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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 |
[박물관대학 │ 한일 양국의 미인화] 여인의 아름다움
관리자(2009-02-06 11:54:02)
[박물관대학 │ 한일 양국의 미인화] 여인의 아름다움 이미림  성결대 교수 여성을 테마로 한 ‘~미인화’장르는 오로지 동양회화에만 나타나며, 여성의 풍속묘사를 주안점으로 그 시대의 취향이 반영된 의상이나 헤어스타일로 치장한 여성들이 憺像 혹은 群像으로 野外나 邸宅內, 그리고 궁정이나 遊廓(도시 속의 궁정) 등을 무대로 그려졌다. 이후 미인화는 하나의 장르로 성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 강의의 테마인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고찰할 경우, 우선 중국의 영향관계 하에 나타난 근세기 한일 양국의 美人畵가 어떻게 제작되어, 지금까지 한일 양국의 이미지 역사 안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비교고찰이 요구된다. 유교적 민본주의에 입각하여 제작된 조선의 풍속화(無逸圖, 風圖혹은    風七月圖)와, 현세 부정적 ‘우키요(憂世:허무한 현세를 의미하는 불교용어)’에서 향락적 측면의 ‘우키요(浮世:허무한 현세를 뜬 구름처럼 향락적의미를 지님)’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제작된 일본 풍속화와는 상이점이 있다. 즉 양국의 풍속화의 제작목적이나 동기의 상이점이 곧바로 미인화의 상이점으로 이어진다고 보여 진다. 이와 더불어 17세기 이후 한·일 양국에서 그려진 초기풍속화나 미인풍속화에 나타난 인상 깊은 이미지가 이후 단독 미인화의 자태·동작의 姿型(=정형화)으로서 답습되어지는 계기와 성립과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시기에 이르러, 중국을 비롯한 한일 양국의 妓女(혹은 遊女)상이 그 시대의 주요한 여성상을 점한다고 하는 동아시아 삼국의 근세문화 혹은 세계 여성 이미지역사 가운데에서도 보기 드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8세기를 전후로 한일 양국의 미인화는 명·청기에 建安, 金陵, 武林, 蘇州 등을 중심으로 제작된 희곡이나 통속소설 등의 삽화가 유입되어 각국의 화단에 다소간의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본의 경우는 에도시대 ‘관분  文’期間(  文年間:1661-1673)을 중심으로 활발히 제작되고 다양한 양식적 전개를 거듭한 ‘관분기   文期’의 미인도를 들 수 있다. 한국의 경우는 신윤복을 비롯한 주변작가에 의해 제작된 조선후기 미인상이 있다. 본 강의에서는 한일 양국의 근세기 역사상 예술표현의 주요한 테마로 부각된 미인화를 비교 고찰함과 동시에 18세기를 전후로 제작된 중국의 희곡판화나 통속소설의 삽화등과 비교한다. 이와 더불어 18세기 양국에서 시도된 미인풍속화·미인화의 자국화 즉, 朝鮮化와 와요화 현상에 대한 고찰도 시도해 본다. 양국의 사회적 상황 일본 회화사에 있어서 여성의 單身像을 그린 작품은 한국과 비교해보면 유난히 많은 편이다. 우선 근세초기 풍속화에서 ‘우키요에’에 이르기까지의 16세기부터 19세기의 전개 상황을 살펴보면 여성을 모델로 유나(湯女)나 유녀(遊女) 무기(舞妓) 등 당세의 풍속을 표현 것에서부터 헤이안(平安)시대 장편소설『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나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에 등장하는 인물로 패러디 한 것, 그리고 양귀비를 비롯한 중국 당(唐)대 미인을 그린 것 등 실로 다채로운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경향을 같은 시기의 조선후기와 비교해 보면 커다란 격차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즉, 단신상이든 군상이든 여성을 테마로 한 작품은 조선시대에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여성을 테마로 하는 경우, 권계적인 의도를 지닌 인물화나, 궁정이나 귀족생활의 경가(慶嘉)를 위한 연회도로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일본회화사에서 《源氏物語繪卷》를 비롯한 세속화는 물론이지만, 예를 들어 법화경 신앙의  유행 속에서 제작된 <普賢十羅刹女圖>등의 불화에 이르기까지, 당세풍속으로 치장한 여성상을 그리는 것은 오히려 중요한 전통의 하나였다. 따라서 일본 화가들은 당세 풍속으로 치장한 여성상의 묘사를 통해 그 시대의 미의식이나 가치관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질은 ‘야마토카이(大和繪)’가 성립된 헤이안(平安) 시대부터 발견되며, 수묵화의 전성시기이던 중세에 이르러는 약간 저조하였지만, 전란(戰亂)이 진정되고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맞이하고 부터는 더욱더 성행하게 된다. 한일 양국의 근세사회가 주자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는 점은 공통사항이다. 그러나 미인화 평가에 관해서는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에도시대의 일본과 조선시대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 즉 에도시대에는 ‘우키요’ 화가(繪師)들이 미인화를 비롯한 풍속화를 제작한다는 것은‘太平の恩澤溢れ、餘慶を蒙るの幸ならん’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 이었다. “恩澤(은택)”과 “餘慶(여경)”이라면서, 당세 풍속을 그리는 일에 專念한 ‘우키요’ 화가들이 자신들의 작화활동을 “太平”시대의 정치가의 덕택으로 파악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에서는 당세의 풍속을 묘사하는 것에 대해‘唐の繪容ならず、倭國の宮殿  閣山水人物に至るまで移しなすのは日本畵なり’라며 강한 자부심도 느끼고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또한 중국화와는 이질적인 일본회화의 독자성 주장에 대한 확신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당세의 풍속을 표현하던 ‘우키요’ 화가들의 경우, 자신들이야말로 일본회화의 전통을 잇는 존재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야마토카이’에 대한 자부나 주장은 일본회화사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긴 화가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통주저음(通奏低音)’과 같은 사항이었고, 에도시대 초기에 『本朝畵史』를 편찬한 ‘가노’파(狩野派) 화가들도 이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가노’파 화가들이 규범으로서 여기던 무로마치시대의 ‘셋슈(雪舟)’에게도 이러한 의식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가라에(唐繪)’를 규범으로 의식하면서도 ‘야마도에’와 명확한 구별을 짓고 있던 ‘헤이안’조(平安朝)의 귀족들에게도 이와 같은 자부심과 주장은 확실히 존재했다. 여하튼 일본 근세사회에서 풍속화와 미인화를 제작한 화가들은 어떤 이국적 의상이나 기발한 자태의 여성상을 묘사함에 있어 그것은 자국의 회화전통의 계승이자 갱신이었으며, 이를 결코 전통으로부터 일탈이나 배치(背馳)로 여기지는 않았다.   이와 비교하여 조선후기의 화원화가를 비롯한 풍속화나 미인화를 남긴 화가들은 당세 풍속이나 여성을 그릴 때 자신들의 제작에 대해 자국의 회화전통의 계승이나 갱신이라고 자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왕조시대에 빈번히 그려져 풍속화 발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빈풍도》, 《무일도》, 《경직도》등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양식이었으며, 문헌상으로 보면 《빈풍칠월도》등은 조선왕조시대에 궁중에서 제작되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중국에서 직접 그림을 받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점은 일본과는 다른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같은 풍속화와 미인화라 해도 제작을 에워싼 일본과 조선의 정치·사회적 조건과 배경에는 많은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제작된 풍속화의 성립 조건이나 배경에 있어 일본화가와 같은 전통의 계승이라는 자부심이나 긍지는 적었다 하더라도, 풍속화나 미인화 등의 화면에 표현된 풍부한 표현력과 근대적 의의는 명백히 발휘되고 있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풍속화로의 전환과정에서 중기 풍속화의 기록적인 성격과 감계(鑑戒)나 정교(政敎)의 목적성은 차츰 보다 순수한 성격을 표방한 순수 풍속화로 발전하게 된다. 실제로 조선후기의 풍속화나 미인화의 경우는 사실주의 학풍에 따른 자국적 개성 표현과 주체적 자기인식 등이 엿보인다. 이는 조선 중화(中華)를 표방한 일종의 문화자존의식에 대한 고취의 산물로, 중국풍의 묘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증거이다. 조선후기 당시의 시대적 개성을 중시하는 한편, 의관풍물과 일상적인 풍속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던 寫實的 문예정신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일례로 김창협이『농암집』에서 ‘지금 사람은 그대로 지금 사람일 뿐’이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지금(今)’으로 표상되는 현실 중시의 조선적 시문론과, 특히 그림과 관련지어 ‘고인사법(古人死法)’의 답습보다는 ‘지금 화가의 가슴 속에 있는 견해를 드러냄’등의 기술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모습(今樣)”을 묘사함이 주안점으로 대두되던 시기였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이르러 당시의 예술 ‘今藝’는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진경산수화와 풍경화가 일시적으로 융성하게 된다. 작화태도에 있어서도 중국 화본을 본떠서 화면을 구성한 그림인 ‘以畵傳畵’보다는, 사물의 참모습을 직접 묘사하는 ‘卽物寫眞’이 일시적이나마 적극적으로 추구되었다. 에도시대 후기 일본회화사 문맥을 개재(介在)시켜 조선후기 풍속화와 미인화에 대해 고찰해보면, 조선후기에 당세풍속을 화면에 옮기는 시대상황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를 역사적으로 정통적 존재로 인식하고 의의를 부여하는 회화전통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조선후기 화가들이 자신들의 임무로서 올바르게 계승해야 마땅한 문예 전통은 조선의 경물이나 당세의 풍속을 화폭에 담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풍속화를 에워싼 이러한 문제점의 상이는 표현양식이나 묘사내용에 모두와 관계가 있다. 환언하자면, 김홍도를 비롯한 조선후기의 궁중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화가의 풍속화 제작은  상반된 입장에 위치하던 문인화가나 무명 화가와는 달리 한층 더 조선사회의 전통적 관념이나 임무에 충실해야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우키요에미인화와 거울 浮世繪는 목판화가 주 형식인 複製藝術로서 원작의 유일성 측면을 간직하고 있는 기존의 예술, 말하자면 肉筆畵(本畵)보다 가치가 적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다색판화, 즉 錦繪가 발명된 1765년 이후, 기존의 지배적인 예술매체인 육필화가 지닌 매체적 특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점차 무의미해지면서, 레이디 메이드ready-made인쇄물 즉, 우키요에 판화는 중요한 미술의 요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錦繪 발명이후의 일어난 표현방식의 변화로 浮世繪의 개념은 단순히 재현의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점차 복제reproduction 영역으로 확장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기존의 회화적인 방법과 대립되는 錦繪가 복제라는 매체로 大衆에게 어필하기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야한다는 것이 필연조건이다. 이에 우키요에 화가들이 정면으로 맞선 것은 그들이 현재 살고 있는 세계와 사람, 특히 여성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변화하는 기술수준, 다시 말해 새로운 예술형식을 통해서만 자유롭게 획득할 수 있는 효과를 생산하는데 고심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거울이다. 거울은 에도시대 중기이후 그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충실한 회화적 재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갔다. 대표적인 浮世繪미인화가인 鈴木春信, 喜多川歌磨, 歌川國貞 등은 거울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대중들이 바라는 실재현실의 박진감, 진실감등을 제공하였으며, 거울이라는 매체를 활용한 새로운 경향의 작품제작을 시도하였다. 본 강의에서는 이들 3인의 浮世繪화가가 거울을 매개로 자신의 작품 안에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였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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