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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 |
[명인명장 ] 이강주 명인 조정형
관리자(2009-02-06 12:07:33)
[명인명장 │ 내가 살아온 세상] 이강주 명인  조정형 "다른 것은 안 허고 술 인생만 살었지" 어느새 그의 나이 예순아홉. ‘술 빚는 늙은이’라는 소리가 어울릴 법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늙은이라는 소리에 손사래를 칩니다. 요즘도 다섯 군데 학원에 등록을 해놓고 ‘풍류’를 즐깁니다. 나이 오십 줄에 이르면서부터 장고며 춤이며 골프며 수영이며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죄다 스케줄 표에 넣었습니다. 퇴근길에 이 다섯 군데 학원을 순례하듯이 거친다고 합니다. 전국 팔도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우리 술을 복원하는데 바쳤던 세월. 무엇에든 미치지 않고서는 진짜가 나오지 않는 법이지요. 험한 세월 무사히 건너와 대한민국의 명주로 자리한 이강주 이야기. 이미 책으로, 드라마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야기지만, 조정형 선생의 목소리로 직접 듣다보면 감회가 좀 남다를 것입니다. 힘들었던 대목은 애써 피해가고 잠시 눈시울 붉히는 것으로 수십 년 세월을 단숨에 뛰어넘어버리는 조정형 씨. 이강주 한 잔 옆에 놓고,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양반집에는 꼭 자기술이 있었어 저는 전주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 6대 선친이 한양에서 벼슬허다가 내려오셨거든. 충청도로 해가지고 내려오셨는데 우리가 아마 조선조 개국공신이었어. 이성계허고 사둔도 맺고. 한양 조씬데, 원본은 중국서 넘어와 가지고. 이성계가 처음에 함경도 쌍룡총 있는디 있었잖어? 거그서 이성계 아버지가 함경도 그 짝에서 대장했었거든. 그래서 벼슬허다가 낙향을 했었나봐. 그래서 선친 때부터 전주에 내려왔지. 그래서 인자 우리 할아버지가 전주 부사를 했어요. 그때는 완산부사라고 했는데, 무주부사도 허고 옥구부사도 허고...부사라고 허먼 지금 ‘군수’드만. 지금 군순데 옛날에는 3군을 거느렸어요. 군도 지금보다 면적이 커요. 무주가 지금 무주군에서 임실 순창까지 전부 다 무주군이여. 전라북도가 네 간디 부로 쪼개질 정도로 면적이 컸었지. 우리 할아버지가 무주부사였는데 그때 서고도 증축해가지고 이조실록이 지금도 남아있지 않습니까? 우리 산소도 다 지금 그짝에가 있어요. 근디 본관은 전주니까, 한양 조씨지만 여그서 살았는데 그때는 거의 집에서 술을 빚었어요. 가양주를, 손님들 접대도 접대지만, 정치가 다 사택에서 이루어지니까. 그때 족보를 보니까 우리 식솔이 60명이더라고. 그때만 해도 집에서 일허는 사람들을 집에서 안 살아도 다 식솔로 해서 그렇게 맨들어졌데. 자기가 관할하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도 호적에 올렸데. 그러니까 그때부터 술을 많이 빚었죠. 옛날에는 부녀교육이라는 게 없었어요. 시집갈 때 몇 가지 가르치는 게 전부였지. 장 담는 거 여섯 개, 술 빚는 거 여섯 개, 김치 담그는 거 아홉 개, 그렇게 기본교육을 시켜갖고 나가는 게 기본으로 되었지. 그래서 가양주로 이강주를 우리 집에서 쭉 빚었는데, 그때 당시는 이강주만 쭉 빚은 것이 아니고 여러 술을 같이 빚었지. 이강주만 별도로 빚었던 것은 아녀. 그때는 사람 숫자가 많응게 약주를 빚어요. 그래갖고 맑게 걸른 것은 주인이 고급손님에게 대접허고 탁한 것은 인자 농사를 지야 하니까 논으로 가고. 그때는 냉장고가 없응게 저장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저장을 해야 허니까 일부는 소주로 내려놓아요. 맨날 술을 못 빚응게. 근데 이왕이면 소주에다가 맛을 좀 업그레이드 시켜야잖어? 명색이 양반이라 손님들이 중앙에서도 오고 그러니까 거그서 넣기 시작한 것이 울금, 계피, 배, 생강을 넣었어. 문헌에도 써있고 그러니까. 지금이니까 그러지만 그전에는 봉동 생강이 젤로 유명해가지고 진상도 하고 그랬어. 글고 여그 이서배, 지금은 전주배라고 허지요. 글고 울금이란 것이 들어갔는디, 황실에서 쓰는 노란 열맨디 그것이 따순 지방에서 나는 생강과에 속하는 것이여. 근디 온상 같은디서 특수재배를 했어. 왕실에서 특별히 음식에다 널라고 재배를 했어. 중국 황실에서 울금을 넣기 시작했는데 울금이 정신안정제여. 긍게 황실에서 울금을 썼는디 서울에서는 재배가 안 되니까 전주 와서 재배를 했어. 그때는 전주가 농사짓기가 젤로 좋은 지방이었응게. 평야도 있고 용수도 풍부허고 그니까. 글다 보니까 그놈 네 개를 진상을 허게 됐는데, 기왕이면 진상허는 것을 다 넣어서 맨들자, 해서 이 네 가지를 넣어서 이강주를 맨든 것 같어. 그 당시에는 양반집이라 해서 아버지가 빚은 것은 아니고 아녀자들이 빚었지. 남자들이야 먹는 것만 소질이 있고, 술 빚는 거는 안에서 내려온 내력이지. 그렇게 조상대대로 해서 술이 내려왔었어. 양반집에는 꼭 자기술이 있었어. 어느 집이나 자기집에서만 맨드는 특유의 술이 있었어. 명절 때가 되면 어렸을 때도 이집 저집 술 맛보고 댕기면서 자랑도 허고 그랬으니까. 자기집 술 좋게 맨들라고 고생도 허고 그 집 가면 뭔 술이 있다더라, 이런 말이 있었어. 김씨네 술, 이씨네 술, 그렇게 집안 어른 이름을 붙여다가 술이라고 했지. 호를 붙일 때도 있었고. 내가 말하자면 호가 고천이면 ‘고천술’ 이렇게. 옛날에는 별다른 놀이가 없었으니까 세배허러 댕김서 술도 맛보고 그랬지. 그만큼 한국사람들이 술을 많이 먹었어. 어머니 꿈에 솥단지가 나오드랴 나는 어떻게 해서 이런 거를 하게 됐냐면, 내가 5형제여. 5형제 중 세짼디, 내가 학교를 전주고등학교를 나와 가지고 바로 전북대학교 발효학과를 들어갔어. 발효학과면 술 맨드는 학과여. 거그서부터 인연이 되야. 지금 농예화학과가 그때 발효학과여. 지금은 식품공학과하고 발효학과로 두 개로 나눠졌어. 한마디로 술 맨드는 과여. 된장도 맨들고 꼬추장도 맨들고. 그 발효학과를 정식으로 나왔지. 그것도 나가 수석으로 나왔어. 머리가 좋았어. 그 과에서는 전북대학교 수석졸업을 했응게. 근디 그 대학교를 들어갈 때도 이상혀. 지금도 생각이 나는 게,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날 때 꿈에 솥단지가 나오드랴. 할아버지헌테 태몽을 꾸었는디 솥단지가 나왔다고 말을 했더니, 할아버지가 있다가 그 놈 굶어죽지는 않을 놈이라고 했댜. 솥 때는 놈은 안 굶어죽는다고. 솥단지가 있으면 뭔가를 땔 거 아녀? 그러먼 솥 정(鼎)자를 이름에다 넣어라. 그래서 내 이름에 정자가 솥 정자여. 어려워 이 한자가. 그림 그려야 혀. 잘 안 써져. 그래서 내 이름은 솥 정자를 넣어서 정형이여. 대학교도 그러더라고. 내가 전고를 나왔응게 전고에서 농대 간다는 것은, 발효학과가 농대여, 좀 그랬지. 다들 안 갈라고 허고 좀 거시기했지. 그래서 그때 상대를 신청했어, 처음에는. 그래서 합격을 해갖고 국어시험을 본다고 해서 갔는디 면접을 해야 헌다고 그려. 면접은 허야지. 그때만 해도 전북대학교 들어가기가 지금같이 어렵지는 않었어. 성적도 괜찮고 해서 장학생으로 들어갔는디, 구두시험 때 말이여, 앞엣놈이 그러드란 말이여. 요새 농대 농예화학과가 잘 팔린다고 그려. 나는 농예화학과가 뭔지도 모르지. 근디 느닷없이 이 시험관이 지금 혹시 과를 옮길라면 옮기라고 또 그러더라고. 허허. 근디 나가 전에 한번 상대를 슬쩍 가봤더니 맨날 깡패 같은 놈들만 오고 분위기가 안 좋더라고. 상고에서 많이 옹게. 근디 시험관이 그렇게 말을 헝게 과를 옮겨버렸지. 긍게 참 운명이란 게 이상혀. 삼학소주 실험실장으로 발령이 났어 그래서 인자 그 과에서 갔어. 전고에서 농대 강게 수석은 말 헐 것도 없고 농고 졸업헌 애들허고 게임이 안 되지. 항상 장학금이 나오고 일등으로 졸업을 했지. 아닌 게 아니라 그때 발효학과가 잘 나갔어, 우리 때까지. 기술자가 없어가지고 바로 취직이 되고 졸업도 허기 전에 추천해서 취직을 했지. 그때 삼학이라고 소주공장이 있었어. 삼학소주. 거그 실험실장으로 발령이 났어. 그냥 졸업허자마자. 왜 그냐면 회장이 그러드랴. 전에 있었던 사람은 전공이 없어. 그때 우리가 전공과목이여. 당시 삼학이 회사도 커지고 헝게 전공한 사람들로 직원을 바꾸라고 회장이 헌거여. 긍게 졸업헌 놈들을 데려간 거지. 실습을 했응게 술 맨드는 걸 알기는 알지. 그때 삼학소주 직원이 2천명이더라고. 그때 나는 공무원 시험 4급을 봐가지고 6개월 정도 있었는데 회장이 그렇게 말을 허니까 학교 교수가 추천서를 다 맨들어 가지고 나를 불렀어. 나는 삼학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른디 거그로 가라고 허더라고. 공무원 교육을 받는 중인디 학교 교수가 이리역에 있다고 내려오랴. 그랬더니 소개서랑 다 해갖고 와서는 나더러 삼학소주로 가랴. 그래서 목포로 내려갔어. 목포에 본사가 있었어. 내려갔더니 그날부터 사택이 딱 있고 파출부가 있고 오늘부터 근무를 해야니까 집에 못 간다 이거여. 그 대신 월급은 공무원 4배! 상당히 높더라고. 그때 삼학이 왜 그렇게 급했냐면 일본 애들이 와서 공사를 했어. 그 전에는 석탄 때다가 보일라로 다 바꾸고, 뭣이 다 신기술로 바꿔져. 근디 가뜰(기존의 직원들)가지고는 안 돼. 말허자면 영어 ABCD도 모르지. 우리는 일본 원서라도 좀 보고 회화라도 좀 하는데 야뜰은 통 되덜 안혀. 그래서 새 기계 들어와서 일을 허다봉게 자연히 일류가 되야버렸지. 인자 주류공장에서는 내가 젤로 어른이 돼갖고 공장장을 한 20년 했지. 64년부터 했으니까. 삼학에서 해가지고 보배 공장장까지 했으니까. 그리고 90년대에 이강주를 시작했응게. 그러믄 한 25년이나 되겄네. 공장장허면서 술만 맨들었어. 중간에 삼학이 망했어. 그래서 보배로 왔지. 보배서 한 15년 근무했어. 90년도에 이강주 시작했응게 그것도 거의 20년 됐네. 솥단지 하나 걸고 항아리 열 개 놓고 5백병을 맨들었어 술 역사를 보며는 64년도부터 지금이 2009년이니까 45년 동안 했네. 학교에서 전공한 것까지 하면 50년이여 50년! 다른 것은 안 허고 술 인생만 살었지. 거까지는 좋아. 나가 KBS 드라마에도 안 나왔는가, 그것은 나의 하나의 성장과정이지. 고생도 참 많이 했지. 죽을라고도 허고. 내가 뭔 이야기를 할라고 하냐면 이강주가 좋다 나쁘다 이런 이야기는 빼고, 나가 87년도에 문화재가 됐어. 89년도에 국가법이 처음으로 제정이 돼가지고 술을 만들기 시작했어. 그 전에는 법으로 못 만들게 돼 있었어. 주류 허가라는 게 없었어. 근디 89년부터 문화재가 된 사람들은 법으로 지정해가지고 술을 맨들어야 했어. 그런디 돈이 없어갖고 딴 사람들은 공장을 허는니 나는 못했어. 늦었어. 내가 한 1년 늦게 시작했어. 돈을 좀 모아놨어야 허는디 공장장허면서 중간에 농약이랑 두 가지 사장을 허다가 그것을 엎었어. 외상값을 못 받고. 그래가지고 당시에는 셋방 사는 거여. 큰집에서도 도와주질 않는 거여. 공장장 사표 낸게 미친놈이라고 또 혼나고. 안 그래도 미친놈이라고 했어. 민속주 연구헌다고 사표내고 돌아댕기고 그때부터. 박물관 맨든 게 그때 산 것이거등. 좀 요상한 짓을 허고 댕갰지. 그런디 사업은 무슨 사업이여. 돈도 하나도 안 줘. 누가 도와주지도 않고 은행에서도 담보가 없응게 빌려주지도 않고. 국가에서도 문화재라고 돈 주는 것 없응게. 그때 이리에서 셋방 살 땐디 3천5백만 원짜리 전세를 살 땐디 그중에서 천5백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어. 전세금에서 빼달라고 헝게 빼주지. 지가 나갈 때 2천만 원 주면 된게. 그래서 천5백만 원을 가지고 시작을 했어. 솥단지 하나 사서 그놈 걸고, 자기병은 시장서 2백 원에 그때 샀어. 3백 원 주니까 인쇄를 허는 디가 있더라고. 그래서 한 달에 5백병 정도를 맨들었어. 그때는 손으로 다 빚었지. 항아리 열 개 놓고 제대로 옛날식으로 했지. 문화재 허가 났응게 맨들어야지. 5백병을 왜 만들었냐면 이 술이 문화재니까 도에서도 써. 문화재라 의무적으로 만들어야 혀. 돈도 나와. 그때 50만원이면 밥은 먹고 살었어. 긍게 술이 안 나가도 나 그놈 갖고 먹고 산다, 그런 마음으로 헌 거여. 백화점에서 와서 알아서 가져강게 우리는 헐일이 없어 그래서 인자 공장 허가를 내갖고 제품을 만들었어, 좌우지간 5백병을. 뭐 헐 일도 없응게. 근디 그때 손으로 다 빚어가지고 그때 맛이 참 좋았다고. 허허허. 술맛이 진했지, 약간 탑탑허드라도. 진국이었제. 하루에 2백병 나오는디 차가 다섯 대가 스고 그랬었어. 다 현찰 가지고. 그때부터 내가 은행을 안 갔어. 신세계(백화점)에서 8천만 원 갖고 왔더라고. 내 얘기가 테레비에 나왔어. 그걸 보고 찾아왔더라고. 감격적으로 봤디야. 나는 술 맨드는 놈이라 챙피해서 혼났는디. 이런 디서 술 맨드는 것도 챙피헌디 그걸 막 찍는다고 해. 그걸 보고 신세계 회장이 8천만 원 갖다주고 추석때 납품을 허라고 그렇게 얘기를 헌 거여. 돈을 받았는디 어떻게 헐 것이여. 새로 공장을 짓자니 시간도 없고 그래서 산 것이 집을 샀어. 거그서 내가 만들었지. 그래서 그냥 집에서 했어. 민속주는 집에서 허게끄롬 돼 있었어. 긍게 그 다음에 롯데(백화점)에서 2억을 갖고 왔더라고. 그래서 또 옆집을 샀어. 그렁게 은행도 한번도 못 가고 팔라고 생각도 안 허고. 지금도 포스타 한 장이 없어요. 지금까지 이강주 포스타 한 장이 없어. 그리고 우리 직원이 3명뺀이 없어. 여직원, 사무장, 나! 백화점에서 와서 자기들이 알아서 가져강게 우리는 헐 일이 없어. 우리는 술만 넘겨줘 버리면 끝나. 계약해가지고 차 가지고 공장으로 와. 그 대신 음식점 판매는 안 했지. 근디 요새 인자 음식점을 헐라고 혀. 요새는 술도 하도 종류도 많으니까 백화점도 매출이 떨어지고 그래서 수출 쪽으로, 해외 음식점에 나가게 해갖고 싸게 병으로 5천원에 먹게코롬 그렇게 헐라고 자동기계를 갖다놨어. 옛날에 투자해서 번 것도 있고 헝게. 인자 하루에 2만병도 생산할 수 있는 기계를 여그다 시설해놨어. 시방 오늘부터 헐라고. 지금 우리가 러시아허고 5개국으로 나가. 기계식으로 해야 이것이 나가주지, 손으로 해가지고는 양을 못 맞춰. 어느 정도 체계화 시켜가지고 연구도 허고 자꾸 개발도 허고 발전해 나가야지. 그래서 인자 다 뿌시가갖고 새로 기계 들여서 지금 교육 중에 있어. 가뜰이 숨한번 쉬면 우리는 못 따라가 해외로 수출을 해보먼, 우리는 또 갈 길이 있어. 미국, 일본, 중국, 호주, 태국 이렇게 5개국이고 이번에 러시아도 나갈라고 서두르고 있거든. 그런데 처음에 미국허고 일본을 갖다가 공략을 했는데 우리는 더 애로와. 왜 그냐면 진로가 이미 다 장악을 허고 있어갖고. 그래서 우리는 틈새를 봤어. 호주나 중국은 넓으니까 가뜰이 거그까지는 깊게 거시기를 못해. 긍게 그런 디는 우리가 이겨. 근디 큰 시장 가서 붙을라가다가는 우리가 깨져. 판촉물이라든가 여러 가지 조직이 약하니까. 우리가 좀 들어갔다 허면 가뜰이 깨버리니까. 가뜰이 숨 한번 쉬어버리면 우리는 못 따라가. 한 병씩 더 준다고 해버린게. 오래 해보면, 투자허믄 투자허는 대로 나가. 근디 주로 인자 한국식당 위주로 되야. 근디 요상허게 호주 겉은디는 오래 허다봉게 중국 빼갈집이서 이강주 복분자를 달라고 혀. 인자 중국도 수준이 높아져서 옛날 빼갈 겉은 것은 암 먹을라고 혀. 그렇다고 비싼 양주를 먹을 처지는 못 되고 그렁게 딱 수준이 우리술에 맞어. 우리 중류층 수준이여. 가뜰한테는 그래도 고급술이지 양주 먹대끼 째내고 먹으먼. 지금은 뭐 많이 판다기보다는 이렇게 해서 개척을 험서 하나하나 팔아가는 거지. 해외라는 건 국내허고는 달라가지고 자기노력허는 것만치 나가요. 투자허는 것만치 다시 돌아오고. 우리는 보해같이 대량생산은 못 혀. 가뜰은 보해나 진로는 해외에서 허는 것보면 꼭 돈 벌라고 허는 것보담도 국내에서 남은 놈을 해외에다 쏘는 경우가 많어. 이미지 관리헐라고. 우리는 그 짓은 못 허잖어. 우리 나름대로 전통술이고 거그허고 격이 달르니까 그런데서 차이가 있는 거지. 일본 사람들도 우리 술 사다가 선물 많이 해요. 몇 년 전 도요타 회사도 자기 술만 안 허고 내 것도 가져가서 파리에서 선물헌다고 가져가고 그러더라고. 근디 해외에 술 나갈 때는 약초를 좀 줄여. 서양 사람들은 약초 냄새가 싫다고 약초를 빼라고 혀. 거그는 발효라는 게 없잖어. 우리 술은 누룩을 해서 곰팡이로 술을 맨들고, 가뜰은 밀로 술을 맨들어. 밀 싹을 내서 맥아로 술을 맨드는디, 사람이 임신허머는 면역이 생기대끼 밀 싹을 내며는 여그서 발효를 시키는 성분이 생겨. 그래서 싹을 뜯어버리고 요놈만 넣으면 여그서 당화를 시켜줘. 맥아당 효소가 생겨. 싹이 날 때는 저항력이 생겨. 잡균이 오더라도 분해를 시킬 수도 있고, 요것이 당화를 시키고 술을 맨들거든. 사람들이 다 내 이름이 ‘이강주’인 줄 알어 우리나라 민속주도, 일제시대 거쳐서 한 70년 동안은 민속주라는 게 없었거든. 그냥 밀주라고 했지, 전통술도 없었어. 90년도까지도 밀주라고 했었지. 내가 민속주 조사하고 책 낼 때는 민속주라는 이름이 없었어요. 전통술 이름도 없었고, 분류도 못 했어. 그냥 누구네집 술, 그렇게 불렀지. 내가 다 문헌을 찾아가지고 민속주들이 제자리를 찾도록 해줬어, 솔직히 말해서. 전국을 돌아댕김서 이것은 사삼주요, 이것은 과하주요, 그것을 내가 연구소에 있을 때 연구소 직원 두 사람을 회사 몰래 빼가지고 규장각 가서 문헌 뒤져서 이름을 맨든 거지. 술에 대한 문헌은 없어. 규합총서라든가, 뭐 그런 책들을 일일이 뒤져가면서 술이라는 글자가 있으면 앞뒤로 카피를 해가지고 그 대목을 가지고 지역 도지, 읍지를 일일이 뒤져서 서로 연결을 시켜서 추정을 해보는 거지. 읍지 겉은디 보면 사유가 나와 있어. 뭔 술이 새로 나와서 경쟁이 일어났다든가, 누가 귀양을 왔다든가, 그렇게 해서 새로운 술이 나오더라고. 전쟁이 일어나갖고 먹을 것이 없으면 술 같은 것을 맨들어서 팔기도 허고, 귀양 가서 헐 일이 없응게 술 맨드는 것도 갈쳐주고 한문도 갈쳐주고, 신지식 갈쳐주고 그렇게 했지. 전주 모주 역사도 따지고 보면 그런 것 아닌가. 쩌그 인목대비가 제주도 귀양 가가지고 자기가 델꼬간 하인이 술을 팔아가지고 목숨을 연명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모주라고 했다고 허는디, 내가 제주도에 있을 때 비석이 있다고 해서 찾아보러 갔더니 없어졌더라고. 하여튼 그렇게 기록이 있어. 다 그런 역사가 있어. 연구를 허다 보면 재미가 있어. 내가 전국을 돌아댕김서 이것이 맞다고 써놓으면 나중에 다 인용을 허데. 그렁게 내 책이 교과서 역할을 혀. 그동안은 술 책이 없었어요. 지금 나온 책들을 보면 내 책에서 일부 따가지고 교수가 쓰고 쓰고 그러지. 나는 자료도 다 가지고 있어. 햇수로 5년 동안 전국을 두 번씩 돌았응게. 한 번 돌아서는 시원찮아서 한 번 더 보충헌다고 전국을 싹 돌았어. 근디 게중에는 내가 지어서 쓴 것도 있어. 맞춰갖고 넣어논 것도 있는디, 요새 술 맨들어서 광고한 것들 보면 그것을 그대로 따서 쓰더라고. 허허허. 뭔 술은 뭔 지역에서 났다고, 읍지 겉은 데서 흔적이 있으면 그렇게 썼거든. 근디 지금은 그것을 인용해가지고 신문에 나고 그려. 그러면 내가 보고 그러지, 아, 이건 내가 써놓은 것이구나. 좀 우습기도 해. 내가 복분자 역사도 잘 알어. 복분자를 시작헌 지는 한 5년 되는디, 백화점 나갈 때 세트로 내놓을라고 맨든 거지. 술 박물관에 전시헐라고 과일주 청주 이런 것도 맨들어봤지. 그러다 보니까 내가 지금은 인자 민속주 명인협회 회장도 연임허고, 그래서 작년부터 술 맨드는 것은 손을 띠었어. 나이가 칠십 아녀? 보기에는 젊어보여도. 글고 또 하나 에피소드가, 사람들이 다 내 이름이 ‘이강주’인 줄 알어. 전화 올 때도 이강주 씨 계시냐고 전화가 와. 우서 죽겄어. 내 이름 아는 사람 밸로 없어. 우체국 가서 위에다 이강주 쓰고 밑에다 조정형 쓰면 왜 이름을 두 개 쓰냐고 막 화를 내. 이강주는 상호인디 다 이름인 줄 알어. 당연히 내가 다 이씬 줄 알어. 사람들이 다 미친놈이라고 헝게 오기가 생기더라고 나도 내 이야기로 드라마를 찍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어. 천5백만 원 가지고 공장 지어서 직원들 둘이 데리고 일을 시작했으니 생각을 해봐. 그 당시에 한 6개월 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우리도 개업식이라고 했는디, 술이 나오니까 개업을 허긴 해야지. 술병 하나라도 개업은 개업 아니여? 그때 직원허고 나허고 개업기념 파티가 뭐였냐면 짜장면 한 그륵 먹는 거였어. 그때까지 짜장면 한 그륵을 한 먹었당게, 돈 애끼느라고. 그래가지고 그때 소주 두 병에다가 좌우간 만원을 쪼개서 행사를 했어. 글고 뒤에 산으로 올라가서 얼매나 울었능가 몰라. 참 고생 많이 했어. 그때는 솔직헌 얘기로 술을 헐라고 헌 것이 아니라 오기로 했어, 오기로. 사람들이 다 나를 미친놈이라고 헝게 오기가 생기더라고. 어느 날 봉게 내가 미친놈이 되야 부렀어. 이걸로 성공을 안 허면 진짜로 미친놈이 되게 생겼더라고. 민속주 연구헌다고 집 재산 다 날리고, 직장까지 그만둬 버렸응게 어차피 미친놈 바닥에 들어가부렀어. 그 당시에는 허다 허다 봉게 그렇게 되아부렀어. 말하자면 길에 가더라도 동창들이 나를 만나면 나를 피했다고. 눈치 보면 알 잖어? 혹시 내가 돈 빌려달라고 헐까봐. 형제간들도 아마 속으로는 내가 가면 피했을 것이여. 그래서 넘들헌테 손 안 벌리고 자립할려고 했지. 물론 운이 따라줬겄지만 지금은 그려, 나이는 먹었어도 내가 비행기 타고 가다가 떨어지더라도 나는 살아남을 것 같어. 모래 속에다 떨어쳐도 나는 살아나온다고 했어. 어려운 고비를 이기고 자리를 잡으니까 자신감이 생기더라고. 인자 무선 것이 없어. 그때부터는 내 스타일대로 했어. 공장 연 지 3년 정도 있다가 자리가 잽히더라고. 백화점에서 찾아와서 돈 주고 술을 가져간다니 나는 뭐 헐 일도 없었지. 원래가 술을 팔려면 30%는 영업비로 나가야 허는디 그 돈도 안 들어가지, 직원들도 안 쓰지, 그러니까 영업비 이외의 경비가 보통 50%는 들어가는디, 그것이 안 들어가고 대리점도 필요 없고 다 내게로 직접 들어오니까 어려울 것이 없었지. 가뜰이 직접 차 가지고 와서 가져강게 수송비도 안 들고, 술이 모지랭게 항상 통장에 돈 먼저 넣어주고. 하하하. 땅 짚고 헤엄치기지. 세상에 우서 죽겄더라고. 세상에 이런 것도 있었는가 하고. 백화점에서 그렇게 돈 먼저 갖다 주고 술을 가져간 디가 전국에 두 군데 있었다고 허드라고. 지금까지 역대 역사에 딱 두 사람이랴. 지금도 그때 습관이 있어서 통장으로 선금이 들어와요. 백화점 지점이 새로 생기면 계약허자고 연락이 오고. 본점이 20년 전부터 그렇게 해농게 짜잘헌 지점들도 다 그렇게 허는 줄 알고 연락이 와요. 술이란 술은 다 빚어봤어 이강주는 참 편허게 했지. 그 대신 내 제품에 관해서는 관리를 확실허게 했지. 도에 내논다거나 함부로 가격 같은 거 못 내리게 허고, 그러니까 가뜰도 안심허고 장사를 허지. 이강주가 하루아침에 맛을 낸 것이 아니고, 나가 보배소주 연구실에 있을 때 한 10년 동안 이강주만 연구를 했어. 수백 번을 했지. 갈고 닦고 갈고 닦고 했어. 실험실에서 헐 일이 없응게 책 씀서 수백 번을 헌 거여. 책을 맨들어 갖고 정리를 헐쯤에 제주도로 내려갔어. 제주도 한일소주 공장장 허면서 한 2년 있었어. 보배에서 직원 갖다가 연구시키고 전국을 돌아댕기다 걸렸어. 실험허는 것도 걸리고. 그러니까 미친 짓 헌다고 소문이 나서 사표를 낸 것이지. 그랬더니 한일소주 사장이 제주도로 오라고 허드라고. 여그 와서 연구도 허라고. 그래서 제주도로 싹 이사를 가버렸잖어. 이사 갔더니 사택도 지어주고 애들도 다 갈쳐준다고 허드라고. 그래서 잘 지내는데 그때가 85년도엔가 제주도로 갔는디 87년도에 문화재가 되었다고 연락이 왔어. 문화재가 되면 전주에 있어야 돈도 받고 그러지. 그래서 헐 수 없이 그것 때문에 전주로 왔어. 그때가 마흔야닯 살 땐가 그려. 나이로 봐서는 내가 제일 젊드라고. 그 문화재로 된 사건도 커. 왜냐면 아버지가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있었거등. 근디 나 보배 있을 때 전문위원으로 들어갔는디 그때는 중앙에서 심사를 했어. 3년 동안 심사를 했는디, 1차로 교수가 와서 허고 2차로 또 심사나옹게 아버지가 글안해도 미친 놈인디 무슨 술이 문화재가 되냐? 글면서 아버지가 반대를 해가지고 심사를 못 받게 했어. 나는 집이 셋방이라 큰집에서 심사를 받을라고 허는디 못 받게 허드라고. 아버지가 아들보고 미친놈이라고 허는디 교수가 심사를 허겄어? 그래가지고 문화재도 못 되고 속상해서 사표내고 제주도로 가버린 것이여. 그래서 제주도 가서 그동안 조사헌 술만 한 2백가지를 빚었어. 전부 내 돈 들여서 술을 맨들어봤어. 왜 그랬는가 몰르겄어. 그냥 심심허다고 했능가, 허허허. 지금도 박물관에 그 술 샘플이 다 있어. 술이란 술은 다 빚어봤어, 좌우간. 그 당시에는 도수 관리라는 것도 없었어. 찍어먹어 보고 쪼끔 독허면 35도요! 이랬응게. 그래서 다 빚어서 이 술이 몇 도짜리 술인가, 이것도 다 정리해놓고 그랬지. 지금은 그렇게 술 안 혀, 풍류를 즐기지 하여튼 그랬는디 87년도에 문화재가 되았다고 연락이 왔어. 그래서 중앙에 갔더니 이렇게 쓱 보더니 우리가 잘못 봤다고 혀. 왜 그냐? 문화재는 그 분이 돌아가실라고 헐 때 그것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지정을 허는 것인디, 나는 나이도 젊고 앞으로 한 20년은 더 헐 것 같응게 잘못 봤다고 혀. 원래 문화재라는 것이 도에서 중앙으로 올라가는 것이 정상인디, 아버지가 나를 떨어쳐부링게, 중앙에서 2년 있다가 내려와서 다시 심사를 헌거여. 그 당시에 전통술이라고 연구를 허는 사람이 나배끼 없었응게. 근디 왜 그렇게 술 문화재를 찾았냐? 88올림픽 때문이여. 문공부에서 정책을 기안해가지고 맨날 포도주로만 건배허지 말고 우리 전통술이 하나 있어야겄다, 해서 건배주로 헐라고 찾은 것이여. 근디 아부지가 반대를 허는 바람에 이것이 늦어졌지. 그래서 결국 88올림픽 때는 못 나갔어. 그렇게 해서 중앙에서 공문이 내려왔는데, 우리가 야를 문화재로 지정헐라고 허는디 하자가 있으면 말해라, 이렇게 공문이 내려왔어. 그렇게 해서 문화재가 되았어. 도에서 서둘러서 헌 것이 아니라. 도에서 이 사람 하자 있다는 소리는 못 허잖어? 그래서 문화재가 된 것이여. 그래서 내 드라마가 생긴 것이여. 원래 집안에서 협조해가지고 올라가야 허는디 나는 거꾸로 역경을 딛고 이렇게 됐다고 해서. 그 책([그 집에는 술이 있다],웅진출판) 내용이 집안간 아버지허고 갈등 쪽으로 써졌어. 집사람 고생허는 것허고. 그때까지가 진짜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 사실 이강주 허고부터는 별로 고생 안했어. 그 전에 힘들어서 약도 먹고 자살헐라고도 했고. 말도 말어. 돈이 없어서 고생헌 것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혔지. 지금도 우리 각시는 마음이 풀어지덜 안 혀. 여자들 앙금이 쉽게 풀어지덜 않더라고. 문화재가 되고 나서는 공부를 더 했지. 그 전에는 연구허는 것보담도 먹는 것을 더 좋아했어. 왜냐면 술공장 댕길 때는 여섯시에 퇴근허고 나면 꼭 자기가 맡은 술집을 가야 혀. 나는 어딜 맡았냐면 요정 두 간디를 맡았어. 긍게 맨날 술만 마셨지. 지금은 그렇게 술 안 혀. 그 대신 풍류를 즐기지. 도립국악원서 춤도 배우고 장구도 배우고 골프도 배우고 그렇게 살어. 술공장에서 집으로 퇴근허는 길에 학원을 다섯 간디를 들러. 그래야 퇴근을 혀. 나이 먹을수록 젊은 사람들허고 어울려야 정보도 듣고 사람이 안 늙어. 그래서 나가 젊게 보이능가벼. 허허. 인자 술공장은 다른 사람헌테 맡기고 인생을 즐겁게 살라고 혀. 허허. 조정형 연보 1941년  전주에서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남 1964년  전북대학교 졸업 후 삼학소주, 보배소주 공장장으로 20년 간 재직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속주 제조비법을 채록하여 제조함 1980년  주조사 1급 자격 취득 1987년  전북 지방 무형문화재 6호 지정 1989년  [다시 찾아야 할 우리 술] (서해문집) 발간 1990년  이강주 제조면허 취득 1991년  전주 제조장 가동 1994년  KBS 프로그램 <그 집에는 술이 있다> 4부작 방영 1996년  전통식품 제조명인 9호 인증 1997년  이강주 상표 등록 1999년  신지식 농업인 선정, 전통문화업소 지정 2001년  한국전통식품 선발대회 은상 수상 2002년  석탑산업훈장 수훈 2003년  [우리 땅에서 익은 우리 술](서해문집) 발간 2004년  (사)한국명인협회 회장 2006년  동남아시장 개척단 파견 2007년  방콕박람회 참가 2008년  해외수출을 위한 자동기계 도입 2009년 현재  술과 풍류를 즐기며 살고 있음 <사진  유백영 사진작가ㅣ 정리  김선경 문화저널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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