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 |
[박물관 대학]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관리자(2009-01-13 12:03:04)
우리 그림의 긍지와 어엿함 <이원복 국립전주박물관장, 한국미술사>
우리나라에 금강이 솟아오르니 [東國金剛出]
중국 땅 오악이 짜부라지도다. [中原五嶽低]
우리 산천, 우리 그림
위에 언급한 짧은 글은 우리 강토에 대한 긍지와 애정이 짙게 배어 있으니 민족적 자존自尊의 발로로 보인다. 1999년 5월 황병근 선생이 국립전주박물관에 기증한 5천여 점의 유물에 속해 있다. 금강산인金剛山人이라 자호自號한 그의 선친 황욱黃旭,1898-1993 선생이 타계 두 해 전인 1991년 94세 때 쓴 노필老筆의 행서대련行書對聯이다. 고려와 조선왕조 건국과 관련 된 각기 14세기 초와 말에 제작된 <칠니소병漆泥小屛>(1307년)이나 <이성계발원사리구李成桂發願舍利具>(1391년) 등 두 유물의 존재는 이 산이 지니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민족은 나름대로 신화와 상징성 지닌 신령스런 영산靈山을 지닌다. 유대인에겐 모세가 십계판을 받은 시나이산이, 중국은 태산·화산·형산·항산·숭산 등 오악五嶽, 일본은 열도 가운데 우뚝 솟은 후지산[富士山]이 이를 대변한다. 우리에게도 금강산·묘향산·지리산·백두산·삼각산 등 오악이 있다. 이 중 금강산이 대표적이며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험난한 산세로 접근이 어렵고 이와 더불어 고구려와 신라의 변경邊境이라는 지정학적인 요인에서 심산深山으로 원시림原始林이나 처녀림處女林 상태로 유지되었다. 고려 말 원 지배하에, 그리고 조선왕조 후기의 탐승探勝, 20세기 초 망국에 따른 민족적 긍지와 일제강점기 관광지 개발, 그리고 1990년대 말 새로운 조명으로 이어진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국문학사에서 탐승기행 문학의 측면에서 금강산을 읊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주제로, 조선후기를 크게 풍미한 이른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탄생과 변천에서 이 산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 시대나 민족 가릴 것 없이 문화 전반은 국제적 보편성普遍性과 민족적 특수성特殊性이 혼재混在한다. 우리나라는 동방의 외딴 섬이나 오지奧地가 아니며 천애고도天涯孤島는 더욱 아니다. 불교佛敎와 유학儒學이 보여주듯 유형, 무형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적극, 능동, 선별적으로 받아들여 탄생지보다 진일보進一步한 모습으로 탈바꿈 했다. 인류에게 과거는 단지 추억追憶으로 아름다운 것인가. 추억의 축적蓄積이 문화인가. 한 화가의 뛰어난 역량力量과 도달한 위대한 경지境地, 드높은 예술성藝術性은 작가의 생존 시기에 머물지 않고 시대를 뛰어 넘는다. 이를 고전적 가치라고 하던가. 한 개인화풍이 그가 산 시대화풍이 되니 획득된 고전성古典性은 긴 생명력으로 지속된다. 이 분출奔出하는 생명력은 새로운 창작의 에너지원으로 새로운 꼴을 이룬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 그것 아닌가. 일개인 삶에도 건강의 기복起伏이 있듯 국가나 민족도 문흥文興이 빛난 시기와 쇠퇴기가 있다. 창작의 한계에 봉착한 작가뿐 아니라 정신적 피폐로 고갈枯渴을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위대한 예술은 변화를 준다. 창작력의 소생과 삶에 의욕을 주는 감로수甘露水가 된다. ‘우리 문화의 황금기’ 조선후기 진경시대는 여러 요인으로 탈진한 우리 현대미술에 힘을 줄 것이다. 한국화韓國畵가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것이다.
산수화山水畵
- 한자문화권 그림의 광채光彩
동양 특유의 산수애山水愛와 자연관自然觀을 바탕으로 빚어진 것으로 한자문화권 그림 가운데 가장 중시되는 빛나는 업적이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자연의 모방模倣에서 유래한다. 아름다운 경치는 이를 오래 기억해 지니고 싶고 화폭畵幅에 옮기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점은 인간의 보편성이기에 우리뿐 아니라 중국도 일찍부터 아름다운 명승지名勝地를 화면에 담았다. 실경산수는 산수화의 탄생부터 소급되니 그 역사는 길고 오래다. 유교·불교·도교 등 동양의 오랜 전통적인 사유체계는 의연한 대자연을 위대하게 여겼다. 이에 비해 인간은 미소微小한 개체로 보며, 늘 자연에 대한 경의敬意의 마음을 이어왔다. 흉중구학胸中丘이란 단어처럼 점차 실제의 경치를 보고 사생寫生하지 않고도 그리는, 화가의 가슴 속에 담긴 이상화理想化 된 위대한 자연경을 표출했다. 이에 관념산수觀念山水나 정형산수定型山水라는 서양에는 없는 독특한 그림 세계를 이룩하였다. 이는 상상화想像畵보다는 화가의 손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자연경이며 우주라 하겠다. 산수화는 서양의 풍경화風景畵보다 적어도 500년 이상 앞섰다. 중국 오대五代 10세기 전반前半과 송대宋代에 거장巨匠들이 다수 출연하여 골격骨格과 틀을 갖추었으며 이어 이 분야의 대가들이 다수 출현하였다. 원대元代에는 서정성抒情性과 문학성을 불어넣어 점차 시와 글과 그림을 함께 한 이른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지칭되는 문학과 미술, 그리고 학예일치學藝一致로 정리되는 종합예술로 성장된다. 그러나 차츰 얼빠진 몸이 인간이 아니듯, 자연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산수화의 종말終末을 고하기에 이른다. 서양과 마찬가지인 풍경화風景畵로 접어들게 된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까지 현존하는 그림이 드물며 산수화가 거의 없어 그 구체적인 변모와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고대회화로 고구려 무용총舞踊塚 벽화의 수렵도狩獵圖나 강서대묘江西大墓의 산악山岳 표현을 통해서 동양 산수화의 준법의 형성과정에 우리 민족이 기여寄與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중국 산수화와 크게 구별되는 독창적인 진경산수는 우리의 자연과 우리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으로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의 완성과 힘입어 중원이 명明에서 청淸으로 교체할 때 조선이 세계의 중심中心이라는 문화적인 자부심自負心과 민족적인 자의식自意識의 분출로 탄생된 것이다. 우리 산천山川을 소재로 화폭에 담은 진경산수眞景山水는 조선 후기 화단에서 크게 유행했다. 맑고 투명한 하늘 아래 수려한 자태로 빛나는 실제 경치를 그린 점 외에 고유색固有色 짙은 독특한 양식樣式을 이룩했다. 이에 빛나는 문화유산이며, 조선 회화의 어엿함과 긍지矜持를 명쾌히 드러내 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그림의 법본範本이 된 독자적인 화풍畵風이다. 이 화풍의 성립은 이미 생존 당시 화종畵宗으로 지칭되었으며 오늘날 ‘조선의 화성畵聖’으로 불리는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에 의해서다. 하지만 정형산수와 진경산수는 결코 대립 관계는 아니다. 우리 강토 풍광을 배경으로 우리 복색服色의 인물이 등장한 진경산수를 강조하다 보면 동시대와 그 이전과 이후 그림들, 이른바 국제적 흐름에 동참한 정형산수나 남종화南宗畵로 지칭되는 그림 전체를 중국의 단순한 모방이나 아류로 잘못 인식될 소지가 크다. 중국풍의 그림으로 간주되기 쉬운 이들 그림들 또한 민족과 국가간 미감美感의 현저한 차이에 의해 중국 그림과는 크게 구별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실경산수에 대해 진경산수는 실경산수의 긴 흐름 가운데 정선에 의해 성립되어 크게 유행한 화풍에 있어 독자성과 개성이 뚜렷한 조선후기 그림만을 지칭한다. 미술사美術史 회화에서 사용된 용어가 그 시대를 대변하는 이른바 진경시대眞景時代라는 역사 용어도 사용되게 되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전체의 보편적인 시각에서 살필 때 진경산수는 과대포장過大包裝되었고, 진경시대란 용어가 타당하지 않다고 학계 일각一角에서는 보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 화단 일정 시기에 전과는 크게 구별되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파천황破天荒의 그림 세계의 엄존儼存, 그 실존을 부인하긴 힘들 것이다.
실경實景에서 진경眞景으로
- 나라, 겨레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自負心
진경산수화는 화단 일각에서 극소수에 의해 잠깐 유행한 것이 아니다. 실개천이 아닌 장강長江에 비유되는 거대한 흐름이다. 취미로 그림을 즐겨 그린 지식층 문인화가와 회화를 관장하는 기관인 예조 산하 도화서圖畵署에 속한 화원畵員 등 전문적인 직업화가 등 모두가 두루 참여했다. 화단에서 도도한 큰 흐름을 보이며, 화풍에 있어 우리 그림의 고유색과 특징을 십분 드러내 보여준다. 이 분야 명품名品과 걸작傑作들이 다수 전래되고 있다. 이들 그림이 크게 풍미한 후기 화단에 대한 조명과 고찰은 우리 그림, 오늘날 현대 한국화에 시사하는 점 또한 적지 않다. 주지되듯 임진왜란 이전 시기 옛 그림의 전래는 몹시 영성零星하다. 하지만 이미 고려시대에도 <예성강도>, <진양성도>와 같은 실제 명승지를 그린 예를 문헌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당시 원 황실에서 금강산에 대한 그림의 요구가 적지 않은 사실로 미루어 이 시대에 <금강산도>를 그렸음도 확인되며, 비록 종이나 비단의 화면에 그린 것은 아닌 흑칠한 나무판에 금니로 그린 <칠니소병>이 남아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877-943)이 금강산에서 담무갈보살을 만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를 살필 때 조선 후기 18세기 정선의 필치와도 공통점이 보여 주목된다. 이와 같이 금강산에 대한 그림은 조선조에도 이어져 화원들이 이를 제작한 기록이 적지 않게 산견된다. 정선에 앞서 화원 한시각韓時覺(1621-1691)이후은 1664년 함경도 길주목에서 별도로 특별히 실시한 문무文武 양과 과거시험을 주제로 제작한 일종의 기록화로 <길주과시吉州科試>와 함흥 관아에서 과거 합격자 발표 장면을 담은 <함흥방방咸興放榜>의 두 폭과 합격자에 대한 좌목을 담아 긴 두루마리[卷]로 꾸민『북새선은도권北塞宣恩圖卷』과, <칠보산七寶山> 등을 그린 서화첩인『북관수창록北關酬唱錄』이 현존되어 변방에 속한 길주나 함흥 등지를 그린 17세기 실경산수로 제시된다. 진경산수의 선구는 비록 전래된 작품은 없으나 17세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조속趙涑(1595-1668)임을 일찍이 문인이며 사학자인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천명闡明한 바 있다. 그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동참하여 성사에 일익을 담당했으나 관계官界를 멀리하고 평생 개결介潔한 선비의 삶을 지켰다. 서화書畵로 자오自娛하여 금강산을 탐승하며 이를 시로 읊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문헌에 의할 때 종실출신宗室出身 문인화가 이경윤李慶胤(1545-1611)이 그보다 두 세대 앞서 금강산을 그렸음이 확인돤다. 이에 앞서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선비들의 모임을 담은 15세기 이래로 적지 아니한 그림이 현존하는 계회도契會圖 또한 우리 산천의 풍광을 담고 있어 진경산수의 선구적인 면이 감지되어 중시된다. 우리 식으로 국풍화國風化가 이루어진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사생을 통해 이를 새롭게 발전시킨 진경산수화는 정선의 몫이었다. 그는 중국 산수화에 있어 오랜 숙제였던 선묘線描 위주의 화북산수華北山水와 선염渲染 위주의 강남산수江南山水를 절충 · 조화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전개하였다. 화북산수는 투명한 대기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산세를 필선[用筆] 위주로 나타냈고, 강남산수는 늘 안개가 끼고 물이 많은 강남의 풍경을 먹의 번짐[用墨]을 통해 표현했다. 정선은 진경산수에서는 토산土山과 암산巖山에 이 양자의 절묘한 조화를 이룩해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성공적으로 묘사했다. 골산骨山이 많은 노년기 우리 산천을 그림 소재로 삼아 바위나 산을 마치 서릿발과 비슷하고 피마준과도 친연성이 보이는 반복된 수직선으로 표현했다. 그가 창안한 이 독특한 준법은 겸재준 또는 금강산준이라 지칭된다. 이 준법으로 중국 산수화와 구별되는 산악 표현으로 독자적인 우리 그림 세계를 이룩하였다. Leeum 삼성미술관 소장품으로 정선이 59세에 그린 <금강전도金剛全圖>와 76세에 그린 <인왕제색仁王霽色> 두 대작의 진경산수는 각기 국보 217, 216호로 지정되었다. 정선이 그린현존 가장 이른 금강산도는 1771년 36세에 그린『풍악도첩楓嶽圖帖』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금강내산총도> 등 모두 13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60년 이상 그림 그리는 붓을 놓지 않고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두루 화폭에 담았으니 북으로는 함경도로부터, 남으로는 경상남도에 이르는 여러 명승지가 두루 등장된다. 그가 즐겨 그린 지역은 금강산, 한강 주변의 풍경, 서울 성내의 모습들로 크게 셋으로 나뉜다. 특히 60세를 전후한 무렵 큰 발전이 이루어져 독창적인 그림 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화풍을 따른 화가들을 겸재파謙齋派 또는 정선파鄭敾派로 지칭된다. 정선파에 속한 화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금강산 등 진경산수를 남기고 있는데 정선화풍의 강한 울림이 주는 공통점과 더불어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화가 나름대로 구별되는 독자성을 드러내고 있는 점도 중시된다. 사인화가들은 기행사생첩紀行寫生帖등이 중심이 되며 당시 적지 아니한 화첩이나 횡권橫卷이 제작되었음을 오늘날 전하는 그림들을 통해서도 짐작케 된다.
한국화韓國畵
- 우리 그림, 눈부신 문화 역량
진경산수는 정선과 동시대를 함께 한 화가들과 다음 세대 등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어 크게 풍미했다. 예술이 정치와 사상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아닐지라도 진경산수의 탄생에서 조락 과정은 달 항아리로 대표되듯 도자를 비롯한 공예 나아가 예술전반에서 고유색이 두드러진다. 문인화가로는 남종화의 국풍화國風化에 회화사적 의의가 큰 심사정沈師正(1707-1769)도 어린 시절 정선에게 그림을 배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진경산수는 드문 편이나 해금강을 담은 <해암백구풍범海巖白鷗風帆>이나 금강산 자락을 그린 소품들이 몇 점 전해온다. 강세황의 벗 허필(1709-1768)은 <관동팔경병關東八景屛>과 <총석정叢石亭>을, 추사가 18세기 전반 가장 뛰어난 문인화가로 높게 평가한 이인상李麟祥(1710-1760)은 <장백산도長白山圖>와 <구룡연九龍淵>, 김윤겸金允謙(1711-1775)은 1774년 경복궁 배산背山 <백악산白岳山>과 축을 첩으로 개장한『봉래도권蓬萊圖卷』등을, 18세기 예원藝苑의 총수總帥 강세황姜世晃(1713-1791)은『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이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45세인 1757년경 새로운 시각과 구도로 고려의 수도 개성과 주변 <박연朴淵> 등 명승지를 탐승하고 16폭에 담은 것이다. 아울러 1788년 76세 때 막내 아들과 김홍도 등과 금강산을 탐승하고 남긴『풍악장유첩楓岳壯遊帖』도 현존된다.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11대손인 정수영鄭遂榮(1743-1831)은 한강과 임진강 일대를 담은 26폭을 이은 16m에 이르는 긴 두루마리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과 『해산첩海山帖』등을 남기고 있다. 활달한 필치에 지두指頭 등 이색화풍異色畵風의 선구로 주목되던 윤제홍尹濟弘(1764-1844),이후은 <박연폭>, <세검정>, <화적연> 등 실경을 담은 진경산수와 남종화 및 사군자 등 15점 그림과 시문으로 구성된 화첩인『학산묵희첩鶴山墨戱帖』과 <한라산>과 <옥순봉> 등을 지두로『학산구구옹첩鶴山九九翁帖』등을 남기고 있다.
직업화가로는 금강산 일괄 화첩이 전해지는 정충엽鄭忠燁(1710경-?), <표훈사도>를 남긴 최북崔北(1712-1786), 1748년 부산에서 일본 에도까지 조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간 장소를 두 두루마리 30폭에 옮긴『사로승구도권』을 제작한 이성린李聖麟(1718-1777), 김유성金有聲(1725-?), 서양화 유입을 시사하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도화동에서 바라본 인왕산을 그린을 그린 강희언姜熙彦(1738-1784)이전 김홍도에게 <금강산도>를 그려준 김응환金應煥(1742-1789), 정조正祖(1752-1800)의 명을 받고『금강사군첩』과 <관동팔첩병> 등 다수의 걸작이 전해지는 김홍도金弘道(1745-1806)이후 단원의 친구로 <도봉산사계도>, <발연鉢淵>과 <수옥정漱玉亭>등을 남긴 이인문李寅文(1745-1824)이후를 먼저 들게 된다.
<도봉산도>를 남긴 김석신金碩臣(1758-?), 청풍과 단양 등 사군의 명소를 그린『사군강산참선수석첩四郡江山參僊水石帖』과 <관동팔경첩병>을 남긴 이방운李昉運(1761-1815)이후 이른바 위항문인委巷文人들의 인왕산 자락에서 연 시회詩會를 담은 『옥계십이승첩玉溪十二勝帖』을 그린 임득명林得命(1767-1822), <금강팔경도> 등을 남긴 거연당居然堂(18세기), 어해도魚蟹圖에도 이름을 얻었으며 <만폭동萬瀑洞>과 <해악도팔첩병海嶽圖八疊屛>을 남긴 조정규趙廷奎(1791-1860)이후, 김득신의 아들로『풍악권』과 내외금강과 설악산과 동해안 관동일대를 25점에 옮긴『해산도첩海山圖帖』을 남긴 김하종金夏鍾(1793-1875)이후 단원풍이 짙은 <구룡폭> 등을 남긴 엄치욱嚴致郁(19세기) 등에 고루 영향을 끼쳤다.
진경산수는 조선말기 화단에 접어들자 남종문인화의 큰 흐름에 의해 쇠퇴케 되나 민화民畵에 옮겨 또 다른 상황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후기 화단이 보여준 독자성과는 거리가 있다. 근대 화단에 이르러서도 금강산을 비롯한 명승을 그린 실경산수를 찾아볼 수 있다. 근대로 이어지며 김규진金圭鎭(1868-1933)과 김은호金殷鎬(1892-1979), 이상범李象範(1897-1971), 변관식卞寬植(1899-1976), 배렴裵濂(1911-1968), 정종여鄭鍾汝(1914-1984), 박생광朴生光(1904-1985) 등에 이어 오늘날 화단에도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강한 울림에 힘입어 각기 구별되는 자신의 색깔로 작품을 하는 이들이 여럿에 이른다.
진경산수화와 오늘
- 고전 양식을 이룬 우리 미감美感
한국적韓國的이란 용어는 예술에 있어 다른 나라와 구별을 가능케 하는 우리적인 독자성, 특징, 개성 등을 지칭하는 의미로 자주 회자膾炙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헤아릴 때 선명치 못한 경우가 왕왕 있다. 그 실상에 대한 뚜렷한 인식 없이 목적의식이 우선해 다소 막연하거나 추상적이 될 소지가 없지 않다. 한국적이라 할 때 우선 어느 시기나 왕조를 지칭함인지, 아니면 수 천 년에 이르는 긴 기간 모두를 아우르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미감이란 것도 바뀌는 것이니 고대와 중세, 오늘날이 동일하지 않다.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같은 우리적으로 부를만한 것들이 과연 있는가의 존재여부存在與否는 차치하더라도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만의 특징은 아니다. 인류에 두루 편재遍在한 보편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 마치 영구불변永久不變의 법칙인 것처럼 호도糊塗될 소지도 없지 않다. 민족성民族性도 마찬가지이겠으니 미적 정서도 바뀌는 것이다. 해서 변화 과정에서 우리적인 특징을 살피고 찾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1970년대 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미술사학계 연구 성과는 괄목된다. 특히 회화사 분야 연구는 심도深度와 대상 분야의 확장擴張은 물론 발표논문 수에서도 단연 두드러진다. 서화書畵는 한자문화권 전통사회의 미술, 즉 조형예술에서 그 대명사로 첫 번째 위치를 점한다. 조선시대나 근대뿐 아니라 오늘날 종이나 비단에 전통적인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일반적으로 동양화라 칭한다. 이는 그림은 도자陶磁나 목칠木漆 등 공예에 비해 독자성獨自性이나 개성個性 측면에서 그 특성이 덜 두드러져 중국의 한 아류亞流로 보는데서 기인된다.
이 기우杞憂를 불식拂拭시킨 것은 조선후기에 대한 분야별 다각도 조명과,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에서 1971년 가을 개최한 ‘겸재 정선’을 필두로 진경산수화(1981)·진경시대 시서화(1985)·진경풍속(1988)·진경시대 인물화(1995)·진경시대전(1996) 등과 국립광주박물관에서 1987년 개최한 ‘진경산수화’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99년 개최한 ‘아름다운 금강산’과 일민미술관의 ‘몽유금강夢遊金剛’ 그리고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연 ‘우리 땅, 우리의 진경’ 등 지금까지 진경산수를 주제로 개최한 일련의 대규모 기획전에 힘입은바 크다. 분명한 사실은 한·중·일 동양삼국東洋三國은 유사함이 없지 않으나 차별差別 또한 큰 점에 대한 인식이다. 이와 같은 차이가 보다 선명한 독자성이 두드러진 시기가 다름 아닌 진경산수화로 대변되는 조선후기 ‘우리 문화의 황금기’이다. 해서 진경시대란 용어가 타당성을 지닌다. 역사의 흐름을 살필 때 마치 주자성리학이 조선성리학으로 성장한 토착화土着化가 그림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을 보인 것이다. 다름 아닌 지방양식이란 지역적 편협偏狹과 고루성固陋性을 흔연히 탈피해 시공을 초월한 예술적 성취를 이룩함이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이다. 오늘의 문제에 답을 여기서 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빛나는 시대를 조명하는 것은 창의력創意力을 소진消盡한 중세가 고대古代 걸작傑作들과 조우遭遇로 르네상스가 열린 것과 진배없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매우 자연스런, 그러나 절실切實하고도 소중한 행동거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