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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 |
[백제기행] 문경
관리자(2009-01-13 12:04:23)
가을에 빠지다 - 영남대로의 길목 문경새재 <최준영  군산 월명중학교 교사> 나 사는 곳은 금강의 끝. 호남평야가 비로소 내달리기 시작하는 곳. 도시를 벗어나면 누렇게 익어가는 벼가 아스라한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고 그 즈음에 낮은 구릉이 너울너울 춤춘다. 길에서 길로 이어지는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영남대로의 길목 ‘문경새재’. 동쪽으로 한참을 달려가는 동안 차창 밖 풍광은 확연히 달라졌다. 한 눈에 보아도 제법 높다란 산들이 고속도로와 나란히 달리고 날이 가물어 바짝 마른 나뭇잎들이 갈색으로 바래간다. 차가 처음으로 멈춘 곳은 충북 괴산의 ‘연풍’이다. 구수한 된장찌개에 식사를 마치고 시끄럽게 들려오는 스피커 소리에 이끌려 ‘조령제’가 열리는 축제 판에 들어섰다. 아삭아삭한 꿀사과를 한입 베어 물고 이곳 사과냐 물었더니 주인장도 신이 나서 먹을 것도 볼 것도 많은 첫날이니 놀다 가란다. 야외무대 너머로 한우, 사과, 옥수수 직판장이 보이고, 군침 도는 맛있는 냄새가 진동한다. 하얀 천막 난장 안에서는 기름에 노릇노릇 구워진 부침개와 쑥갓을 넣고 무친 도토리묵이 아직도 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기웃거리는 머리 희끗한 어르신들을 유혹한다. 스물일곱 해나 이어온 축제인데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줄줄이 놓인 하얀 플라스틱 의자뿐이라 우리라도 수를 보태고 싶으나 갈 길이 멀어 축제의 장을 뒤로하고 연풍초등학교로 향한다. 큼지막한 분홍 꽃을 머리에 인 백일홍은 쌀쌀한 찬 바람에도 담장을 지키고, 감하나 없는 어린 감나무는 큰 잎사귀를 이기지 못해 늘어졌는데, 교문 앞 느티나무는 300년 넘게 살아온 연륜답게 가을 옷을 입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연풍은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가 현감으로 3년여 세월을 보냈던 곳으로 단원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찾아보는 곳이다. 연풍에 머문 짧은 기간 동안 단원은 중국화풍을 말끔히 걷어내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민중들의 삶을 진솔하게 녹여내는 계기를 만든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문화 말살을 위해 동헌 자리에 연풍보통학교를 지었기에 옛날 건물 대부분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그 정취 또한 찾을 길 없이 ‘풍락헌(豊樂軒)’ 한 채만 남았건만 그 마저도 울타리 신세를 지고 있다. 풍락헌은 1766년(영조 42년)에 지어지고, 30년 뒤 단원이 이 자리에 선다. 제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보면 산들이 포근하게 감싼 분지이다. 당시 연풍은 충청도 깊은 산골짜기 울울창창한 숲이었고, 외진 고을이라 자연 일도 없어 한양(漢陽)의 속된 때를 씻고 심기일전해서 자연과 사람들의 삶에 더 깊은 애정을 쏟는 나날이 이어졌을 것이다. 소백산맥이 빚어낸 아름다운 산세가 단원의 눈길을 만나 산수화가 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의 명작을 일궈냈으니 우리는 오늘 한국미술사의 중요한 장에 몸을 담은 셈이다. 메마른 내 눈은 흐릿한 하늘빛을 닮은 우중충한 산색이나 탓하는데 운동장 끝에 우뚝 선 샛노란 은행나무가 손을 흔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문경새재를 향해 차에 올랐다.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고 조령을 넘어 낙향하듯 ‘태길사(泰吉寺)’부터 ‘조령관(鳥嶺關)’을 향해 걸어서 올라간다. 멀리서도 분명히 보이는 ‘조령산’은 거대한 바위가 통째로 비스듬히 누워 낭떠러지를 이루는 것이 마치 장벽 같다. ‘신립 장군(申砬 將軍)’이 이런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길을 따라 오를수록 가을을 찾아 나선 객들의 인파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자연휴양림 표지석 뒤로 20여분 올라가면 영남의 제3관문(嶺南第三關)인 조령관이 나온다. 성채는 허물어져 버렸지만 관문은 꿋꿋이 남았다. 흐름을 단절시키는 것이 관문의 역할이라면 문경새재 이 길은 소통의 길이다.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가던 길이며, 낙동강을 타고 올라온 사람과 물자가 충주에서 시작되는 한강을 따라 서울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길이었다. 그 험준함 때문에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 불렸으나, 산적의 잦은 출몰에도 굴하지 않고 산 아래 주막에서 일정한 수가 모이면 함께 넘던 길이다. 우리 일행들도 함께 이 길을 넘어간다. 조령관을 나서면 꽤 넓은 평지가 나타나고 단풍의 꽃길이 펼쳐진다. 시월의 끝자락에 활활 타오르는 단풍을 볼 수 없어 못내 아쉬웠는데 그런 마음을 싹 지워버린다. 아름다운 흙길과 나란히 달리는 개울을 따라 울긋불긋한 나무들이 우리를 반긴다. 신선들이 몸과 마음의 수련을 마친 후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다고 읊조린 ‘홍귀달(洪貴達)’의 시 그대로이다. 우리가 지나온 길만큼 날은 어두워지는데 사람들은 단풍놀이에 발길을 붙잡혀 떠날 줄을 모른다. 그만 보고 가자 굳게 마음먹고도 한 발자국만 떼면 또 다시 나타나는 새로운 단풍에 마음을 사로잡히고 만다. 사람은 자신만의 길 위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만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던데 우리는 이 길에서 단풍의 역습을 만나 진작부터 나를 잊고 말았던 것이다. ‘조곡관(鳥谷關)’이 가까워지면서 주변이 다시 산으로 포위된다. 조령산으로 뻗은 백두대간이 ‘주흘산(主屹山)’과 ‘부봉(釜峰)’이란 곁가지를 만들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가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가매봉’이라 부르는 부봉이다. 조곡관은 선조 27년(1594)에 ‘신충원(辛忠元)’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이라고도 한다. 바다에서 오는 적으로부터 한양을 지키자면 조령은 나라의 대문과 같아서 기존의 조령관과 주흘관으로는 미흡하여 ‘응암(鷹巖)’에 새로 설치한 것이 조곡관이다. 응암은 조곡관 앞쪽에 놓인 거대한 바위로 마치 먹이를 쏘아보는 매와 흡사하여 ‘매바위’라 한다. 지금처럼 잘 닦인 길이 아닌 옛날 험하디 험한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 이 길을 시인들은 지친 말 부들부들 쓰러질 듯 푸른 병풍 속으로 사라진다고 했다. 조곡관 아래 길가에 ‘산불됴심’ 비석이 있다. 다듬지 않은 돌에 조선 후기 정조 임금 때에 백성들이 알기 쉽도록 한글로 세운 것으로 추측한다. 신구관찰사(新舊觀察使)의 임무교대시 도장을 주고받던 ‘교귀정(交龜亭)’이 있고, 교귀정을 지나면 주막(酒幕)이 나타난다. ‘조령원(鳥嶺院) 터’는 당시 국가에서 운영하던 여관으로, 조령원 말고도 동화원, 불정원, 화봉원, 관음원, 회연원, 견탄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일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인데 지금은 흉가처럼 남겨져 있다. 또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흉측한 V자 상흔을 간직한 소나무들이다. 일제 총독부가 송진을 긁어모으기 위해 만든 상처로 수십 년의 세월이 깊은 상처를 더욱 벌여 놓았다. 그런 소나무가 주흘관에 닿을 때까지 이어진다. 소나무도 깊이 새기고 기억하고 있는 그 시대의 아픈 역사를 환타지로 바꾸려는 뉴또라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주흘관(主屹關)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사방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날이 저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제대로 보지 못한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주흘관을 찾아간다. 가을은 감나무의 계절인가 성문 앞에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러운 주홍색 감과 붉게 물들어가는 잎사귀가 운치 있다. 문경의 진산 주흘산에서 이름을 빌린 주흘관은 다른 관문들보다 옛 모습이 잘 살아있는 곳이다. 개울물이 흐르는 수구문도 있고 외적의 접근을 막는 총안(銃眼)도 구색을 갖추었다. 성의 오른편 ‘성황사(城隍祠)’는 젊은 날의 ‘최명길(崔鳴吉)’이 성황신의 화를 입은 양반집 여식을 구해주었다는 이야기기 전해온다. 성황신이 멸명흥청(滅明興淸)과 강화(講和)만이 살길이란 예언을 일러주었다는데 당시의 민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성황사 뒤로 돌계단이 이어지고 그 곁으로 먹음직스런 새빨간 사과가 익어가는 사과밭이 펼쳐진다. 비에 씻긴 불그스름한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반짝거린다. 아침 햇살이 길게 늘어선 성벽과 단풍든 산줄기에도 어리어 은은한 광채가 아침 한기를 뚫고 맑은 하늘까지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빛 속에서도 내가 찍는 사진은 모두 기념사진 같다. 똑같은 대상을 보고서도 어찌 그리 다른지! 내가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이라 여기는 나무 한 그루로 선생님은 공간의 깊이를 더하고, 나무 그늘 속에 숨어있는 가을까지 찾아내신다. 유교문화관과 도자기 박물관을 둘러보고 경북 예천의 ‘회룡포(回龍浦)’로 향했다. 비룡산(飛龍山)에 올라야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기에, 천년고찰 ‘장안사(長安寺)’ 옆길로 약수터를 지나 가파른 나무계단 길을 올랐다. 팔각정 전망대 ‘회룡대(回龍臺)’ 난간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광경은 멋진 사진 그대로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푸른빛 띠로 마을을 휘도는 내성천(乃城川)과 금빛으로 빛나는 고운 모래밭, 그 위로 수놓아진 황금벌판과 푸른 송림의 모자이크가 빚어내는 마을의 모습은 부용대(芙蓉臺)에서 굽어보았던 하회(河回) 마을과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사진으로 이 장면을 카메라에 멋지게 담아보려 이리저리 애쓰지만 가슴을 뻥하고 뚫어주는 그 시원한 맛은 담을 길이 없다. 섬의 왼편으로 사람들이 구멍 숭숭 뚫리고 삐걱거린다는 ‘뿅뿅다리’를 건너는 모습도 보인다. 가을빛이 가득한 회룡대를 내려와 장안사에 들렀다가 인근 ‘용궁향교(龍宮鄕校)’로 향한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백성들을 가르치던 교육기관으로,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았다. 조선 태조 때에 처음 세워졌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버렸다가 선조(宣祖) 36년(1603)에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을, 인조(仁祖) 14년에 세심루(洗心樓)를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용궁향교의 건물배치는 지면의 경사를 이용하여 삼합문, 세심루, 명륜당, 대성전 순인데, 세심루는 재작년에 찾았던 병산서원(屛山書院)의 만대루(晩對樓)와 닮았다. 굳게 닫혀 있는 ‘바라지창’을 열어젖혀 시원스레 탁 트인 풍광과 늠름한 비룡산 자락을 마주하고 보면 어느 누구라도 마음 깊은 곳까지 말끔히 씻겨지는 기분이 들 것이다. 세심루의 굶은 기둥 밑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 바라보게 되는 명륜당은 2층으로 쌓은 돌 기단에 정면 5칸짜리 기와집이다. 단청이나 장식이 없는 전형적인 유학(儒學)의 공간으로 소탈 그 자체인데, 살짝 들린 지붕의 추녀 끝은 새가 날개를 펴고 날아 갈 듯한 긴장감과 아울러 아름다운 선을 보여준다. 기와지붕 위로 넓게 퍼진 하늘은 어제의 꿀꿀한 빛깔을 완전히 잊은 듯 투명한 파란빛으로 어울리는 것은 모두 빛나게 한다. 그 아래 마루에 걸터앉은 사람들도 가을 햇빛을 가득 머금어 환한 빛을 뿜어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가을 속에 모두 빠져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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