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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 |
[신귀백 영화엿보기] 레오네가 던지는 매혹, 매혹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
관리자(2009-02-06 12:06:06)
[신귀백 영화엿보기] 레오네가 던지는 매혹, 매혹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이리 축구를 좋아하지만 안 좋은 척하고, 말 타고 총질하는 무숙자가 폼이 났지만 그를 우습게보던 날들이 있었다. 먹을 만 한 데도 일부러 햄버거나 피자를 싫어한 것처럼. 그 때, 멋진 양식 <대부>가 우아한 폭력의 상차림이었다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사실 매우 분절적 느낌으로 다가왔다. 당시 이리극장에서 보던 갱스터 무비의 걸작이라는 극장판은 충격은 있었지만 도무지 이야기가 이어지질 않았다. 229분짜리를 90분 가량이나 잘라대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 다행히 노인이 되기 전 2008년 12월, 「세르지오 레오네 컬렉션」시네마떼끄 순회상영전을 여는 송천동 프리머스에서 감독 공인판 영화를 필름으로 볼 수 있었다. 물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세 편의 서부영화들도 함께.   세르지오 레오네! <무숙자>나 만드는 감독의 이름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2류에게 간절한 것은 돈 대주는 제작자 일 것. 스파게티 웨스턴이란 경멸어린 B급 서부영화나 만들던 레오네는 '싼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통해 윈윈 할 수 있었다. 서부라는 시공간의 과감한 조작을 통한 신화 만들기 그리고 미국에 대한 혐오와 동경을 제대로 담을 줄 아는 레오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마리오 푸조의 최고 시나리오인 <대부>의 연출의뢰가 그것. 그러나 그는 이 제안을 가볍게 거부한다. 바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만들기 위해. 결국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매혹적으로 연결하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서사의 매혹을 위한 장치들 시대극 영화의 특징이라면 서사 그리고 시간의 압축이다. 자본주의 대빵으로 성장한 미국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이 불량한 나라의 사회경제사적으로 더럽고 우울한 시절을 레오네의 남자들은 탐욕과 야수성으로 버텨간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남성이데올로기로 점철되어 있어 여성들이 맘 놓고 보기에는 좀 그렇다. 페미니스트적 혐오감을 가진 사람은 보지 않아도 좋지만, 보자. 갱스터 영화의 중심 모티브는 당연히 돈과 권력일 것. 아메리카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당연히 모든 자본주의에 대한 은유 아니겠는가. 미국의 어두운 역사를 말하는 그 시작은 총격 신으로, 불한당이 침입하고 여자 가슴에 총알이 박힌다. 죽어간다. 이렇게 사람을 죽여 대는 시대라면 배경으로서의 설정숏이 필요 없을 것이다. 경제대공황으로 신음하던 금주법 시절일 테니. 브룩클린을 배회하는 다섯 명의 소년이 범죄자로 커가는 과정이 지독하게 울려대던 전화벨을 매개로 펼쳐지는데. 젊은 날 턱선이 살아있는 로버트 드니로의 연민을 자아내는 근육과 시선이 연기가 되는 주인공 누들스의 내면의식을 따라가려면, 서부극은 잠깐 잊어야 할 것이다. 지루한 편년체를 지양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플레시백'이다. 소년과 청년과 노년이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니 정신 바짝 차리면 영화적 시간을 조작하는 감독의 능수능란을 읽고, 잠깐 화장실 다녀오면 줄거리를 놓칠 수 있다. 영화가 시간을 건너뛰는데 탁월한 텍스트라는 것을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는 너무 잘 알기에 그는 건너뜀과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소도구들을 활용한다. 35년 전 누들스의 회상의 매개체로 등불을 통한 빛과 빛의 연결, 기차역을 지키는 늙은 승무원과 젊은 매표원의 변화 그리고 역사(驛舍)의 문구 '코니아일랜드로 오세요' 등의 자잘한 소품이 그것. 떠날 수밖에 없는 그 기차역이 그들의 고향일 테니. 오묘한 플롯 라인을 음미하는 젊은 영화학도들은 꿈과 기억 그리고 복잡한 시제를 그려대는 플레시백, 플레시포워드를 가려낸다면 마치 영화 교과서를 발견한 듯 무릎을 칠 것이다. 귀여운 매혹 뉴욕 빈민가의 식당, 어린 좀도둑 누들스가 화장실로 들어가 벽돌 하나를 조심스레 빼낸다. 벽 너머의 공간에서는 소녀가 발레 연습을 하고 있다. 아! 매혹의 그 소녀는 바로 데보라(70년생 제니퍼 코넬리, 최근 <지구가 멈추는 날>에 출연했는데, 아니다, 아니다)! 그녀와는 끝없이 엇갈리기만 하고 소년은 살인범이 되어 교도소에 가고 세월은 흐른다.   어린 창녀의 환심을 사기위해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찾아간 누들스의 친구‘짝눈’이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계단참에서 그 단것을 핥다가 결국은 여자는 안지도 못하고 다 먹어치우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래, 인생은 여자를 기다리다 먹어버리는 아이스크림 같은 것. 휘파람 불며 브룩클린 다리 밑을 걷던 소년들 중 하나가 총에 맞고서 ‘나 미끄러진 거야’라던 대사 역시 작은 매혹. 보석상을 턴 맥스 일당이 훗날 강간한 안주인과 재회하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아랫도리로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장면 등은 레오네가 만든 귀여움이다. 어찌 잊겠나. 갱영화의 미학은 주인공의 과단성 있는 행동에 따른 멋진 총질의 영웅담과 영웅을 따르는 미인에 있을 것.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모순을 이야기하기에는 한도가 있어서 결국 영웅의 죽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 그 패턴이다. 사회적 악에 대한 미화로 갈 수는 없으니 반드시 실패해야 하는 것이 미국영화의 숙명인 것. 경찰 혹은 다른 조직으로부터 쫓기는 갱들의 강박감을 표현하는 전화벨 소리는 관객의 신경을 후벼 팔 정도로 길게 울린다. 중국 사람이 운영하는 아편방에서 물담배에 취해 웃는 모습은 아우라 그 자체고 가장 매력적인 장면 아닐까. 노조 뒤를 봐주며 돈을 뜯는 그들에게는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것. 더러운 양아치와 깡패와 더 이상 놀지 않는 맥스는 사라지고 누들스는 친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35년을 떠돌다, 조우한다. 시선, 엇갈림, 플룻 소리 이 영화, 시선이 이야기를 대신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전화 내용은 설명되지 않지만 배우의 눈과 풍경이 말을 하고, 가방 속 물건은 보여주지 않지만 그 얼굴이 내용물을 이야기한다. 카메라를 거꾸로 잡아낸 누운 자의 시선과 어린 처녀애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 등 결국 시선의 영화다. 당연히 로버트 드니로가 바라보는 시선 하나하나는 풍경을 만들어내는 힘을 갖는다. 대화하는 두 인물의 상반신을 번갈아 가며 찍는 리버스 앵글숏 장면은 긴장감을 자아내고 대사로 전달되지 않는 생각을 눈빛으로 담아내는 배우들은 위대하다. 레오네가 배치한 원경, 중경, 근경의 와이드 스크린은 뉴욕 뒷골목 도시미학의 공간감을 깊게 하는데, 배경신과 거리신은 넓고 곧바로 인물의 클로즈업으로 다가서는 수법은 그가 만들어내던 서부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신생아실에서 아이들을 함부로 바꾸어대는 장면은 비극성 속에서 유머를 잃지 않으려는 감독의 몸짓일 것. 지금의 미국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나라라는 의미는 아닐는지? 후반부 역겨운 자동차 강간 신 끝에 데보라와 누들스는 각자 갈 길을 간다. 인생은 뭐든지 잘 안되는 것이기에…. 교황이 앉던 의자를 구입하는 맥스에게 누들스가 묻는다. '교황의자? 그걸로 뭘 하게?', '앉아 있잖아.' 그들의 젊음과 힘 역시 무력으로 단죄되리라는 것을 영리한 맥스는 잘 알기에. 둘도 없는 친구였던 누들스와 맥스, 그리고 연인인 데보라를 통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배신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는 것은 애절한 음악이다. 레오네가 만드는 화면의 긴장은 엔리오 모리코네의 부드러운 음악으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그 때는 비장미로 느껴졌는데, 오늘 듣는 그의 음악은 노스탤지어 그 자체다. 당시 게오르그 장피르의 팬플룻 선율은 매혹으로 가슴을 저미었지만, 24년 후 다시 보는 오늘은 아무래도 과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독이 사용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면, 음악을 좀 줄였으면 훨 나았을 텐데 말이다. 차라리 뒤에 나오는 비틀즈가 부른 풋풋한  ‘에스터데이’가 귀에 더 잘 걸린다. 사족, 레오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 로버트 드니로가 원래 1류였다면 사실 궐련물고 장총이나 갈겨대던 시절의 이스트우드는 2류였다. 둘 다 선천적으로 포스를 타고난 배우였지만 나는 이스트우드가 싹수있는 예술가란 것을 몰랐다. 억센 티 풀풀 나지만 이 사나이가 배포 있는 남자로 성장해 거장의 반열에 오를 것을 세르지오 레오네는 과연 짐작이나 했을까? 둘 다 뭣같이 일해서 정승의 반열에 오른 그의 영화들이 이제는 다 좋게 느껴진다. 은둔이 어울릴 얼굴을 가진 감독으로 말년의 빛을 보여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좋다. 레오네 역시 말할 것 없고.   한 작가가 네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해야 할 '꺼리'와 이유가 있다면 그 역사를 담은 스토리텔링이 풍부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음, 누군가 말해 달라. 『옛날 옛적 남한에서』 라는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그런 캐릭터를 형성하기에 너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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