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 |
[숨 쉬는 미술이야기] 오백년 왕조의 개창자 그 분을 만나다
관리자(2009-02-06 12:06:47)
[숨 쉬는 미술이야기] 오백년 왕조의 개창자 그 분을 만나다
최효준 전북도립미술관장
완벽하게 안정적인 역동성.
그런 역설적인 조화가 어진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어진의 네 귀퉁이를 대각선으로 이으면 그 교차점은
옥대(玉帶)의 대구(帶鉤), 투각 옥판에서 만난다.
국립전주박물관의 미술실이 지난 달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다시 열렸다. 전북 지역과 관계있는 고미술의 특성을 불교미술, 도자기, 서화 그리고 왕실관련 미술 등 주제별로 나누어 엄선한 유물을 친절한 설명과 함께 펼쳐 보이는 전시가 상설되었다. 전북의 도민들이 새봄이 올 때까지 모두 한 번씩 내방하여 천오백년 이상 된 우리 지역 미술의 역사를 일별하고 선인들의 정신세계를 각자의 가슴에 담는 체험을 할 일이다. 그런데 선인들의 정신, 영성, 세계관, 감성, 미의식은 오늘의 그것과 너무 달라서 자칫하면 우리가 그것을 낯설어 하거나 오늘의 나의 삶과 무관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歷史)를 느껴 알고 깨달아 나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뿌리가 없거나 약해진 식물처럼 이 어렵고 복잡한 시대에 취약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게 되기 쉽다.
“우리의 것은 좋은 것이여.” 그러나 우리 것은 그저 좋은 것이라는 당위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엇이 왜 좋은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고 반응하여 진정으로 좋아하게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옛것과 오늘의 것의 ‘다름’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국립전주박물관의 전시로 돌아가자. 아주 작은 삼국시대의 불상과 판불(板佛)에 담긴 절대 무(無)의 세계, 청동 수반(水盤)의 정교한 은입사 장식이 표상하는 광대무변의 우주, 고려 청자의 은은한 비취색으로 드러나는 영원의 아름다움, 담백한 붓 선에 담겨진 서릿발 같은 조선의 선비 정신 등... 옛 미술품이 매개하여 우리와 소통을 기다리는 그러한 예술적 정수(精髓)에 우리 마음이 닿으려면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안으로 침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주석이 말한대로 ‘옛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사람의 마음으로 읽기’ 위함이다. 영화관이 어둡듯이, 박물관 실내가 좀 어둡고 정밀한 부분 조명으로 대상만을 비추는 것도 그런 내적 침잠과 집중을 돕기 위해서다. 답답함을 느끼지 말고, 집중해서, 안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서화 등 종이 전시물의 경우, 긴 시간의 밝은 빛이 유물에 손상을 주기 때문에 관람객이 감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조도를 유지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후손을 위하여 오늘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 많은 유물들 중 하나. 그간 우여 곡절 끝에 전주로 환안된 태조 어진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장경희 교수는 경기전과 태조 어진이 각종 병화에도 불구하고 현존하고 있는 것은 “조상의 은혜를 후손이 갚으려는 추원보본(追遠報本)의 마음이 하나의 간절한 촛불이 되어 현재까지도 꺼지지 않고 발현된 것이라 본다”라 하였다. 세계 왕조의 역사에 드물게 오백년간이나 이어진 조선(朝鮮) 왕조. 그 창업자 태조의 어진은 왕조 초기에 전국 6곳에 진전(眞殿)을 세워 모셔졌다. 현재 우리가 보는 어진은 1410년 최초 봉안되어 된 것을 1872년 모사하였고 근자에 보수하여 이번에 환안된 것으로 조선 초기 어진의 형태와 양식이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사진으로 볼 수 있는 영흥 진전에 봉안된 검은 수염과 마른 용안의 젊은 시절의 모습과는 달리 수염이 허옇게 센 노년의 태조(太祖)는,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어좌(御座)에 정면으로 앉아 있다. 곤룡포는 드물게 청색이고 가슴과 어깨에 원형 형태의 다섯 발톱 용무늬 보(補)가 있다. 이 어진은 권위적이고 화려하고 찬란한 한편 엄숙하고 단아하고 고요한 위엄에 차있어, ‘진면목(眞)을 그린다(寫)’고 ‘사진(寫眞)’이라 칭했던 조선 초상화의 원칙과, ‘임금의 혼과 그 영광을 그린다’는 어진 제작의 원칙을 드러내는 범본이 되었다 할만하다.
어진의 태조 전신은 마치 큰 바위와 같이 자리하고 있다. 원만함과 두루미침을 뜻하는 듯 어진의 상체는 원형을 이루고 하체는 안정된 사다리꼴을 이룬다(도판 참조). 모름지기 움직이는 생명체의 동력은 하체에서 나온다. 비례로 치자면 과장되게 넓은 이 하부는 그 중량감으로 무한한 안정감을 준다. 가장 안정된 각도로 벌려진 두 발로 지지된 이 든든한 옥체의 하반부가 오백년 왕조, 그 저력의 원천이 된 듯하다.
익선관의 뿔은 직상방향으로 하늘의 소리에 늘 열려있는 안테나와 같이 곧추 서 있다. 왕권을 상징하는 다섯 발톱의 용은 가슴과 어깨 보의 원형 안에, 그리고 어좌 상단과 하단을 장식하는 구획된 사각의 공간 안에 배치되어 있다. 원형과 사각형의 제각각의 공간을, 용틀임하는 몸통, 머리, 다섯 발톱의 네발, 비늘, 뿜는 불길과 구름 등의 요소가 완벽하게 안정되고도 역동적으로 채워 낸다.
완벽하게 안정적인 역동성. 그런 역설적인 조화가 어진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어진의 네 귀퉁이를 대각선으로 이으면 그 교차점은 옥대(玉帶)의 대구(帶鉤), 투각 옥판에서 만난다. ‘옥(玉)’은 임금의 모든 것의 수식어이고 임금을 상징한다(도판 참조). 이 대구(帶鉤)를 저점으로 하여 가슴 용보의 원형이 위엄 있게 자리하고 있고 그 호와 살짝 떨어져 양 어깨 용보의 원형이 감돌아 오르며 용보들의 역삼각을 이룬다. 역동적인 이들 용의 움직임은 원형 안에 오롯이 머물러 왕권의 역동적 안정성을 표상한다. 마치 어깨에서 솟아나온 듯한 어좌 상단의 용두 장식은 좌우로 각 한 쌍씩 뻗어 나가 개창된 신왕조의 왕권이 사방에 미침을 과시한다.
여기에 신선한 변화가 가미되었다. 하단부 좌우에 드러나는 곤룡포의 적색 안감과 단령(團領) 깃의 밝은 하늘색과 같은 하늘색 부분이 좌우 비대칭으로 포치되어 산뜻한 대비를 이룬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군왕의 넓고 고른 덕을 칭송하기 위한 완벽한 좌우대칭 구도<바람의 화원>”를 이루는 이 어진에서, 살짝 비대칭인 곤룡포의 주름과 함께 이 부분은, 위엄에 가득 찬 ‘군왕 그 자체’로서 보는 이를 숨 막히게 했던 이 어진에 일종의 숨통 역할을 해 준다.
색채의 대비를 보자. 곤룡포의 짙은 청색과 옥좌의 적색이 강한 대비를 이룬다. 용의 형상을 묘사하고 장식하기 위하여 두루 사용된 황금색은 어진을 어진이게 한다. 각각 하늘과 땅과 접하는 익선관의 뿔과 신발은 현묘(玄妙)한 검은 색이다. 용안을 에두른 상반부의 배경은 옅은 금색이다. 이것은 현실을 초월하는 천상(天上)의 색으로 태조는 조선왕조가 유지되는 한 신적(神的) 존재였음을 상기시킨다. 바닥 양탄자의 문양에는 사방으로 뻗는 도형과 팔방으로 뻗는 도형이 교차되는데, 임금의 통치권이 사통팔달 원활하게 미치기를 축원하는 듯한 이 부분과, 어좌의 등받이부분, 그리고 상부와 측부에 늘어뜨려져 어진을 장엄하는 풍대(風帶)와 유소(流蘇) 등 주변부의 색채와 장식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어 고귀한 단순성으로 숭엄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옥체 부분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태조 어진에서 옥좌의 등 부분, 앉는 부분, 하단의 수직 부분, 발받침 부분 등이 모두 원근감, 입체감 없이 모두 하나의 평면이다. 양탄자 바닥 부분도 원근감이나 입체적 공간감이 전혀 없는 평면 자체이다. 당시 사람들은 왜 이렇게 그렸던 것일까? 눈에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대상을 오히려 추상화(抽象化)하여 영원불변의 내재된 본질만을 포착하여 영구히 남기려 한 것이 바로 동양 회화의 정신이었다. 동양 뿐 아니라 고대의 서양(이집트)도 그랬다. 이것은 현실의 모습,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들이 그리고자 한 것은 보이는 현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을 초월하는 영원의 모습, 육신의 모습이 아니라 정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조선조 후대의 어진 등 초상화에는 서양 화법의 영향이 나타난다. 전시장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전시된 채용신의 초상화에는 얼굴과 의습 표현에 서양식 명암법이 전면적으로 사용되었다. 채용신의 고종 어진은 당시 출현한 사진의 영향을 보여준다. 태조 어진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서양식 화법과는 전혀 다른 투시법과 묘법이 당시를 지배하였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이다. 채용신의 고종 어진과 태조 어진의 이미지를 나란히 두고 비교하여 보자(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가 드러나지 않는가? 서양 함대의 무력시위 앞에서 그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온 변화는 우리에게 바람직한 결말을 가져다 주었는가?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정자(程子)는 말했다. “터럭 한 올이라도 닮지 않으면 초상화가 아니다.” 그 말을 문자 그대로 시현한 것은 중국도 일본도 아닌 조선의 초상화가들이었다. 조선 초상화 안면에 나타난 병색, 증세, 특징 등을 분석하여 주인공의 병력을 추정해낸 내용을 모아 현직 의사가 한권의 저술을 낼 정도로 조선의 초상화는 사실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양만을 닮게 그린 것이 아니었다. 내면, 그 정신을 닮게 그리려 했고 얼굴을 그리는 것으로 ‘얼의 꼴’을 그리려 했다. 태조 어진에서도 양식화, 추상화시키지 않은 유일한 부분이 바로 용안(龍顔)의 묘사이다. 배채법(背彩法: 비단 뒷면에 채색하여 반대편에 배어나오게 하는 초상화 기법)을 써서 사실성을 두드러지게 하되, 짙은 선을 쓰지 않아 존재의 초현실성을 가미한다. 큰 귀와 작은 눈이 대조적인데, 날카로운 눈매와 앙다문 얇은 입술은 강인함과 냉엄함과 견인불발의 성정(性情)을 드러낸다.
오주석의 ‘옛 그림 보는 법’을 참고로 우리가 ‘어떻게’ 옛 미술품과 마주할 것인가를 정리해 본다. 먼저 어디서?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개방되어 우리가 귀한 옛 미술을 쉽게 대할 수 있는 곳, 바로 박물관에서다. 박물관은 우리가 자주 가서 사색하고, 공부하고, 쉬고, 대화하고, 데이트 할 수 있는 곳이다. 거기서 좋은 작품을 많이, 자주, 자세히, 시간을 두고, 작품의 됨됨이를 생각하면서 뜯어보되, 지나간 역사를 느끼며 선인들의 눈길을 느끼며 그이들의 마음자리에 동석하며 종국에 작품을 만든 한 인격체와 그리고 작품으로 표현된 대상과 만나는 것이다.
태조 어진이 예사 초상화인가? 경기전(慶基殿)이 이 어진 하나를 위해서 만들어졌고 유지되어 왔으며 이 어진 하나가 수 많은 전란을 피해 옮겨지고 지켜져 오늘에 이르렀다. 2005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이 어진을 주제를 <왕의 초상>이라는 전시를 개최했고 340쪽에 이르는 훌륭한 도록을 발간했다(이 도록을 자료실에서 열람할 수 있다). 모두 박물관으로 가자. 이제 우리는 태조 어진을 통하여 오백년 왕조의 개창자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조선조의 역사와 다시 만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