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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 |
[명인명장]내가 살아온 세상
관리자(2009-01-13 12:11:21)
폐백음식 장인  김다복 “재료부텀 정성이 들어가야 제대로 된 음식이 되지” 한국음식의 맛은 손맛과 정성에서 결정된다고 합니다. 정성이란 음식을 먹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배려라고 할 것입니다. 인륜지대사인 결혼식에 차려지는 폐백음식은 거기에 쏟는 정성이 남다를 것입니다. 재료를 사고 준비하는 모든 과정에 다른 경우보다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게 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딸 결혼식에 차린 음식으로 알음알음 알려져서 수많은 폐백음식을 장만해 왔던 김다복 할머니. 당신 자식을 여읜다는 마음가짐처럼 정성으로 차려 내놓은 이야기를 들으러 떠납니다. “육남매가 학교는 잘 나왔지” 육남매. 딸 셋, 아들 셋. 아들 딸 아들 딸 이렇게. 육남매가 전부 전고, 전여고 나왔어. 글고 사범부속 나오고. 언니만 풍남학교 나오고. 그때는 부속국민학교가 여자를 안 뽑았어. 우리가 여자로는 2회여. 근게 전부 부속국민학교, 사대부속 나오고. 긍게 그냥 학교는 전부 쓸만한데 나왔어. 내 밑에 막내동생은 피아노. 사범학교를 나와 갖고 피아노를 잘 혀요. 예쁘구. 우리 막내는 예뻐.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도 그러시고. 어머니가 음식을 잘 허시고. 아버지가 음식이 굉장히 까탈허셔. 삼대독자신게. 고모 두 분밖에 안 계시고. 우리 고모 한분은 그야말로 옛날 양반만 보고 결혼 하셨어요. 양반집안이라고 허니까 그것만 보고 결혼하셨는데 가신지 사흘 만에 돌아가셨대요. 근게 처녀야. 그래갖고 열녀문 세워놨는데 열녀문 세우면 뭣 해요. 우리 고모같이 불쌍한 분이 안 계셔요. 바로 위에가 오빠여. 오빤디 우리 오빠가 뭣을 잘 했냐. 팽이 같은 거 깎고 썰매타고 그런 거 있잖여. 맨 오빠 따라다니느라고. 큰 오빠는 벨로 집에 안 계셨지. 해방돼가지고 바로 서울대 댕기셨고. 우리 큰 오빠는 우리 아버지가 많이 교육에 눈을 뜨셨나봐요. 만주 건국대학에 일정 때 유학 보내갖고 해방되기 전에 일주일전에 나왔어. 나오니까 해방이 되았어. 그란으면 오빠 못 나왔다고 하더라고. 우리 아버지가 아주 교육에 대해서는 열성분자시고. 오빠가 교대교수. 언니는 숙대 다녔고. 그때 여자 숙대 간다는 것은 보통 거시기가 아니였어요. 거기 졸업하고 전여고 교직생활 했어요. 강택수 교장 할 때. 그래서 내가 숙대특강도 가서 해 봤어요. 폐백을. 여그서 폐백이 간다 허먼 인제 가정과 과장님들이 나와요. 나와서 이렇게 보고 이거 해주세요 하고 딱 지적을 해줘. 그렇게 허면 가서 특강 해 주고.  오빠하고 언니는 교육계에 계셨고. 밑에 동생은 상공부 국장까지 하다가 변리사, 서울 강남에서 변리사 허고 있어요. 우리 막내는 내 피아노 치면서 레슨하다가 며느리가 애기 낳으니까 애기 보느라고 죽겄다고 그래요. 거그는 전부 목사 집안이여. 전주에서 태어나서 결혼하고 지금까지 우리 아버지가 광주시거든요. 오빠만 광주에서 나시고 전부 여그서 낳어요. 큰오빠만 광주. 지금 오빠가 거그 서학동에 살으셔. 애들들이 크니까 아파트로 가시라고 그려도 올케언니가 싫대. 오빠가 낚시 다니시다가 교통사고가 나셨거든. 그래서 말씀이 어눌허셔. 나는 전주에서 태어났어요. 동서학동에서 태어나갖고 거그서 결혼하고. 중매로 만났지. 우리집 양반이 해양대학 나왔어요. 군산에 해양대학이 있다가 부산으로 갔잖여. 해양대학 나오셨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집이 쪼깨 산다고 그러니까 중매쟁이가 딱 세분이 있어요. 우리집 드나드는. 오빠서부텀 이렇게 중매쟁이가 있는데. 늘 중매쟁이가 연대, 고대 그랬는데 저 양반이 맘에 들어가지고. 결혼은 스물 세 살에 했지. 그때 저 양반이 졸업할 땐데 해양대학은 삼년은 배를 의무적으로 타야 돼. 우리 아버지는 양반만 찾으시는 분이 배 타면 쌍놈 된다고 배를 못 타게 해요. 쌍놈 된다고. 그래 가지고 인자 의무적으로 삼년을 타야 하니까 삼년타고 그만 두셨지. 부산서 그렇게 오라고 친구분들이, 사장이고 뭐. 못 가고. 나 땜에 고생하셔. 잘 생기셨지. 사군자로 인연 맺은 강암 선생님 우리 아버지가 글씨는 참 명필이었어요. 그전 강암선생님 계시잖아요. 그만치 잘 쓰셨어요. 우리 언니가 그렇게 글씨를 잘 썼고, 우리 큰 딸도 잘 쓰고. 수남이라고 서예가 선생님이 계신디 그 분이 내 호를 지어 주셨어요. 소화라고. 작은 소자에 화려한 화자. 너는 너무 화려헌게 쪼게 자그만치 화려하라고. 한 가지를 헐라먼 허지 여러 가지를 헌다고. 근디 폐백을 허다보니까 뭐가 딴 것이 안 되요. 친구가 친한 친구가 해 달라고 해서 안 해주먼 삐져요. 서예도 강암선생한테 사군자를 배우러 다녔거든요. 강암선생님이 우리 큰집에 족보 쓸 때 왔다 갔다 하셨어요. 내가 그 집 자부라고 헌게로 꼭 당신 옆에다 놓고 갈켜 주셨어요. 근디 거그 강당같이 넓은 데가 있더만. 거그서들 연습허는데. 나는 근디 쑥스러워서 누가 있으먼 연습도 못 해. 허다가 말아버렸어. 여그 교동에 계실 때. 원래 강암선생님이 김제여. 그리서 큰집에 족보 쓸 때 왔다갔다 허셨지. 우리 오빠하고 좀 알으시드라고. 강암선생님 버선 꼭 신으시고 상투 꼽으셨잖여. 살도 안 찌시구 맨 그대로여. 한복 입으시고. 그 할머니도 낭자허시고. 근디 내가 가먼 꼭 옆에 가서 앉아계신게. 더 쑥스러워서 못 허것드라고. 그래서 안 가버렸잖여. “우리 딸 여의면서 시작했지” 처음에는 내가 시작할 때 우리 딸네들 할 때는 열 가지 허고 그랬어요. 열세가지 그 다음에는 열일곱 가지를 해요. 이 밤도 전부 깍어 가지고 얼마나 예쁘게 다듬는가 몰라. 우리집 양반이. 밤 한말을 까먼은 손이 들들들 떨려. 잣이 두되가 들어가는디 중국산은 떫잖어요. 그래서 국산만 사고. 한번은 직접 딴다고 해서 갔더니 그렇게는 안 팔고 도매로만 넘긴다고 그래서 못 샀지. 부산까지도 다 가고. 삼천포까지도 가보고. 그래갖고 단골이 있어. 문어는 오릴 때 양씨집이라고 남부시장. 문어는 좁고 그러먼 안돼, 두꺼야 하고. 그래야 이렇게 칼로 오리지. 발도 하나만 떨어져도 안 이쁘거든. 그러고 약과 같은 거 할 때도 다 내려야 하잖아요. 그거 미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전주에서 폐백왔다 하면 다 구경와요. 우리 딸 결혼할 때도 그 도와주는 분이 삼십년을 했는데 처음 봤다고 하드라구요. 내가 개발을 허니까. 우리 친구들이 너는 고생을 사서 한다고 그랬어요. 태극기도 명태를 다 강판에 갈아가지고 솜사탕처럼 만들고 했는데. 그 사진이 없어요. 그러니까 한번 준비할라먼 보름은 걸리지. 한달 전 쯤 통장에 돈이 들어오먼 그때부터 걱정이여. 시장에서는 모든 것을 그냥 사다가 삼일이나 일주일이먼 하잖아. 나는 그렇게 못 허잖아. 먼저 통장에 돈을 넣어 버린게 안 해줄라야 안 해줄 수가 없어. 통장에 돈이 와서 있어. 근게 인자 그놈을 갖고 시작을 하는 거여. 싹 메모를 적어가지고. 먼야 살 거, 나중에 살 거 해 가지고. 삼 같은 것은 장날에 가야 되거든. 진안장날이 4일, 9일이여. 발품 팔아 구하는 좋은 재료 그래서 내가 허는 소리야. 폐백할 때 나는 딴 사람이 있으먼 못 해요. 폐백해달라고 딱 들어오먼 사러 댕길 때부텀 힘이 들기 시작해요. 전부 제일 고급으로 사야 허고. 문어가 큰 게 안 나와요. 내가 그저껜가 남부시장을 가 봤어요. 사는디를. 그래갖고 문어 있어요 할아버지? 근게는 요새는 집이 헐 때같이 안 나와 그려. 그서 삼천포까지 다 다녔어요. 문어를 사러. 그래도 맘에 드는 것이 없어요. 다리 하나에 만 원썩. 그리고 한 축은 이십 만원이 넘고 그랬어요. 근디 저것을 헌다 혀도 내가 인자 취미고. 가먼은 자랑덜도 허고 좋다고 하니까 그 재미로 했지. 저것을 돈으로 남기고 글라고 헌 것은 아녀. 근게 대개 그도 참 내 폐백은 아무나 못 해갔지. 아니 친구들이 그래. 누구하나 후계자라도 만들어 놔야지 그래. 그서 우리 친구가 와서 혼자 했어요. 걔가 음식을 잘해요. 얌전해갖고. 허먼은 와서 이렇게 하먼 나한티 퉁만 먹어. 너 이렇게 허먼 쓰것냐 못 쓰겠다. 그러먼 나 안 헐래. 에이 이렇게 시키는 대로 해봐. 그러먼 나 안 헐거야. 너한테 혼나고 나 못 하것다 그러고 포기하고 앉아서 구경만 허고. 삼도 금산으로 진안으로. 이렇게 예쁜 놈만 사야 혀. 경동시장까지 다 가봤어. 이렇게 아무거나 사다가 허는 것이 아니고. 육포까지 다 하잖아요. 집에서 전부 다 띠어다가 다 하고. 곶감은 고산 가서 사오고. 밤도 사키로가 한말인디 한말이 다 들어가. 마리당 한관 나오는 떡살로 만든 육포 육포 같은 거 할 때는 고기가 젤로 애려워요. 고기를 잘못 사먼은 가운데 기름이 요렇게 있잖여. 말르먼 똑 떼져버려. 고기 사 놓고 서너 번 울었어,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할까 그러고. 양념 다해서. 양념도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을 해야 혀. 잣가루나 섞어서 말르먼 또 하고 세 번을 해야 혀. 소고기 사러 팔방을 다니다 보니까 한번은 수입고기를 샀어. 육지구 가니까 농협이 있어. 거기를 갔더니 고기가 좋다고 그러드라고. 인자 두께가 몇 미리가 있어. 오미리, 삼미리 그러는데. 몇 미리 할꺼냐고 해서 오미리 그랬다고. 그랬다가 두껄란가 싶어서 우리 아저씨가 들어갔더니 여길 들어온다고 막 열을 내. 그래서 우리 아저씨가 거기서 보는 것이 뭣이 어쩌냐고. 그것이 수입이었던 모양이여. 수입고기는 흰점이 많아요. 기름이 군데군데. 국산하고 틀려갖고. 국산은 떡살이라고 있거든. 허벅지에 딱 한관밖에 안나와. 그게 자장감도 되고. 그런데 이것을 그 넘을 뜨니까 기름 천지야. 도저히 그놈 갖고는 못해. 그놈 놓고 울었어, 내가. 먹도 못 허지. 나는 또 고기를 잘 안 먹거든요. 그래 갖고는 울었어, 넘덜 주고. 송천동 농산물시장 거기를 갔더니 삼례할머니가 계시드라고. 주로 육포를 많이 헌다고 그러시드라고. 거그 과장이라는 분이 참 잘해줘. 거그서 아무튼 떡살만 나오먼 냉동실에 넣어 놓으쇼. 내가 그래. 헐때나 안 헐때나 내가 가서 사와. 거그 떡살은 여그 허벅지니까. 거그를 단골삼아 놓고는 걱정을 안 했어. 밤주란이라는 것도 밤을 싹 삶아서 채에다 받쳐서 다 만들고. 하여간 팔도강산을 댕겨야 해. 처음에는 새우도 했어요. 새우를 대새우, 왕생우. 살짝 데치먼 꾸부러지잖여. 그놈 전부 악세사리허고. 또 도미도 허고. 그것을 생선을 허니까 조께 따순데다 노먼 변질이 됐어. 그러고 또 포장해서 서울 같은 데 갖고 가먼 또 변헐가 무섭고. 그래서 자꾸 딴걸로 개발을 한거여. 이게 돈은 둘째치고 그러니까 녹십자 약업회사 있잖여? 저기 내 아는 사람이 거그다 딸을 여웠어. 호텔에서 상 갖다 피고 누구든지 지내가는 사람 맛보고 가라고 했다고. 팁을 몇 십만 원을 보내왔어. 내가 그때 팁 그렇게 많이 받아보기는 처음이여. 회장님이 그렇게 수고를 하고 했는디 가만 있을 수가 없다고. 받아도 괜찮으니까 받으라고. 손사래를 친 인간문화재 그래 갖고 전여고에서 우리 동창이나 후배들이 인간문화재로 허자고. 여기 폐백을 어디서 했나면 광주에 최지사님 할 때 거기가 우리 후배드라고, 안식구가. 거기가 딸이 둘인디 할 때마다 여그서 다 해 갔어. 저 이신경외과 거그가 또 후배여. 가네 동창이 나를 억시게 다 했지, 서울에서. 근게 그 폐백이 내가 헐라고 해서 헌게 아니라 친구들 딸 여울 때 가서 허고. 또 우리 딸이 넷이나 되잖어요. 근게 딸 헐 때 보고. 그러니까 친구가 기전학교 여선생인게. 지그 딸 둘째 때는 니가 좀 맞춰서 해 다고. 집에를 오먼은 친구들 모다 놓고 그러면 식모가 짜증내요. 밥해줘야지 뭣 해야지 헌게 니가 맞춰서 한번 해봐라. 나 혼자 어떻게 하냐 그렸더니 에이 그냥 해봐. 그서 허기 시작해 갖고 내가 그냥 폐백전문가가 되아 버렸어. 우리 어머니가 옛날 양반으로서 음식을 쪼게 잘 허셨나봐. 어머니 허는 거 보고. 언니랑은 이런거 절대 안 허셔. 그런디 내가 조금 취미가 있어. 꽃꽂이부터 바가지공예, 지점토, 가야금, 사군자 이런거. 인간문화재로 허라고 허는데. 나는 저그 저 김복동씨라고 한국은행 옆에 그 인간문화재 할머니가 있었어요. 그 할머니가 이런 문어를 잘 오리시드라고. 전시회 같은 거 허먼 가서 보고 그랬어요. 인간문화재 되먼 굉장히 구찮어요. 손님 온다고 뭐 쪼금 해 놔라, 전시해라. 난 죽었으먼 죽었지 난 그런 거 안한다 그랬더니 너 죽을 때 이 손을 딱 내 놓고 염허고 죽으라고 놀리고 그랬는데, 인자는 못 허겄어. 내가 지금 오리는 것만 봐도 그전에 거허고 이제는 못 오리겄어. 글고 허리가 아프고. 그러니까 내 것은 작품이라고 했지. 작품왔다고. 내가 여그 효자동 이사온지가 육년, 칠년째 돼요. 여그는 완전히 논밭 미나리깡이었어요. 여그는 오도 못 와봤어. 어쩌다가 욜로 이사 와서 사니까. 내가 교통사고가 나 갖고 수술을 했어요. 그래서 안 해준 사람이 많지. 한 삼년 전에 한 것이 마지막이여. 전주에서 왔다 그러먼은 서울에서도 알고. 송천동에 또 폐백하는 분이 또 있어요. 그 분은 나 때문에 재미를 본디야. 내가 전에 송천동에 살았거든. 친구가 야, 송천동에서 해 갖고 왔다는디 니 솜씨허고 틀리더라. 어, 그분도 잘 혀. 송천동에서 내가 이사를 와 버리니까. 중앙시장에서도 몇 번을 왔어. 갈쳐달라고. “아무도 배우려고 하지를 않아” 딸들 여의먼서 잘 해서 이름이 난 것이지. 내가 폐백을 헐라고 해서 한 거는 아니여. 나는 이거 배운 거 하나도 없어요. 울 아버지는 술을 안 잡쉈어도 손님들이 많이 오신게 이렇게 하나씩 얹어 놓먼 얼마나 이뻐요. 어머니 허는 거 보고 아 그렇게 허더라. 딴 사람들 허는 거 생각해 갖고 허는 것이지. 난 내가 가격을 안 쳤었어요. 우리 친구 중에 열성이 하나 있어. 기전여고 선생인디 숙대 가정과를 나와서 가정과 교사를 했어. 갸가 말해줘야 하지 아무나 안 했거든. 야, 두 가지 넘었으니까 얼마 받아야겠다 하먼서 얼마 부쳐라 하고 딱 했지. 그 뭐 매니저지. 처음에 백 이십 만원 달라고 했던가. 재료비나 인건비 치먼 비싼 것도 아니었어. 재료를 젤로 좋은 놈만 썼으니까. 삼도 잘못 사먼 물에서 씻으먼 기스가 있고 썩은게 보이고 그런 경우도 있어. 그럼 다시 사야지. 사러 다니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려. 나중에는 백 육십 만원까지 받드라고. 그게 마지막이었어. 우리 친구들은 그래. 너는 죽으먼 손은 절대 묶지 말라고 해라. 내가 오직하먼 우리 며느리보고 약과하고 서너 가지만 배워라 그래. 우리 때는 집으로 손님대접을 했잖아. 술안주로 하나씩 해가지고 내 놓으먼 얼마나 좋아. 그랬더니 나중에 배울게요. 근디 나중에 언제 배워. 힘든 것이 약과허고 밤주란허고 저 화전이고. 문어는 못 오려. 칼을 늘 갈아야 슥슥슥 나가지. 요즘은 애들 연필 깍는 칼로 허고. 폐백 잘하는 사람들도 문어는 잘 못 오려. 딱딱허니까 오징어랑 물을 축여서 냉장고에 넣어 놨다가 허는 거야. 오징어도 삼키로 이상 가는 걸로 해야 하니까. 후배들이 언니는 아까우니까 누구 하나라도 갈키라고. 근디 못 갈쳐. 왜냐먼 내가 같이 혀야 하는디 허리가 아파서 못해. 그리고 재료도 살라먼 보통 재료 갖고는 안 돼. 부속국민학교, 여자로는 제이회 우리는 부속국민학교 때 그니까 일정 때지요. 근게 삼학년 올라가먼서 해방이 됐으니까. 시방 그 자리여. 그 앞에가 파출소 있고, 뒤에가 교장선생님 관사가 있었는디 기와집으로. 지금은 다 뜯어버렸더만. 그래가지고 사범학교서 교생을 나가먼 부속국민학교로만 왔어. 우리는 늘 사범학교, 가운데가 논길인게 거기서 늘 왔다갔다 하고. 우리 친구 하나가 정읍서 살다가 부속국민학교로 전학을 왔어. 근디 신사를 학교 구석탱이다가 세워놓고 조회할 때 마다 거그다 절 허고. 학교에도 있어. 미술시간인디 교장 올라가는 다이 있잖어요. 거그서 미술헌게 우리 친구 가가 야 저그 뭣 있는지 아냐 인자 한국말로 그러는거야. 야, 저그 종우떼기 한 장밖에 안 들었다 그러는 거야. 니가 어떻게 아냐 그러니까 요렇게 들여다 본게 거그 종우떼기 한 장밖에 안 들었드라 그러는 거야. 그말을 지내가던 선생님이 들었어. 그게 역사선생이야. 그 이튿날 불러다가 막대기가 분질러지드락 맞았어. 일본선생도 아니고 한국선생이 그렇게 때린거야. 기절하고. 가네 아버지가 쫓아오고 난리가 났어. 국민학교부텀 무용도 했어. 내가 이렇게 작아도 달음박질도 잘 해요. 옛날 방울치기가 지금 야구더만. 그리고 우리는 뭐이냐 자치기, 자치기를 잘 허고. 남자들허고 같이 했어. 부속국민학교는 어떻게 했냐면 여자는 해방되고 뽑았어요. 여자로 내가 제이회여. 여자를 열다섯 명뿐이 안 뽑아. 글고 한반에다 열다섯만 헐 수 없응게 머시매덜을 열명썩 갖다 놓면 스물다섯명 아녀. 근게 인자 일반은 남자덜만 있고, 이반은 여자하고 혼합반이고. 근게 남자덜하고 같이 방울치기하고 같이 놀고. 그리고 우리가 쪼께 억쌨어. 학교 다닐 때 억쎄가지고. 오픈 더 뒤꿈치와 백지동맹 여고 다닐 때도 기하를 허기가 싫잖여. 여자들이 싫어하는게 기하여. 우리 때 부텀 이과, 문과가 생겼어. 그리고 전여고가 우리 때부터 시험을 봤어. 그전에는 그냥 수월하게 올라갔잖여. 시험안보고. 전북여중이먼 전북여고까지 육년간 졸업했어. 근디 우리 때부터 시험을 보기 시작했어. 시방 우리가 전여고 이십오횐데 우리 선배도 이십오회로 돼 있어. 우리가 그전에 한번 가서 보니까. 그전에는 이과, 문과도 없었어. 문과가 두반, 이과가 한반. 문과가 많았어. 이과교실 가먼 맨 공부들만 한디, 우리는 막 뛰고 놀고 와이담허고. 우리 밑에가 바로 교무실이여. 근디 막 뛰먼은 선생님들 올라와서 혼나고 그랬는데. 한번은 뭐이냐 백지동맹을 했어. 기하선생이 어찌나 악센트가 심한가 어떻게 미워서. 그리고 맨날 보먼 뒤꿈치가 빵꾸가 나서 댕겨. 그래서 별명이 오픈 더 뒤꿈치야. 저그 오픈 더 뒤꿈치 또 온다. 근데 하루는 하나가 개구쟁이야. 딱 앞에 나가더니 다음에 기하시험 보는디 야, 우리 기하백지동맹 하끄나. 다들 좋다고 박수를 쳤어. 만약 쓰는 사람은 다 한 대썩 맞기로 했어. 그러고 시험을 보는디 다 눈치만 보는 거야. 근데 거기 교감선생님 딸이 하나 있었어, 젤 앞에 앉았고. 그리고 심옥희라고 갸가 회장이여, 우리 반. 둘이는 쓴게로 막 옆에서 찼대, 쓴다고. 그래서 이렇게 지우개로 지운게로 그 놈이 다 안 지워지고 희미하게 남았던 모양이야. 하나썩 놓고 다 나간게 조끔 있다 주르룩 따라 나가버렸잖여. 다 몰라서 못 썼단디 갸네들 둘이 본게 다 맞었다 이거야. 뵈이는 놈이. 느그들 백지동맹 했지 않냐, 누가 먼저 나갔냐. 그래갖고 나간 애 여섯 명이 정학당했어. 갖고 막 교장선생이 빗자락 갖고 와서 다리를 때리고. 전여고 일층에 가먼 도서실이 있어요. 거그다 하루내 가둬놓고. 그전에는 전여고 앞에가 빵집, 꽈배기집, 뭔집 그렇게 장사했는디. 꽈배기 사서 넣어 주고, 빵 사서 넣어 주고. 지금 리베라호텔 그 자리에 있을 때. 그 가상에 기숙사허고. 그 길 건네가 다 대밭이었어요. 지금은 개발해서 싹 바꼈지만. 저짝에가 전여중이었고. 전여중 졸업하고 우리 학교로 왔어. 지금도 동창회를 하먼 회장을 뽑을 때도 전여중 세우고, 전여고 세우고 갈라져. 지금도 그런게 있드라고. 나는 전북여중 히갖고 거그서 졸업하고. 우리가 전여고 이십오회여. 아버지 서울 가신지 일주일 만에 육이오가 나다 육이오 때는 전북여중 이학년, 그때 육이오가 났어. 육이오가 안 났으먼 나는 서울서 살았지. 저 양반도 못 만나고. 우리 아버지가 그 종이지방을 크게 하시고 공장도 가지고 계시고 그랬잖여. 지금 죽림가는디 거그가 전부 갱변이여. 갱변이어 갖고 딱나무만 심는 디여. 거가 딱 두 간디가 공장이 있어. 어렸을 때 나는 그게 우리 공장인 줄 알았어. 아버지가 늘 거그 갖다 오고. 우리 선산이 거가 쭉 있어, 몇 개가. 우리 작은 오빠 주었더니 그 때 돈으로 다 팔어 버렸어. 우리 아버지가 종이지방을 크게 하셨잖여. 그러니까 우리가 학교를 서울로 갈판인게 아버지가 인제 서울에다 집을 하나 사신다고 트럭으로 종이를 갖고 서울을 가셨어. 근디 가신지 일주일 만에 육이오사변이 난 거야. 오빠는 서울대학교 다니고. 그 전에는 전대가 이렇게 쨈매 갖고 다니는 거 있잖여. 종이가 다 팔리덜 못 허고 서울에도 아버지 인자 단골이 있어갖고. 하여간 일본까지 종이가 다 갔어. 만주까지 가고. 그래서 만주까지 왔다갔다 하시먼서 오빠를 만주 건국대학에다 유학을 보낸 거여. 그전에는 소지종이라고 조그만한 종이가 있어. 그건 이렇게 태우잖여. 제사모실 때도 태우고. 제주도하고 일본에서 많이 사 가요. 바닷가니까 배 나갈 때 뭐 제사지내고. 그전에 그 소지가 많이 올라가먼 재가 많이 올라가먼 좋다고 그랬어. 종이를 많이 사갔거든. 우리는 전국적으로 제주도, 일본, 만주까지 다 가져간거여. 그러니까 아버지가 서울로 한차를 가지고 그 놈 다 팔먼 집 사놓고 오신다고 그러고 가셨거든. 그러고 쪼금 있으니까 한강다리가 끊어졌네, 막 그랬지. 그런디 아버지랑 같이 가신 분은 오셨어. 그래갖고 깜짝 놀래갖고 아버지 안 봤냔게 몰른다고 허는 거여. 우리 엄마는 느그 아버지땜에 오빠까지 죽었는게비다고, 날마다. 울고불고 그랬잖여. 딴 사람들 피난가고 어머니는 소쿠리에 밥 싸고 반찬 싸고 저 시외로 거가서 저녁이먼 오라고 혀. 갔는디 근디 딴 분들은 다 내려오고. 아버지는 돈이 많으시니까 오시면서 학생들, 걸어오는 사람 아버지가 자꾸 끌어댕겨 갖고 같이 가자. 돈을 많이 주먼 밥을 해주더래요. 시골에 들어가서 하룻밤 자고 밥 조께 해주셔 하먼 밥을 해 주드래. 그렇게 해서 한 열댓명을 데리고 있었어. 대전에 사는 놈은 거기다 놓고 그렇게. 딱 한사람만 데리고 오셨어. 그도 육이오사변 끝나고 난게로 찾아왔드라고. 전쟁통에도 인심은 살아 있고 그래서 인공 때는 오먼은 가방을 다 뒤진게. 한번은 오빠 가방에서 호각이 나왔어. 그때는 순경이라먼 다 죽였잖여. 근게 호각이 나오니까 순경이라고. 순경이라고 해 가지고 가둬놓고 아버지가 가서 빌고 돈 한뭉텡이씩 주고. 그러먼 오고. 오빠는 뚱뚱한게 발바닥이 다 부르터 갖고 터졌어. 근디 우리 아버지는 깐질깐질 하신게. 우리 오빠는 일미터 팔십 몇이여. 오빠 크지 언니 크지, 나하고 작은 오빠 작고 밑에 동생들은 커. 그런게 가운데 눌려 갖고 작다고. 오빠가 전주에서 키다리 모임이라고 있었어. 거그도 허고. 아버지가 인심이 좋으셨어. 어머니 아버지가 없는 사람 도와주고. 참 서학동 그전에 다 가난하게 살았어요. 남고산성 가는데 사는 사람들이 우리 집일을 다 갖다 했어요. 우산도 만들고 부채도 만들고. 공장을 하다시피 했으니까. 그도 우리 아버지가 인심이 좋으시니까 종이를 외상으로 가져 가잖아요. 서학동 오셨다고 하니까 인공 때 돈을 다 갖고 오드라고. 글고 남자는 어디 나갈 때 절대 안식구한테 뭣이 어디 있다고 말을 허고 나가야 것드라고. 우리 아버지는 큰 제사 때는 아버지가 장을 보러 가셨어. 밑에 지게 딱 짊어지고 가서 장을 아버지가 보셔, 큰 제사 때는. 근디 아버지 가시고 나서 그전에 돈궤짝이 있어요. 요렇게 눌르먼 찌리릭 허갖고 열리는 돈궤짝이 있어요. 그것이 있는디 어머니가 본 게 돈 몇 푼뿐이 없어. 우리 작은 오빠는 영장 나와 버렸지. 언니는 그때 막 숙대 졸업하고 내려왔는디. 오빠는 미국 유학 보내달라고 거그 남어 있었어요. 구이에서 시작된 피난생활 인공 때 아버지가 오셔가지고는 저그 구이로 피난을 갔는데 그전에는 함지라고 큰 종이로 발라갖고 있어요. 그거에 돈이 하나가 들었어. 그전에는 은행에도 넣도 안했어. 구이로 피난 가서 요렇게 세궤짝이라고 핫구짝 같이 쪼그만 앞닫이 같이 생겼어. 고리 돈을 다 여넣고 날마다 거기서 전주까지 와요. 아버지하고 나하고. 내가 아버지 비서야. 요만한 시장가방만한 데에다가 돈을 갖고 왔어요. 그전에 우리 아버지가 비행기 헌금을 허셨대. 그게 동사무실에 기록이 남아 있대요. 서학동이 가난해서 대학 못 대닌 사람이 많았어. 근게 우리 집을 미워라한 사람도 있었어. 그래 갖고 한집이 큰아들, 작은아들이 다 빨치산이여. 우리 집을 찍어놓고 저것들 언제 죽이도 죽인다고. 그때 풍금이 있었어요. 내가 하모니카도 하고, 피아노도 치구 다 했어. 내가 아버지 풍금 사줘 해서 집에 풍금이 있었는디 여성동맹에서 그놈도 가져가 버렸어. 여성동맹에서. 가져가서 언니하고 나하고 어머니가 삼베로 그때는 잠벵이라고 했어요. 허수록허니 머리도 빗도 못하게 하고. 나는 중학생이고 그러지만 여성동맹에서 나오라고 헌게로. 언니가 그때 초학을 했어. 지금 말라리아가 초학이여. 초학을 하루떼고 하고 허더니 나중에는 날마다 허는 거야. 막 한기가 돌고 팔다리가 떨리고 이불을 막 덮어도 그래도 앓어. 그놈이 옳아. 그런게 나까지 하는 거야. 그렇게 아프다고 헌게 어머니가 여성동맹 못나가게 했어. 근디 광주 아버지 고향에서 누가 손님이 오셨어. 그게 누군가 헌게 순경 허다가 피난헌다고 우리 집으로 온 모양이야. 그때는 순경이라면 다 잡어다가 총살시켜버리고 그랬어. 근디 동네에서 냄새를 맡았어. 순경 같으다고. 오빠는 피난가서도 낮에는 산에 가서 있다가 저녁에 잠만 자고 가. 피난 간 동네에서도 저 아래 동네서 소 잡았다요 그러면 아버지가 그려 갖다가 동네 노나 먹어. 또 돼지 잡았대요 허먼 돼지머리 갖다가 먹어. 그래가지고 어떻게 모면헌거요. 우리 집을 딱 점을 찍어갖고. 그때는 잘 살고 그러먼 거시기했잖여. ‘사랑은 전쟁도 못 말려’ 불쑥 찾아든 오빠 애인 느닷없이 오빠 애인이 왔어. 서울에서.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그야말로 시체를 넘고 넘었다더니 그러고 왔어. 마산 사는디 서울대를 다녔지. 근디 말을 헐 때 한국말 절반, 일본말 절반 그래. 그란히도 거그서 우리 집을 눈독을 올리고 있는디 간첩이 왔다고. 남자는 약하더만. 우리 아버지는 받아들이라고 그려. 여자가 그렇게 해갖고 사랑 따라 요렇게 와서 얼마나 불쌍하냐고. 울 어머니는 막 욕을 하는 거야. 저것 땜에 우리 식구 몰살 당허것다고. 그도 장개 갔다고 해도 나 열째도 좋고 스무째도 좋은게로 여그만 있게 해 달라고. 전주만 있게 해 달라고. 결혼해 갖고 시골에 있었지.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보고 자꾸 말을 허는 거야. 그냥 놔두자, 놔두자 하시는 거야. 우리 어머니는 절대 안 된대. 거그다 간첩이라고 난리가 났응게. 근게 아버지가 돈을 주셨는개벼. 너 이놈 갔고 가거라. 가먼은 나중에 내가 불러주마. 울고불고 그러고 간 거야. 저 구이 가자먼 거가 고아원이 하나 있었어. 지금 사람은 몰라. 지금은 다 아파트지만 거그 야산에 감나무가 쭉 있었어. 그먼 인자 내가 심부름꾼이야. 언니가 고리 오먼은 지키고 있다가 오빠 산으로 가서 데리고 와서 가운데서 만나줘. 순경아저씨도 보냈어. 몇 월 몇 일해서 누가 올라고 했드라고. 일주일만 더 있었으면 우리 식구 다 몰살을 했어. 누가 귀뜸을 해 줘 가지고 오빠랑 어디로 보내라고. 보내야지 큰 일 나겄다고. 어머니 가신 뒤따라 오일 만에 가신 아버지 아버지가 광주 고향에 가시먼은 성묘도 갈 겸 가시먼은 가자 하먼 둘째 낳아가지고도 업고도 갔어. 남고산성에 관향묘 있잖아. 그 앞에 우리 산이 있어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산소가 거가 있어요. 할아버지 산소가 원래가 광주에 있었어. 일찍 돌아가셔서. 산소에 올라가먼 거가 판판한 바위가 있어. 나무 하나 있고. 그먼 인자 거그 앉아서 저 시내 내려다 보고 너 창가 해 봐라 그래. 그럼 거 서서 창가를 크게 누가 보는 사람 없은게. 고리 넘어서 내려 오고. 꼭 일주일에 한번썩 가셨어. 삼대독자시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해방 되던 해 돌아가셨어. 그때만 해도 야든 살 넘으먼 장수하신다고 하셨어. 우리 아버지는 예순 아홉에 돌아가시고. 우리 어머니는 예순에 돌아가셨어. 오월달에 어머니 생신인데 환갑잔치 한다고 웬만한거 준비해 놓고 그랬는디 돌아가셨어. 급성간암이었어. 간암. 그전에는 황외과병원이 다가동에 있었어. 거가 잴 잘 봤어. 어머니가 내가 옆구리가 막 아프시다고 그려. 우리 둘째 오빠 애기 돌 때 오셨는데 그래. 그래서 황외과를 모시고 갔더니 내 손을 어머니 가슴에다 대주드라고. 근데 딴딴해. 딴 병원 가봐라 그래. 맛있는 거 해드리고 그래라 그러는 거야. 지금 경기전 돌담길이 거가 김외과병원이었어. 오빠가 거기 모시고 갔더니 아무래도 암 같으다고 그래. 그서 예수병원을 모시고 갔어. 예수병원에서 번호 타 갖고 맨날 기다라고 앉았어. 난 딸 둘 낳고 그래서 어머니를 맨날 따라다니지는 못 혀. 한번은 같이 갔더니 어머니가 야 기다리다 미리 죽겄다 그려. 설이 닷새 남았는디 돌아가셨잖아. 아버지가 점허고 그러는 것을 싫어라 그러셨는디 내가 점 한번 해보먼 좋겄다 그러셔. 그서 언니하고 나하고 점을 허러 갔더니 굿을 허라고 그려. 아버지한티 굿을 허라고 그려요 했더니 어머니 마지막 소원인지 모르니까 굿을 혀라 그려. 그서 굿을 헌디 밤새드락 허는 거야. 밤새드락 꽹과리 치고. 근디 점쟁이들이 막 뛰고 그러는디 고모가 한분 계시드라고. 우리는 몰랐어. 근디 그 고모가 나왔다고 그래. 내가 아버지한테 먼저 돌아가신 고모가 한분 있다고 그러니까 정말로 그렇게 말했냐고 그러셔. 그 고모가 그렇게 어머니를 괴롭힌다네요 그러니까 깜짝 놀라시드라고. 근디 어머니가 내가 참 시원하다 속이 개운하고 시원하다고 그러셔. 그서 우리는 인자 다 애기들 업고 집에 가고. 언니는 파마한다고 미장원 갔고. 오빠가 자전거를 타고 쫓아왔어. 너그들 뭣 하냐고 빨리 오라고. 가서 봤더니 어머니가 운명하셨어. 굿허고 그 이튿날 돌아가셨어. 환갑도 못 허고 돌아가셨어. 오일출상을 했는데 오일출상을 허고 닷새 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우리가 막 우니까 아버지가 그러셔. 너그들 내 앞에서 울지 말아라. 너그들은 소리내서 울기라도 하지만 나는 가슴이 찢어진다. 나는 울도 못허고 가슴이 찢어진다 그러셨어. 그러고 오일 만에 돌아가셨어.   딸 둘이 리틀 미스 진 딸 넷, 아들 둘. 가수 현숙 있잖여. 갸가 우리 큰집 김제, 그 뒤에 살어요. 그래갖고 우리 집에서 큰일 헐 때는 그 집 식구가 다 와서 밥 먹었어. 큰집이 원체 부자잖여. 조선한옥집책에 우리 큰집이 한 열장은 나왔어. 곳간까지 다 나왔어. 장독대가 문화재로 되있어. 그게 한  백 평 돼. 그 전에 목욕탕 있는 집이 있었간디. 근디 솥목욕탕 알어. 쇠로 만들어갖고. 그놈을 놓고 짚으로 때서 물을 댑혀 갖고 할아버지부텀 순수대로 목욕을 해. 우리 차지는 되도 안혀, 매느리들은. 내가 큰 집에서 이년 육 개월 살 다 왔어. 우리 둘째가 효녀야. 갸같은 효녀가 없어. 용돈이고 옷이고 갸가 많이 해줘. 우리 딸들이 다 착하지. 얼굴들도 예뻐서 지그들이 다 알아서 짝도 만나고. 내가 그전에는 점도 허고 날짜도 보고 그랬지만 지들이 좋다고 허니까 일절 안 보고 그냥 보내버렸어. 내가 딸 넷 놓고 아들 낳으니까 시내버스가 다녔어. 큰 아들 낳으니까. 그래서 중앙국민학교 앞으로 이사했어. 큰길에 차 다니니까. 학교 운동장 가서 놀으라고. 우리 딸 둘이 전북일보 리틀 미스 진이야. 그러다가 딸 막내 때는 전북일보가 힘들어져서 리틀 미스가 없어져 버렸어. 그 때가 칠십 일 년인가 그렸는디 밥그릇 허고 실반지 하나 주드라고. 근디 장난이라고 해도 워킹 배우는디 그때 돈 삼십 만원이먼 큰 돈이야. 일주일간 삼십 만원썩 주고 배우고 그렇게 해서 갈키서 나가고 했어. 목걸이도 사주고 그랬는데 애가 자고 있으니까 누가 목걸이랑 다 빼 가버렸어. 그때는 미스전북이랑 같이 했었어. 근디 팔십 팔번인가 맨 뒤였는디 못 기달리고 데리고 갈라니까 못 데려가게 하드라고. 그래서 진이 됐어. 시민문화회관에서. 거그서도 하고 아카데미 극장 거그서도 허고. 둘째 딸은 춘향이 내 보내라고 여그저그서 막 그래서 내 보냈어. 근디 그 때가 광주에서 오일팔 그 날이야. 하여간 얘네들 키우면서도 난 취미생활도 다 했어. 제일 첨에 꽃꽂이 배웠거든. 그 담에 바가지 공예를 했는데 내가 그림을 쪼게 그렸어. 그때만 해도 대학생들도 막 아주머니는 왜이케 그림을 잘 그리느냐고. 나는 미인도를 많이 했어. 미인도는 코가 쪼금만 어긋나먼 배려버려. 친구들도 주고 많이 줬어. 선생님이랑 같이 전시회도 허고. 꽃꽂이도 성심화원이 있었어, 예술회관 옆에. 그 아주머니 여즉 살아계시더만. 거그서 주문들어 오먼 같이 도와주고. 가야금도 내가 십 오년을 배웠어. 하모니카도 잘 불어. 지점토도 했고. 김다복 연보 1948년  전주사범부속초등학교 졸업 1951년  전주여자중학교 졸업 1954년  전주여고 졸업 1961년  결혼 후 2남 4녀 1995년  8월과 10월 숙명여자대학교 특강 1996년 5월  전주주부대학 강의 1997년 3월  전주주부대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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