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5 | [삶이담긴 옷이야기]
시대를 읽는 디자이너, 코코샤넬
최미현 패션 디자이너(2003-06-02 14:16:13)
성공한 디자이너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들은 시대가 앞으로 어떻게 바뀔 것이며 사람들이 어떤 물건들을 즐겨 사용하게 될 것인가를 미리 알고 있었다. 동물적인 감각이든 지적인 능력이든 이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 명품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샤넬은 이런 의미에서 혁명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귀족적이고 우아함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샤넬은 사실은 하류층 출신이다.
시장에서 시장으로 떠돌며 장사를 하던 부모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1883년
8월 13일 가브리엘 샤넬을 출산한다. 이것은 기독교 윤리가 엄격하던 당시의 풍습에서
그녀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그 후 부모는 정식으로 결혼을 했지만 자신이
사생아라는 생각은 평생 샤넬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힌다.
12살 때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언니와 함께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성장하면서 바느질을 배우게 된다.
19살 때 그녀는 물랑에서 양복점 조수로 일하게 된다. 이곳에는 장교 훈련소가 있었고 이 양복점 역시 젊은 장교들이 군복을 맞춰 입던 곳이었다. 에티엔느 발산이라는 부유한 청년
장교와 사귀던 그녀는 그의 성에서 손님으로 생활을 하게된다.
그런데 그 당시 샤넬의 꿈은 패션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수가 되는 것이어서 주말이면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코코라는 별명도 그녀가 노래부를 때 수탉처럼 목을 길게 빼는 습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 불어로 수탉은 coq, 부르기 쉽게 coco로 변했다는 것이다.-
샤넬은 에티엔느 발산을 통해 상류층 젊은이들과 교제하게 되고 자신에게 가수보다는 모자
만드는 것에 더 소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908년 파리에 자신의 모자점을 열어서 성공하게 된다. 그 후 보이 카펠이라는 젋은 영국
사업가를 만나게 되고 그의 지원으로 당시 파리에서 유명하던 깡봉가 21번지에 자신의
부티끄를 열게된다.
당시 파리에서는 자크 두세나 폴 포아레 같은 화려한 의상을 만드는 디자이너들이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샤넬은 이와 반대로 상당히 남성적인 의상들을 제작한다. 그래서 다른 디자이너들로부터 빈민을 위한 옷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일차 대전당시 샤넬은 도빌에 상점을 열고 저지와 스웨터를 판다. 전쟁 당시 여성들도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스커트의 길이가 짧아지고 바지를 입게 되며 면 같은 실용적인 소재를 선호하게 되었다.
1917년 사넬은 당시 남성복에만 사용되던 저지를 여성복에 도입하여 활동적이고 편안하고 젋은 의상을 만든다. 사업은 승승장구해서 그녀는 많은 예술가 친구들도 생기지만 그녀가 사랑했던 보이 카펠은 1918년 레이디 다이애너 윈드함과 결혼하고 191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동차 사고로 죽습니다. 그런데 1919년은 개인적으로는 불행했지만 사업으로는 더없이 번창해서 나를 유명하게 만든 해라고 샤넬은 뒤에 말하고는 했다고 한다.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시대를 읽는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이 점차 사회에 진출하여 일을 하게 되고 보다 실용적이고 다목적 적이고 동시에 품위 있는 옷을 원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렸던 것이다.
단순한 의상에 섬세한 아름다움을 첨가하여 그 당시 실용성을 중시하던 모더니스트 이론과 잘 어울렸던 것도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이유이다.
진보적인 사고와 자신이 하고있는 일에 대한 열정과 아울러 자신이 만든 의상을 생활과 일치시킨 점등이 성공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샤넬은 여성들이 진짜 진주를 사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모조품을 이용한 악세서리를 만들었고 1923년 자신의 40세 생일을 기념하여 샤넬 향수 5번을 출시하는데 80가지 이상의 합성물로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토탈 브랜드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브랜드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다.
샤넬의 장점은 여성들이 무었을 원하는지를 가장 먼저 알았다는 것이고 여러 과감한 시도를 하였으며 동시에 품위있고 독립적이며 귀족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가장 앞장선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