아울러 그렸지만 대개 건란을 웅장한 느낌이 나도록 그리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민영익은 김정희를 비롯해 중국 정섭(鄭燮)과 석도(石濤)를 배우되 뜻만 배우고 모습을 배우지 않았으니 민영익 독자의 양식에 이르렀다. 민영익은 젊은 날 부터 부패한 민비 정권의 고위 관료 출신으로 일본과 미국, 중국을 떠돌며 격동의 역사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풍운아였다. 썩은 권력 복판에서 죽음의 위험 앞에 마주하고 있던 민영익은 서른 아홉살 때인 1898년 결국 상해로 1차 망명길을 떠났다. 이무렵 그린듯한 <묵난>은 옅은 먹을 써서 간결하되 기다란 두 줄기 잎새를 길게 뺀 구도다. 이 잎새의 휨이 화폭을 휘어잡는다. 반대쪽으로 뻗은 꽃과 줄기가 화폭의 균형을 잡아주고 또한 글씨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담한 조형 감각으로 결코 부드럽지 않은 어떤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 기운의 정체는 무엇일까. 민영익은 그림에 다음처럼 썼다. “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늘 끝 풀을 보며 수심에 찬듯 아름답다. 기이한 꽃을 생각하며 숨긴 것을 마음으로 그렸다. 향기가 흘러 멀리까지 빛나니 너른 밭이랑엔 나무와 꽃이 가득한데 그곳엔 오직 그대의 집만 있구나.?? 사람들은 난초를 미인에 빗대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떠도는 망명객 민영익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집을 앗긴 식민지 망명객이 품은 그리움을 품고 있는 난초인 것이다. 그래선가. 아득한 화가의 마음을 엿보기 넉넉한 붓놀림과 옅고 고운 곡선이 돋보인다. 맵시 넘치며 유창하기 그지없어 강렬한 분위기를 풍기는 난초를 숱하게 그렸던 민영익의 걸작은 대개 중국에서 그린 것들이다. 민영익은 유난히 대나무를 사랑했다. 서울 집을 죽동궁(竹洞宮), 망명지 상해의 집을 천심죽재(千尋竹齋)라 이름붙일 정도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묵죽>은 빠른 붓놀림이 놀라울 정도인데 옅은 대줄기와 짙은 잎새가 어울려 바람에 흩날리는 분위기를 연출한 작품이다. 아래쪽으로 몰아넣고 마구 갈긴듯 잽싼 솜씨가 박진감을 더해주고 있고 비슷하지만 조그만 무더기가 윗쪽에 있어 눈길을 유혹한다. 민영익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자신의 집을 파괴 당한 뒤 1884년 갑신정변 때엔 중상을 입어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아버지가 피살 당했고 1895년에는 고모인 민비를 잃었다. 갑신정변 실패 뒤 일본으로 피신한 김옥균을 암살키 위해 자객을 파견하기도 했던 민영익은 스스로 중국에 망명해 끝내 상해에서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상해에서 그의 삶은 서화 명가들을 초청하여 흥취를 즐기곤 했으나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사살하자 4만원이란 큰 돈을 안중근 의사의 변호 비용으로 내놓았던 뜨거운 애국 지사였다. 그의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감도는 아득한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쉬운 것은 바로 그 파란 많은 삶 탓이다. 호쾌함, 김규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은 중국에서 젊은날을 보내다가 세기말에 귀국한 뒤 1901년 부터 어린 영친왕의 글씨 교사로 왕실에 출입했다. 그렇게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김규진의 대나무 그림은 20세기 초엽 한 시대를 풍미했다. 자유롭고 호방한 성격에 걸맞는 붓놀림으로 창작한 숱한 대나무 그림들은 기운이 넘쳐 보는 이로 하여금 호쾌한 느낌을 절로 나게 만든다. <묵죽> 은 옅은 먹과 짙은 먹을 조화롭게 구사하여 먹빛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잎새는 모두 비를 맞은듯 무겁게 쳐져 있지만 맑은 줄기와 어울려 상쾌하기 이를데 없다. ‘오월의 서늘한 그늘이 방안까지 차가움을 드리운다??는 제시와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김규진은 계절마다 바뀌는 대나무들을 숱하게 그렸으며 누구도 따를 길 없는 필력으로 당대 화단을 압도했다. 마음 먹은대로 화폭을 다룰 줄 알았으니 세운 뜻을 어김없이 연출한 작가였고 누구나 그를 독보적인 묵죽의 대가라 불렀다. 그러나 김규진의 시대는 식민의 시대였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그림은 몰라도 사군자만큼은 뼈저린 아픔을 아우르길 바랐다. 김규진의 대나무 그림은 장쾌했을 뿐이다. 무엇을 위한 장쾌함이며 누구를 위한 호쾌함일까. 낭만뿐인 김규진의 대나무는 세월이 흘러 식민의 아픔이 깊을 수록 범속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최열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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