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 |
[문화칼럼]창의 게릴라들에게 멍석을 깔아주자
관리자(2009-02-06 12:09:16)
[문화칼럼]창의 게릴라들에게 멍석을 깔아주자
나는 ‘게릴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게릴라=빨치산 유격부대’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내 말이 뜬금없이 들릴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게릴라의 활약이 우리 지역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게릴라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내가 말하는 게릴라는 ‘창의 게릴라’다. ‘창의 게릴라’는 이 시대 최고의 비즈니스 철학자로 불리는 개리 해멀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그는『꿀벌과 게릴라』라는 저서를 통해 ‘21세기에는 성실한 꿀벌의 능력은 도태되고 창의적인 게릴라가 성공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진 바 있다. 그가 창의 게릴라들에게 던지는 제1의 행동원칙은 ‘틀에 박힌 성실함을 버려라’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 게릴라들에게는 틀에 박힌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틀에 박힌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게릴라가 아니다. 예측불허의 전략과 작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세계와 생활습관을 교란시키는 일, 이것이 바로 21세기 창의 게릴라들의 역할이다. 이 창의 게릴라와 어울리는 개념으로 창조산업(CreBiz)이 있다. 창조산업이란 기존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발상을 통해 새로운 사업을 창출하는 ‘크리에이티브 비즈니스’의 줄임말이다. 크레비즈가 21세기 새로운 산업으로 각광받는 이유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전문지식이 결합해서 새롭고 독창적인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분야로 디자인, 영상, 공예산업 등이 꼽히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발 빠르게 호응하고 있는 자치단체는 서울시다. “디자인을 통해 서울의 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공언한 오세훈 시장은 이미 신사동 가로수길과 마포 홍대주변에 디자인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2010년에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완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신사동 가로수길 주변에만 100여개의 디자인 기업을 불러들여서 집중지원하고, 이 일대를 세계적인 디자인 기업 밀집지역으로 조성한다는 것이 오세훈 시장의 야심찬 계획이다. 서울 문래동 창작촌은 어떠한가? 영등포구 문래동은 한때 대한민국 철강재 판매 1번지였지만 1990년대 이후 공장들이 빠져나가면서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개 남지 않은 소매상과 철공소들 사이에서 희한한 게릴라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낮에는 1층 철공소에서 ‘노동활동’이 일어나고 밤에는 건물 2,3층에 입주한 예술가들이 ‘창작활동’을 벌인다. 혹자는 이를 ‘예술과 쇳가루의 사이좋은 동거’라고 칭한다. 현재 문래동 창작촌에는 65개의 작업실이 있고 150여명의 예술가가 활동하고 있다. 문래동 창작촌 김윤환 대표는 “중국 베이징의 다산쯔(大山子)처럼 서울의 새로운 문화명소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다산쯔란 베이징 ‘다산쯔 798 예술구’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은 다산쯔 798 예술구 덕분에 세계 미술시장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다산쯔 역시 1950년대 후반 군수무기를 만들던 공장지대였다. 개방과 함께 20여 년 동안 방치돼 있다가 가난한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활용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세계적인 예술촌으로 자리잡았다. 2004년부터는 다산쯔 798 페스티벌도 열고 있다. 세계적인 창조도시·문화도시 가운데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사사키 마사유키(리츠메이칸대 교수)가 『창조하는 도시』에서 언급한 대로, 이탈리아 볼로냐와 일본의 가나자와가 대표적인 경우다. 오래된 방직공장을 시민문화창작촌으로 개조한다거나 간장공장 창고를 카페로 만드는 등 기존의 건물을 활용해 ‘세계에서 하나뿐인’ 문화공간으로 재창조하는 일은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다. 그것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이쯤에서 전라북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전주는 지난해부터 아트폴리스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관 주도 사업이 지니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다리를 디자인하고 거리의 시설물을 바꾸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모든 콘텐츠를 해결하는 힘이 사람에게 있다.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창의 게릴라가 도시를 바꿀 수 있는 대안이다.
동문거리를 중심으로 그러한 움직임이 몇 년 전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소수 민간의 힘으로 하려다 보니 일의 진척이 더디고 그 효과도 미미하다. 관에서는 이들의 노력을 적극 지원하고 지지하는 정책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창조적 인재들이 오고 싶어 하도록 여건을 조성해줘야 한다. 서울시처럼 “신사동 가로수길에 디자인 기업 100개를!“ 식의 구체적 플랜은 세울 수 없다 해도, 의욕적인 창의 게릴라들을 위해 멍석을 깔아주는 역할을 자치단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의 게릴라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면 구도심 활성화도 자연스럽게 이루어낼 수 있다. 창의 게릴라들은 새 건물이나 비까번쩍한 빌딩을 싫어한다. 오래 묵은 건물, 케케묵은 시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솟아난다. 전주야말로 창의 게릴라를 불러들일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역사와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그 안에는 미래를 향한 혁신적인 기운이 꿈틀거리는 곳, 그것이 바로 창의 게릴라들이 우글거리는 예술촌의 모습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자체도 ‘창의적인’ 마인드를 가질 필요가 있다. 성공한 예술촌의 핵심은 ‘저렴한 임대료’에 있다. 중국의 다산쯔도 문래동 창작촌도 가난한 작가들이 마음껏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저렴하게 임대를 해줬기 때문에 예술촌 형성이 가능했다. 가나자와 예술창작촌은 시민들에게 거의 무료로 제공된다. 창의 게릴라들의 특성은 일단 모이기만 하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네크워크가 형성되고 그 연대의 힘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간다. 그것이 지역의 힘이 되고 궁극적으로 관광상품이 된다.
다행히 전라북도에는 그럴 만한 공간들이 꽤 있다. 지자체에서 사들여 저렴하게 임대해 주고 창의 게릴라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멍석을 깔아준다면 전라북도에도 다산쯔 798번지 같은 명소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들이 ‘게릴라’라는 점이다. 게릴라들은 절대로 간섭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얼마를 지원해 줬다는 이유로 그들의 정신과 활동을 제약하려 든다면 창의 게릴라의 창의성은 죽고 만다. 지원도 창의적으로! 예술도 창의적으로! 이것이 지역의 창조산업이 성공할 수 있는 핵심 키워드다. 파격적이고 선도적으로 지원하되 간섭하지 말 것! 이것이 창의 게릴라들이 원하는 진정한 ‘멍석’이다. 지금까지는 개인의 경제적인 능력이 문화수준을 규정했다면, 앞으로는 문화수준이 개인의 경제능력을 좌우하게 되는 시대가 올 거라고 한다. 이럴 때일수록 창조적인 인재들을 ‘우리편’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창조도시를 만들어가는 힘은 결국 창조적 인재에서 나온다. 지금부터라도 창의 게릴라들이 전라북도로 올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자. 그리고 그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박수치며 지켜보자. 전라북도가 21세기 창조도시로 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성환 전북도청 홍보기획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