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 | [서평]
【서평】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2000, 박완서, 실천문학사)
속물들의 풍속과 사람다움의 길
이희중 문학평론가·전주대 교수(2003-07-03 14:57:26)
박완서의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은 풍속소설 또는 세태소설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소설의 얼개는 두 개의 동그라미로 도식화할 수 있는데 이 동그라미는 가족을 뜻한다. 송회장네와 영빈이네가 그 두 가족이며 이 두 혈연집단은 혼인으로 엮어져 있다. 고희에 이른 노 여성작가는 이 두 동그라미에 소속된 여러 사람의 내면을 섬세하고도 실감나게 그려내어 풍속소설로서 이 작품의 면모를 다채롭게 하고 있다.
주인물은 서울의 어느 대학병원 호흡기내과 과장인 영빈이다. 영빈은 대체로 사려깊고 분별 있는 사람으로 전편에 걸쳐 독자에게 세상구경을 시켜주고 병든 세태를 보는 작가의 시선과 함께 한다. 영빈은 편모 슬하에서 자란 이남일녀의 중간이다. 형 영준은 장남의 역할을 어지간히 다한 후 미국에 가 살며, 막내 유복녀 영묘는 송회장네의 며느리가 된다. 이들 삼남매와 어머니는 대체로 속물적 풍토에 덜 오염된 가족들이다. 이 작품의 암묵적 전제에 의하면, 이는 그들이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면 송회장네는 이 소설이 풍자하려는 속물성과 물신주의에 철저히 찌든 준재벌 집안이다. 영묘의 남편이자 송회장네의 장손인 경호의 병환과 사망은 이 소설의 중심사건이며 이 과정에서 송회장네 식구들의 속물성은 독자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송회장네는 돈만을 바라보며 돈의 확보와 관리에 모든 것을 건다. 따라서 사람의 도리와 분별을 항상 돈보다 뒷전이다. 그들은 장손의 병이 치유 못할 중환임을 환자 자신은 물론 상징적 우두머리인 할머니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그는 가족들의 체면과 모양내기의 제물 신세를 면치 못한다. 섬세하고 인간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던 경호는 경영 후계자 만들기에 휘말려 자신의 삶을 왜곡 당하고 누적된 강박이 결국 나쁜 병을 키웠던 것이다. 특히 환자가 죽음에 대비할 수 없게 함으로써 망자의 가족, 곧 아내 영묘와 두 아이가 거의 무일푼으로 시가에 예속되게 되는 사태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발병 단계부터 여동생의 간청 때문에 내키지 않아 하며 매제의 병을 지켜보게 되는 영빈은 사돈 집안의 비인간적 처사에 사사건건 환멸을 느낀다. 돈 많은 집안의 맏아들이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이런저런 웃지 못할 정황은 이 소설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이야기의 줄기이다. 작가는 이 중심줄기에 몇 개의 주변적 이야기를 이어 놓음으로써 이 평범하달 수도 있는 세태소설을 더 모양 좋은 소설로 빚는다. 곁다리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이 소설의 머리에서 매우 특별한 계기로 시작되는 영빈의 외도이다. 영빈은 우연히 국민학교 동창 현금을 만난다. 그녀는 옛날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던 두 남학생, 영빈과 한광이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도록 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준 인물이다. 오랜 동안 만나지 못하고 살았지만 영빈의 마음속에는 항상 현금이 있었다. 말하자면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활달하고 자유롭게 살아오며 사십대 중반까지 여전한 매력을 유지하고 있는 현금에게 끌려 영빈은 불가항력적으로 외도를 시작하게 된다. 경호의 병으로 양가가 어수선한 와중에서도 이어지던 불륜은 경호가 사망한 후 이 소설의 대단원에서 의미 있는 파국에 이른다.
영빈은 착한 아내와 사이에 딸 둘을 두었다. 영빈은 아들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낸 바 없었지만, 막상 아내는 마음이 편치 않아서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가 된 영빈의 국민학교 동창 한광의 병원을 드나들며 두 번씩이나 아이를 지운 끝에 소망을 이룬다. 병원에서 영빈의 아내와, 영빈의 아이를 갖고 싶어 뒤늦게 동창의 병원을 다니던 현금은 친해지게 된다. 그녀가 영빈의 아내임을 안 현금은 처음으로 도덕적 자성을 겪으며 영빈과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이 과정에서 부각되는 것이 자매애(sisterhood)이다. 이미 여성학의 중요한 용어로 자리잡은 자매애는 같은 여성끼리 나누는 동지적 사랑을 말한다. 이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약자끼리의 무의식적 연대일 수도 있고, 남성들이 만든 속악하고 타락한 사회에서 2세의 생산을 담당한 성으로서 지켜야 하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의 방법적 표현일 수 있다. 여기서 현금의 자각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변화를 겪으며 생동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또 다른 곁가지는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영준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시종 영준은 가족의 굴레를 털고 떠나버린 무책임한 장남으로 비친다. 영묘와 사돈 집안의 속물적 행태를 직접 겪으며 번민하는 영빈에 비해 그는 늘 국외자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여러 번에 걸친 영빈의 간곡한 전자편지에 일언반구 회신이 없는 대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영준이 자신의 모교에 10억 원을 기증하게 되어 일시 귀국을 하게 된다. 영빈은 형과 흉금을 턴 대화를 나누면서 형에 대한 오해와 섭섭함을 풀고, 형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가족애를 확인한다. 영준은 능란한 수완으로 속물들의 세상을 희롱하는 사람이다. 그는 결국 송회장네 사람들의 특징인 물신주의와 허례를 오히려 역이용하여 여동생을 구출하여 미국으로 데려가는 데 성공한다.
이 작품은 사람답게 사는 길과 그 의미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한 가족의 풍속도를 통해 돈이 어떤 형태로 사람다움을 파괴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며, 또 다른 가족을 통해서는 사람답게 사는 길이 현실에서 어떤 고통과 소외를 감내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사랑에 희망을 건다. 결국 우리가 믿을 것은 사랑뿐이지 않은가. 그 사랑의 열쇠를 작가는 아주 가까운 곳, 즉 자매애와 가족애에서 구하자고 우리에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