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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 |
춤이 그리 쉬운가? <희랍인 조르바>(1964)
관리자(2009-01-13 12:10:26)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소설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조르바와 미네르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가서 돌아오지 않던 남자나 증권회사 직원이던 한 남자가 타히티로 가 그림을 그린 조르바 등은 우리의 로망이다. 멀리는 황석영과 가깝게는 악양인 박남준과 여행생활자 유성용 등 내 주위 조르바들은 말한다. 책과 펜을 통해서 배우려 하지 말고, 우리의 탯줄인 핸폰을 버리라고. 월급통장을 발로 차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새 길이 열린다고.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어, 좀 이상하다. 반으로 준 펀드가 문제가 아니라 월스트리트 발 금융위기가 실물 위기로 번진다고 아우성이다. 금융의 과잉생산으로 신용이 무너진 상태란다. 이것은 불운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저무는 필연이고 사필귀정이기에 욕망에 대한 벌 받을 준비를 하라니, 무슨 말인가. 이참은 조르바 아닌 미네르바에 귀를 기울일 때라고 후배가 일러주었다. 금융세계화의 변방에 사는 한 피해자로 투자비 손익분기점을 넘어서 자기체념과 자기합리화를 넘어서 살길을 찾으라고 덧붙였다. 각자도생은 직장에 열심히 다니는 것 외에 자산 보존의 방법이 기다림 밖에 없는 지금, 소설 아닌 영화로 <희랍인 조르바>를 보았다. 할과 잠언의 상승 이 오래된 영화는 넓게는 한 젊은 작가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이고 좁게는 한 남자의 자산 불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노란 숲 속 두 갈래 길 앞에선 도련님 과(科)인 젊은 영국인 작가 바실은 유산으로 상속받은 폐광이 있는 그리스 크레타섬을 향한다. 사람이 적게 다닌 길을 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일 것. 이 아폴로적 인간은 비가 쏟아지는 부둣가에서 대책 없는 술주정꾼 조르바를 만나는데, 아니 이 희랍인이 접근한다. 살롱이나 갤러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지쳤을, 새로운 뭔가를 찾고자 하는 이 도련님은 넉살좋은 영감을 즉석에서 고용하게 된다. 조건이 있다면 놀 때만큼은 평등한 주체라는 것을 환기시키는 졸병과 대장 사이에 착취와 억압이 없는 관계를 설정하는 것. 마른 땅만 디디며 살아온 소심한 그가 책을 젖게 하는 빗줄기를 뚫고 향하는 찬란한 헬라문화의 중심지 크레타 섬은 그에게 새로운 대학이 된다. 감독 미카엘 카코야니스는 섬의 풍광보다는 섬사람들의 무기력하던 삶이 각기 다른 성격의 두 남자가 휘둘러대는 인간사에 초점을 맞춘다. 선수 조르바는 프랑스에서 건너와 읍내에 정착해 여인숙을 하는 늙은 매춘부 호르테스를 금방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막에 불시착하면 어린 왕자를 만나고, 기차에 타면 <비포 선셋>의 여주인공을 만나는 것처럼 바질은 이 섬에서 예쁜 과부를 보게 된다. 아니 도사께서 샌님 도제에게 접수를 코치한다. “혼자 자는 여자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모든 남자의 큰 수치”라며 세상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 광산이 있는 황량한 그곳에도 외로움을 달래는 데는 책보다는 역시 여자다. "결혼 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 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천 번 아니 3천 번쯤 될 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라고 할을 뱉는 이 남자를 여자들은 어떻게 볼까. 수많은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고 강간한 경험이 있는 이 따뜻한 악당은 여유를 잃지 않는다. 밥이면 밥, 키스면 키스에 몰두하라는 잠언과 함께 예의와 신의를 적당히 지키는 이 남자 디오니소스는 과연 거친가? 은유가 모자란 언어를 사용하는 이 남자, 거친 척 한다는 느낌. 너무 전형적 인물이어서 이 두 남자는 말 그대로 고전적 캐릭터에 속한다. 감정에는 솔직하지만 대책 없는 인간의 표상인 이 늙은 사내는 유혹으로 평생을 보낸 여인숙 주인을 차지하고, 과부 춘향은 두목에게 맡길 줄 안다. 매혹적이기보다는 슬픔덩어리 호르테스를 두고 그는 광산개발을 위한 자재 사러 가서 젊은 창녀와 놀아난 후에도 돌아와서는 월매를 실망시키지 않는 자세라니, 끌끌. 춤으로 맺는 하강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타인을 통해 에너지를 생성해내려는 젊은 작가는 조르바라는 학교에서 진짜 알파벳을 배운다. 조르바와 바질은 이 가난한 섬에서 갈탄 채굴이라는 탄광 산업을 시작한다. 버근버근한 갱목 보수를 위해 수도원 주위 나무를 벌목할 필요를 느끼자 조르바는 바로 작업에 착수하는데, 수도원 사람들을 꼬드기는 것이 그에겐 죽 먹고 누워있기다. 조르바는 갱도에 댈 나무를 운반할 거치대와 케이블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 케이블이 완성되는 날 마을에는 신부들과 섬사람들이 모두 모여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고. 하지만 나무를 운반하던 구조물은 갱목 두 개도 채 나르지 못한 채 도미노가 되고 만다. 신화적 공간 속 남자가 그렇듯, 시험 받는 이 남자는 불쌍한 과부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광산일은 다 망하고 마는데.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니야, 처음엔 원래 그런 법이라고”허허, 잔치가 벌어졌던 곳에는 조르바와 도제 둘만이 덩그렇게 남게 된다. 젊은 작가의 이 무한도전은 거창한 만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에 탄 양고기 한 점과 춤 한수로 끝을 맺고 만다. 여기서 샌님은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배불뚝에 넥타이를 찬 모습으로 팔 벌려 추는 안소니 퀸과 젊은 남자의 춤은 그럴 듯하다. 그리 아름답지도 않은 바닷가에서 양복 입은 자아와 허드레옷 입은 자아가 함께 웃고 나서 느닷없는 춤을 끝으로 카메라는 줌 아웃하는데, 조금 무책임하지 않은가. 섬에서의 해찰이 이렇듯 쉽게 햄릿을 춤추는 인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성과 합리성이 그렇게 쉽게 줌 아웃되던가. 세상에서 아웃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적은 부잣집 도련님과에 속하던 감독님의 성찰은 그야말로 해찰은 아닐는지. 인간의 변화는 지난한 작업일 텐데 말이다. 감독 그리고 게바라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귀를 자를 수도 없고 타히티로 갈 수도 없는 내가 책을 버린 적이 있다. 책이 존귀한 사람을 만든다는 신념이 얇아졌다거나 조르바를 만나서가 아니라 그건, 알러지 때문이었다. 책을 버려도 텔레비전은 남고 영화는 계속되는 것.  노랗게 물든 숲 속 두 갈래 길을 다 갈 수 없는 회한을 말하지 않은 작가와 감독이 어디 있겠는가? 수많은 책들 속에서 햄릿을 깨우는 돈키호테형 인간으로 등장하던 여러 명의 조르바가 있었지만 나는 춤추어 본 적이 없다. 인간은 자유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만다라를 꿈꾸는 자였기에 감독은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화 했을 것이다. 기가 막힌 원작에 이정도 영화라면 소설 속 조르바에 끌려 다니는 영화다. 두개의 자아라지만 안소니 퀸이 너무 크기에 젊은 작가는 그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뿐. 공동제작자이자 대 배우인 안소니 퀸의 아우라에 눌린 감독은 소설 속에서 “감히 자신을 묶은 로프를 잘라내지 못해 자유로워질 엄두를 못내는 것”이라고 말한 조르바의 어록을 재현하는 수준에 그친다. 정말로 로프를 잘라낼 사람은 감독 자신이었을 텐데. “당신은 한 가지만 빼고 다 갖추었어요. 광기, 약간의 광기만 부족할 뿐”이라고 말하는데, 그 당신은 세상 거칠어 봐야 한 끝 차이라는 것을 당신만 모르는 듯. 적어도 영화감독이 작가(오퇴르) 칭호를 듣고 싶다면 소설을 영화화 하는 작업 자체가 끌려가는 것 아닐까. 재료보다 윗길인 맛을 내야 진정한 요리사인데, 그 요리솜씨가 태운 양고기와 같다면 너무 실례일까?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에다 대배우니 큰 고생 없었을 터인데, 아쉽다. 살면서 내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자 아니면 감독을 꿈꾸지 말라고 조르바처럼 말하고 싶은데, 누가 들을지……. 추천 <파이트 클럽> 우리 한 때 거칠 것 없이 정력적으로 ‘단스 단스’를 외치는 조르바를 꿈꾸었었다. 그러나 몸 따로 마음 따로가 되는 동안 애비가 되고 말았다. 초인에 대한 야망이나 충동을 가지면 몸에 비늘 갖는 것으로 생각하던 우리 부모에게 배운 대로 새끼들에게 잘난 할을 늘어놓는다. 공부가 비용이 제일 적게 든다 고. 뒷다마도 까고 칼도 꽂아야 세상에서 살아남는다고 차마 말은 못하지만 펜대운전사가 길게 사는 법이라고 말한다. 게바라와 닮은 것이라고는 천식 그리고 오토바이 여행 밖에 없는 아들에게 의사가 되고나서 게바라가 되라고 말을 돌리는데, 녀석이 영화 한 편을 추천했다. 글로 배운 것과 몸으로 배운 것의 차이를 말하는 이원적 대립관계는 두 개의 자아에 대한 같은 몸짓의 영화였다. 비행기에서 만난 자유인과 배에서 불한당을 만나는 설정은 비슷하지만 속도감과 테크닉이 달랐다. 애타는 도제와 도사의 방관에 대한 태도에 그냥 양고기 한 점과 춤판으로 바꾸는 도식화한 설정도 아니고. 본능 따로, 절제 따로가 아니라 스타일리시한 데다 내뱉는 듯한 독백은 메모지를 찾게 했다. 관용 그리고 자유를 말하는 ‘옛날 영화’에서는 고수에게만 무게추가 기울어진 반면에 여기서는 브래드 피트와 에드워드 노튼 두 남자 다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주고. 거기다 반전은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데, 그 영화 제목은 <파이트 클럽>이다. 꼭 보시라.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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