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 |
[김규남의 전라도 푸진사투리]‘귀부레기’, ‘도사리’ 그리고 다시 ‘모지랑빗지락’
관리자(2009-02-06 12:04:19)
[김규남의 전라도 푸진사투리]
‘귀부레기’, ‘도사리’ 그리고 다시 ‘모지랑빗지락’
“시루떡 띠고 남은 것, 똥그람허니 귀난 것 그게 귀부레기여”
“모를 싱궈 노먼 그 옆으가 풀이 나. 모나 풀이나 아조 소박혀. 그러먼 인자 도사리를 짓고 논을 매야.”
“응! 도사리가 풀여. 풀은 다 도사리여. 근게 도사리를 품어서나 땅이다 묻고 묻고 허먼 그 놈이 썩으먼 논을 메고 밟고 그러지.”
조사가 끝난 후에 사전을 찾아보니 귀부레기와 도사리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귀부레기 [명사] 시루떡에서 베어 내고 남은 가의 부분
도 사 리 [명사] 못자리에 난 어린 잡풀
[명사] [북한어] 이른 봄에 밭에서 겨울을 난 묵은 뿌리에서 자라난 채소.
[명사] 저절로 떨어진 풋열매
[명사] 남의 집에 경세를 받고 사는 사람
시루떡을 만들어 먹거나 못자리를 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서 그렇겠지만 나는 귀부레기라는 말과 도사리라는 말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말이 정규 학교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신 82세의 할머니한테서 처음 들은 것이며 그 설명과 똑같은 내용이 사전에 버젓이 등재되어 있는데 또한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발음도 설명도 모두 아주 정확하게 사전과 일치하는 것이니 아마도 이 말은 과거 우리 조상님들이 두루 써왔던 말인 듯하다.
꼭 이런 방식으로 나를 놀라게 만든 또 다른 어휘는 ‘모지랑빗지락’이었다. 이번 조사를 하면서 나는 “다 닳은 빗지락을 모지랑빗지락이라고 혔거든”이란 설명을 들으면서는 지난 번 원고 ‘달챙이’와 ‘모지랑숟가락’이 생각나 귀가 번쩍 뜨였다. ‘달챙이’ 때문에 ‘모지랑숟가락’이 매우 생소했던 내게 ‘모지랑빗지락’은 깜짝 놀랄 어휘임에 틀림없었다. 이쯤 되면 ‘모지랑’이란 어근이 합성어 형성에서 생산성을 가질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며 ‘숟가락’이나 ‘비’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오래도록 사용하여 닳아질 때까지 쓸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단어를 추측해 보았다. ‘모지랑비, 모지랑붓, 모지랑호미’ 그리고 혹시나 하고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모지랑갈퀴, 모지랑낫, 모지랑붓, 모지랑수염, 모지랑숟가락, 모지랑호미’ 등이 주루루 나타났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오래 써서 끝이 닳아 떨어진 물건’을 통칭하여 ‘모지랑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모지랑’은 지난번 설명처럼 ‘모지라지다’ 즉 ‘물건의 끝이 닳아서 없어지다’를 뿌리로 하는 단어로 뒤에 그런 성질을 띠는 어떤 물건과 더불어 단어를 생산하는 데 참여하는 단어이다. 마치 ‘꼬부라지다’가 뒤에 ‘할머니, 길’ 등과 어울릴 때 '꼬부랑할머니’, ‘꼬부랑길’처럼 단어를 형성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그 ‘모지랑’에 ‘숟가락’이 붙으면 응당 ‘모지랑숟가락’이 될 것인데 우리 지역에서는 그 자리에 ‘달챙이’라고 하는 다른 방식의 어휘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말, 우리의 삶과 정신이 반영되어 있는, 우리 문화의 근본인 우리말, 그것은 꼭 이런 방식으로, 삶을 공들여 살아온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과 정신의 바탕이 고스란히 깔려 있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작은 사건이었으며, 아프리카의 노인 한 사람이 생을 마감할 때마다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 같다는 어느 인류학자의 고백이 가슴에 와 닿았다.
<김규남 전주대 한국어문화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