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 |
[이흥재의 마을이야기 ]불교의 미륵, 기독교의 메시아
관리자(2009-02-06 12:05:36)
[이흥재의 마을이야기 │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용화동]
불교의 미륵, 기독교의 메시아
금산사 입구 삼거리에 있는 마을
용화동(龍簧)의 용화는, 미륵이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 7천만년 후에 용화수(龍華樹) 아래 내려와 3번 설법을 해서, 중생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구제한다는 용화수에서 유래했다. 즉 용화동은 미륵이 구현하는 이상세계라 할 수 있다. 미륵의 마이트레아(Maitreya)와 기독교의 메시아(Messiah)가 어근(語根)이 같다고 한다. 즉 불교의 미륵은 기독교의 메시아라 할 수 있는데, 용화동에는 후천개벽의 주역인 미륵의 증산교 계통의 종파와 일제강점기 메시아의 강림처인 금산교회가 있다.
금산리는 모든 종교가 모여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중심인 천4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금산사가 있고, 신흥종교의 대명사격인 증산교 본부가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백여 년 전 이곳에 금산교회가 생겼다. 금산리 용화마을은 불교·기독교·증산교 등 여러 종교단체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공존하고 있다.
금산교회
금산교회는 1907년 짓기 시작하여 1908년 완공하여 지금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1893년 6월 전주 서문교회를 창립한 테이트 선교사(Lewis B·Tate)가 1905년 금산교회를 세운다.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 예수병원 창시자인 잉골드(Ingold) 여사와 결혼하고, 전라도 일원에 50여개의 교회를 창립한 분이다. 테이트 선교사는 말을 타고 전주에서 정읍을 왕래하면서 그 중간지점인 금산리에 머물렀다. 그는 금산리에 머물 때 조덕삼이라는 이 고장 제일가는 부자집 마방(馬房)에서 하룻밤을 묵곤 했다. 그래서 테이트 선교사와 조덕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 인연이 커져 오늘날 금산교회가 되었다.
조덕삼은 이 일대 가장 큰 지주이고 금광을 하는 큰 부자였다. 원래 조덕삼 선대는 평양의 거상이었는데 그의 아버지 조종인이 이곳 김제로 금광을 찾아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조덕삼이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금산교회의 시작에 빼놓을 수 없는 또 한명의 주인공이 있다. 일제 강점기때 조선야소교 장로회 총회장을 3번이나 지낸 이자익 목사이다. 이자익 목사는 당시 조덕삼의 집에서 마부(馬夫)로 있던 하인이었다. 경남 남해가 고향인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호구지책으로 걸어서 전라도 김제땅까지 와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주인을 따라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된 이자익은 얼마 후 이백여 명이 넘는 교회가 되자 주인인 조덕삼을 제치고 투표에 의해 장로로 선출이 된다. 집에서는 하인인 이자익이 교회에서는 주인인 조덕삼에게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그 뒤 조덕삼은 총명한 이자익 청년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보내 목사가 되게 했고, 조선기독교를 이끌어 가는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하는 큰 인물이 되게 했다.
금산사와 증산교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 어떻게 다른 곳 보다도 먼저 개신교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조선말 일제강점기에 김제 일대는 사금을 캐러 오는 골드러쉬(gold rush)가 일어난다. 김제(金堤), 금구(金構), 금산(金山) 모두 쇠금(金)자가 들어가는 사금 주산지 중 하나였다. 그래서 금을 캐러 많은 외지 사람이 몰려들었고, 이 사람들은 몇 대를 이 지역에 뿌리박고 살아온 토착인들에 비해 개방적이고, 새로운 사상에 대한 호기심이나 받아들이는 흡인력이 강했을 것이다. 조덕삼도 금을 캐러 평양에서 이주해 온 분이고 이자익 또한 일거리를 찾아 먹을거리가 풍부한 전라도로 이주해온 사람이다. 그 당시에는 기득권 세력이 아니었다. 개화가 되었다지만 기득권을 가진 토박이들이 쉽게 새로운 사상에 경도 되겠는가?
금산교회는 ㄱ자형 예배당이다.
한쪽은 남자석, 다른 한쪽은 여자석이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인 시대라 남·녀가 함께 앉을 수가 없게 했고, 남자석과 여자석 사이에 심지어 목사님과 여자석 앞에도 커튼을 쳐서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상량문도 남자석은 한자로 여자석은 한글로 씌여 있는 전형적인 목조건축이다. 출입구도 남쪽과 동쪽에 따로 있고, 자연스럽게 휘어진 대들보가 내부구조를 이루며 전형적인 구조적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금산 교회 예배당은 그 시대를 담아낸 그릇이다.
증산교 본부 - 용화도장
용화동에는 증산교 본부인 용화도장이 있다.
증산교를 창시한 증산 강일순의 제자중 하나인 차천자가 보천교를 창시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에는 보천교가 매우 성행하여 신도가 6백만에서 7백만명이 되었다고, 정구익 용화도장 종령은 열변을 토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2천만명 내외였다고 하니 교세를 짐작할 만하다. 안중근 의사도 증산교인이었고, 신익희 선생도 또한 같은 교인이었단다.
차천자의 제자였던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증산교의 맥을 이어왔고, 경전인 대순경전(大巡經典)을 편찬했으며, 이곳 용화동에 증산교 본부를 세웠다. 77세의 이기언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따라 9살 때 경남 함양에서 증산교를 믿으러 와서 지금껏 살고 있다. 증산교 본부 앞에 간판만 걸려있는 금산여관이 있다. 84세 김홍원, 78세 김경순 부부는 경북 상주에서 증산교를 믿으러 이곳에 온지 23년이 되었고, 이 종교를 믿은지는 50여년이 되었다 한다. 이렇게 이 마을에는 외지에서 후천개벽을 보러 이주해온 사람이나 메시아의 강림을 믿고 온 사람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다.
통천궁(通天宮) 즉 하늘로 통하는 궁전이라는 본당을 지닌 용화도장은 이제는 7백~ 8백여명의 신도이지만 실제로는 백여명 남짓한 교세를 지니고 있다. 그것도 거의 노인들이다. 쇠락해 가는 건물과 종령의 모습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외에도 순천도(順天道)라든가 본주성지(本主聖地) 인정도덕원 등의 간판을 내건 여러 종교단체가 있는데 거의 일반주택의 형태이다. 금산리 291-1번지 문패에는 손안수, 구필여, 손재선, 김현희 네명의 이름이 써 있다. 아마 부모님과 자식 내외 이름이 함께 씌여진 것 같다. 뜰안 빨래줄에 널어진 빨래 마냥 가지런하다.
대로변 양철 빈집문짝에 “내옥이 바보 김태”라고 붉은색 스프레이가 뿌려져 있다. 왠지 시선이 가며, 과연 누가 바보일까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