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 | [세대횡단 문화읽기]
문학이여, 돌보지 않아도 저 홀로 피는 민들레여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3-06-02 12:19:00)
-편집자주-
금강 지류가 시인의 집 앞을 끼고 흐르는데, 시인은 그곳을 시내라 하지 않고 강이라 불렀다. 억새가 흐드러지고 물결이 저리 도도한데, 어찌 시내라 할 수 있겠느냐며.
지난하고 굴곡 많은 삶을 살았지만, 흔들리지 않은 꼿꼿한 시대정신은 시인을 세차게 깨워 일으켜 문학을 낳았다.
나약해진 문학과 혼이 없는 문학은 죽었다고 말하는 최형·문병학 시인이 만났다. 30년의 연배차이에도 불구하고 지사적 기질과 강단진 성품, 선 굵은 시 쓰기가 두 시인의 닮은꼴이다. 질곡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그 자신 시대의 희생자였으나 그 속에서 문학에의 꿈과 열정을 키웠던 것도 두 선후배 시인의 공통점이다.
익산 함열의 변두리 외딴집에서 홀로 사는 최형 시인은 '빨갱이'로 몰린 수난의 가족사를 새기며 불행한 청장년기를 보냈지만, 시문학과 사회운동으로 삶을 지탱하며 시대와 당당히 부딪혀 온 대표적 서사시인, 참여시인이다. 문병학 시인 역시 학생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에 뛰어들어 군부독재시절을 고단하게 보냈고, 6.15 정상회담으로 지금은 평양으로 귀환한 비전향장기수를 5년 동안 보살펴 주위를 놀라게 한 강단진 시인이다.
두 선후배 시인은 시대와 역사의 질풍 속에서 결코 변질될 수 없는 문학의 꿈과 문학인의 정신을 이야기했다. 안이한 말장난이나 말재주에 그치는 시문학은 기만이고 거짓이라고 말하는 이들, 문학에 대한 이들의 강건한 소신이 시대와 문학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시인 최형·문병학
문 : 선생님,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지난번보다 더 건강해보이시고, 봄꽃같이 환한 선생님 모습을 뵈니까 기쁩니다.
최 : 고맙네. 문 시인이야말로 한창 젊을 때니까 꽃처럼 환해야지. 나는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허리가 좀 안 좋기는 해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지.
문 : 네. 삼례, 금마를 거쳐서 선생님 댁에 왔는데 오는 길에 봄꽃들이 하도 꼬셔서 오다가 왕궁리 5층 석탑에 잠시 들러 해찰하다가 왔습니다. 햐, 정말 봄꽃들 이쁘더라구요. 선생님 덕분에 생각지도 않았던 봄꽃구경을 다 했습니다.
최 : 아, 그랬어? 나는 아직 봄꽃구경을 제대로 못했는데.
미국의 승리는 지구상 가장 더러운 승리
문 : 선생님, 늘 건강하셔야 합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동료 선후배들이 저와 한 마음일 겝니다. 선생님 뵙자마자 봄꽃 이야기를 꺼냈는데, 사실 제 속은 아주 두엄자립니다. 그냥 속상해서 환장할 지경입니다. 봄꽃향기 속에 화약 냄새가 진동해서 몹시 언짢고, 화나고 그렇습니다. 미국과 이라크 전쟁이 며칠 전에 끝났는데, 미국이 승리했지요. 미국의 승리... 그냥 신문이건 텔레비전이건 꼴도 보기 싫어서 며칠동안 쳐다도 안 봤습니다.
최 : 내가 지금 팔순에 가까운 나이인데도,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부시만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린다고. (모두 웃음) 한 일주일 전에 문규현 신부님, 수경스님이 전쟁반대를 위해서 삼보일배를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참여를 해봐야겠다 싶어 찾아가 봤거든. 삼보일배라는 게 세 걸음 걷다 한번 절하고, 세 걸음 걷다 다시 한번 절하고, 그런 식인데, 나이든 분들이 그리 하시는 걸 보니 눈물겹더라고.
문 : 예. 전쟁, 제 잇속을 위해서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이 다른 사람, 다른 집단을 파멸시키는 전쟁은 정말 미친 짓입니다. 전쟁은 인류역사에서 하루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최 : 의식 있는 사람은 이 전쟁이 얼마나 큰 횡포고, 일방적인지 알고도 남는단 말이지. 미국이 승리는 했지만, 아마 지구상에서 가장 더러운 승리일 거여. 명분도 없고 아주 더러운, 그야말로 깡패식 전쟁이란 말이지. 이번 전쟁의 속뜻은 석유 전쟁이여. 만약 후세인이 석유를 놓고 미국에 배려를 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몰라. 10년 전에 이미 경제봉쇄로 이라크를 박살내버린 미국이 이제 대놓고 다 갖겠다는 심산 아니겠어? 내부는 바로 석유여.
문 : 지난번에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반전성명을 내고 서울 탑골공원에서 집회도 가졌었지요. 그리고 지난 달 말경엔가 홍일선 시인이 반전을 주제로 시 모음집을 내겠다고 시를 보내달라고 전화를 걸어왔더라구요. 그 책이 이 책인가요?
최 : 그래요. 『전쟁은 신을 생각하게 한다』 바로 이 책이 그 책인데, 어제 우편으로 왔어. 반전에 대한 문인들의 글을 모아 책을 낸 것이라서 문 시인 시도 틀림없이 있을 것으로 알고 찾아봤더니 없더라고. 반전 시집이니까 당연히 문 시인 시가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없더라고 없어서 서운하고 그랬어.
문 : 예. 선생님,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요즘 생활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제 할일이 뭔지도 까먹고 정신 못 차린 채 하루하루 못나게 살고 있습니다. 반전시집을 낸다고 홍일선 시인이 전화로 부탁해왔는데, 그만 원고를 못 보내고 말았습니다. 홍 시인에게도, 선생님과 작가회의 동료 선후배께도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원고 빨리 보내라고 홍일선 시인이 저녁 늦게 집으로 두 번째 전화를 걸어왔을 때는 저 스스로 너무나 멋쩍어서 나는 반전 안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었답니다. 반드시 전쟁을 통해서, 그것도 아주 잔악한 전쟁을 통해서 짓뭉개고 싶은 나라가 하나 있어서 나는 반전시 안 쓴다고.... 제 너스레에 홍 시인도 저도 그냥 한동안 쿡쿡 웃었답니다.
최 : 그랬구먼. 나는 문 시인의 시가 당연히 있으리라 싶었어. 그런데 없어서 좀 아쉬웠지.
문 : 예. 면목이 없습니다. 저 같은 전후세대보다는 직접 전쟁을 겪으신 선생님의 경우는 나라 안이든 밖이든 전쟁이 나면 그걸 지켜보는 시선이나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최 : 가장 좋은 전쟁보다도 가장 나쁜 평화가 낫다, 그런 말이 있거든. 전쟁은 살육이 있게 마련이고 약탈이 있게 마련이여. 요즘 매스컴에서 약탈 현장을 보면 인간이란 것이 저렇게 악해질 수 있을까, 그런 회의가 많이 들어. 인간이란 게 도대체 뭔가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지. TV에서 보니까 후세인을 막 욕하고 초상화를 짓밟고 하던데,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 미국이든 이라크 국민이든 상황에 따라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달리하는 걸 보니 새삼스런 서글픔 같은 것이 생기더라고.
삭이지 못한 민족의 한, 다시 푸른 희망으로
문 : 예. 선생님께서 문학에 등단하신지가 햇수로 벌써 40년 저쪽이지요? 신석정 시인이 왕성하게 활동하실 무렵에 그분을 자주 뵙고 하면서 시를 발표한 걸로 아는데요. 연도가 기억나십니까?
최 : 정확한 연도야 기억이 안 나지만, 이른바 등단 시인이라는 말을 붙이게 된 건 꽤 늦은 나이였어. 왜냐면 내가 옛날 같으면 입도 뻥긋 못했을 테지만, 아주 불행한 시기를 보냈거든. 문 시인도 잘 알거여. 집안 전체가 빨갱이로 몰리고, 갖은 탄압을 받고 그랬으니까. 내가 교직에 몸담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북지역에서는 아예 꿈도 못 꿀 일이지. 그런데 전남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을 용케 만날 수 있어서 아주 다행이었어. 좌익으로 몰릴 위험이 있었는데도 나를 도와주고 보호하기 위해서 직장을 잡아줬거든. 젊은 시절 문학에 반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도 일찍이 문학에 미쳤었지만, 6·25가 터지면서 죽느냐 사느냐가 먼저지 예술이나 문학은 사치스런 형편이었거든. 나는 좌익·빨갱이라는 족쇄를 찬 집안의 독자(獨子)로서 내 신분이 비겁한 '자수' 덕분에 한숨 돌려지자, 내 노모와 누이동생을 어떻게든 목숨 부지하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에 내 온 정신이 팔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이른바 '입산 생활'까지 했었고, 다른 사람 같으면 생명도 부지하지 못했을 텐데, 여러모로 운이 좋았어. 다행히 주변에서 돌봐준 사람이 있어서 살았고 교직도 얻게 됐고, 이런 말도 이제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됐잖아. 문 시인은 참 대단한 사람이다 싶어. 지금이야 6.15선언 이후여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불과 10년 전만해도 비전향장기수와 함께 산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는데 5년 동안이나 제 부모처럼 모시고 살았다는 게 퍽 감동적인 일이여.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나는 작가회의 회원들에게 그 소식을 듣고 문 시인에 대해 감동했어. 자기 친부모도 늙었다 하면 홀대하고, 늙은 부모 모신 것만으로도 이미 효자다 하는 세상인데 제 부모도 아닌 사람을 말이지, 그것도 우리 사회에서 백안시하는 속된말로 간첩, 비전향장기수를 5년간이나 모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더구나 상대편이 흐뭇한 마음이 들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이상에 대한 열정을 태생적으로 뜨겁게 간직한 것 이상으로, 인간적인 덕을 지녀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내가 자네를 좋아하는 거라고. (웃음)
문 : 그렇게까지 여겨 주시니 낯뜨겁습니다. 98년 초, 제가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선생님께서 두세 번이나 병문안을 오셨다고 제 아내가 그러던데, 이 먼곳에서 전주까지 어떻게 다니셨어요? 선생님의 그 마음 가슴깊이 새겨두고 있습니다.
최 : 그 때 문 시인은 내내 의식불명이었어. 기왕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내가 문 시인을 아끼는 것은 문학을 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문 시인은 일관성이 있어. 요즘 시류에 편승하는 시인이 얼마나 많아. 시를 쓴다는 사람이 딱딱한 소리, 재미없는 이야기는 안 팔린다고 듣기 좋은 달짝지근한 소리나 연애놀음, 그런 거나 쓴대서 될까? 요즘은 머리에 요상스레 노랑물 들이는 시인도 있더구먼. 허긴 나 같은 빈대머리야 물들이고 어쩌고 할 머리털도 없지만. (모두 웃음) 꿈을, 이상을 잃지 않거나 가슴에 메마르지 않아야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해. 물론 세상은 변하고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지. 그러나 바람직하지 못한 풍조에 휩쓸리는 건 적응 아닌 변질이겠어. 저 사람 많이 변했어, 라고 말하는 건 변화에 잘 적응했다는 것이 아니라 변질됐다는 의미잖아? 변화와 변질은 서로 구별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좋아하지 않는 시인은 동료든 후배든 가만 따져보면 그렇게 쉬 변질되는 부류지. 한때 비제도권 문인들이 한글 전용으로 작품을 쓰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좀 더 자유롭게 써야 한다, 공산권이 무너졌다 하니까, 소위 문자 발달의 원리조차 모르는 것처럼 곧바로 한자를 섞어서 쓰기 시작했거든. 이게 유행이 됐는데, 요즘은 많이 그렇게 된 것 같아. 문 시인도 그걸 경계해야 돼. 요즘은 또 문장 부호를 일체 쓰지 않는 것이 유행처럼 돼버렸더라고. 같은 표현이라도 일반 대중에게 수월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게 꼭 시적 자유로움이 될 수 있을까? 마침표나 쉼표 찍는 게 어설픈 일일까? '언문 시대'의 표기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닌 바에는 문장부호를 살려야지.
문 : 장편서사시 <푸른 겨울>을 89년에 출판하셨죠? 제가 수배해제 되어서 전주에 돌아온 1993년 여름에 선생님께서 그 시집을 제게 주셨고, 찬찬히 읽으면서 내내 속가슴 아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최 : 아마 그즈음일거여. 그건 우리 민족사적 불행이나 비극을 소재로 한 글인데, 거기에는 빨치산 생활이 나오기도 하고 그렇지. 그게 나 나름대로는 공들여서 쓴 작품이여. 이것만큼은 내가 내 눈으로 똑똑히 봤고 직접 체험한 것이니까 제대로 쓰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내가 정년을 7~8년 남겨놓고 교직을 내던진 것은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이 글을 좀 더 집중력 있게 써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기도 했어.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아무래도 힘이 들것 같아서 말이지. <푸른 겨울>만을 쓰기 위해서 교직을 접은 건 아니지만, 가장 힘들게 썼던 만큼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들라 하면, 시로 쓴 소설, 이 서사시를 들 수 있을 것 같아.
문 : 선생님께서 걸어오신 삶과 문학에는 우리의 민족사적 아픔과 그 아픔을 극복해 나가려는 꿈과 희망이 꿈틀대고 있고, 이 꿈과 희망의 현실화를 위한 선생님의 실천적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푸른 겨울> <다시 푸른 겨울>은 선생님의 '문학산맥'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특히, 근년에 출판된 <다시 푸른 겨울>은 1987년 유월항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서사시로 선생님의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민족 근현대사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자 질곡을 형상화한 <푸른 겨울>과 <다시 푸른 겨울> 두 시집을 읽으면서 언제 꼭 한번 여쭤봐야지 하고서는 깜박깜박 잊어버려서 여쭤보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선생님 시집들의 제목에서 연유한 궁금함인데요, 첫시집 제목이 <푸른 황지>이고, 그 뒤에 이어진 장편서사시가 <푸른 겨울>, <다시 푸른 겨울>인데요 '푸른'에는 '겨울'보다는 오히려 '봄'의 이미지가 맞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나아가 그 시집들이 지향하는 바가 파란 많은 우리 민족사의 극복을 위한 것이라서 더욱이나 '겨울'보다는 '봄'으로 제목 붙여지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잠깐 했었거든요. 그래서 필시 '푸른' 다음에 '겨울'이라고 제목붙인 까닭이 있을 거라 여겨져서 선생님 뵈면 꼭 여쭤봐야지 해놓고서 강산이 변하고 또 몇 해가 지나는 동안에도 못 여쭤보았습니다.
최 : 문 시인도 그게 궁금했었구만? <다시 푸른 겨울> 출판기념식 때 문학평론가 오하근 교수 역시 겨울보다 푸른 봄이라든지 희망적인 뭔가로 바꾸면 좋을거라 하더라고. 내 첫 시집의 제목이 <푸른 황지>였는데, 황지라는 이미지와 푸르다는 것과도 대립되는 역설적 표현이지. 황지는 불행한 상태, 아직 우리가 극복해 나가야 할 처지, 거칠고 황폐해진 벌판, 그게 내 시의 출발이었거든. 내 기본적인 문학의 바탕을 한 마디로 비유하라면, 역시 봄보다는 정 반대의 겨울이나 황지거든. 얼어붙은 겨울이나, 거칠게 스산한 땅이나 결국 같은 표상이지. 그런 속에서도 끝내 꿈을 잃지 않고 푸르름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 열정, 의욕을 푸름이나 젊음으로 표현하고 싶었어. 상극되는 심상을 병렬시키면서 현실은 이렇지만 그것을 이겨나가고자 하는 푸른 활력으로 봐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푸른 겨울'이라고 이름을 붙인거야. 사실 '푸른 봄'이라고 붙이면 어쩐지 연애시적인 느낌이 들잖아? (웃음)
유행과 시류에 영합한 글은 단명한다
문 : 네 그랬었군요. 필시 깊은 뜻이 있으실 걸로 생각했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픔, 푸른 황지나 푸른 겨울에 형상화된 민족의 아픔이 아직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괴롭습니다. 선생님 시집 제목에서의 '푸른'이라는 의미가 끝끝내 버리지 말아야할, 버릴 수 없는 우리 민족의 꿈, 그러니까 민족의 통일이나, 그를 위한 극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민족의 아픔을 거슬러 올라가면 1894년 갑오년농민전쟁의 패배로 인한 근대민족국가 수립의 좌절로부터 일제 36년, 해방과 분단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새천년인 지금에도 여전히 우리 앞에는 분단된 민족의 통일과 같은 반드시 해결해야할 과제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그 꿈을 끝끝내 버리지 말고 지켜가는 것이 더없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도덕적이고 인간적이어야 할 문학이 여전히 우리의 민족적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죠. 가장 비극적인 것이 바로 민족분단이니까 말입니다.
최 : 그래요. '푸른 겨울'이나 '다시 푸른 겨울'에서의 겨울은 민족적, 인간적 아픔이 그렇다는 것이고, 푸르다는 건 시들지 않은 열정, 꿈을 상징한 것이지.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이든 미술이든 예술은 궁극적으로 인생을 메마르지 않고 풍요롭게 하기 위한 건데, 그러기 위해선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적극성이 필요하다고 봐. 참여문학 역시 이런 의식과 필요에서 자라나고 이어져온 것일텐데, 누구나 다 하는 소리지만 참여에는 두 가지의 부류가 있겠어. 한마디로 말해 붓으로 참여하는 경우와 몸으로 참여하는 경우지. 한 발짝 물러서서 반전 시위 촛불 시위를 바라보며 그것을 시나 소설 등으로 표현하는 문학적 참여가 있을 수 있겠고,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몸으로 행동하고 표현하는 문학인이 있을거라고. 어느 것이 바람직하냐고 했을 땐 두 입장 모두 나름의 논리와 주장이 있을거여. 문학인은 일차적으로 몸으로 부딪히는 일보다는 글로써 보여주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중요한 민족사적 사태가 일어났을 때 자기는 뒷짐지고 몸으로든 붓으로든 참여하지 않고 나몰라라 하면서 혼자서 저만의 세계를 노래하는…. 꽃을 노래하고 풀을 노래하고 구름을 노래하는 건 안일한 문학이고 안일한 세계관이라고 생각해. 하기는 딱딱한 이야기를 노래해봤자 누가 읽어주겠냐며 열심히 반론을 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그 밑바닥엔 시류에 영합하는 이기심이 깔려 있을지 모르지. 그런 글일수록 단명해.
문 :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시는 순결한 인간정신의 정수로서 우리 삶 속에서 기만을 해체시켜버리고 진실을 키워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변하더라도 지켜야할 것들을 어떻게든 지켜가는 선생님의 모습은 저와 같은 젊은 문학인들에게는 본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을 뵐 때면 늘 죄송스럽고, 젊은 시인으로서 더욱이나 면목이 없고 그렇습니다.
최 : 무슨 겸손의 말을…. 나에 대해서도 너무 과장된 칭송이고. 시와 생활이 완벽하게 일치될 순 없지만, 생활은 엉망이면서 시는 도덕군자 같은 소리만 하는 건 기만이고 거짓이라 할 수 있지. 내가 더러 출간 서문에서 쓰던 말인데, 행동과 실천이 따르지 않는 양심이나 지성은 의미가 없다, 그거지.
문 : 예. 맞는 말씀입니다. 정신과 삶의 일치는 '기만을 해체시켜버리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리얼리즘 문학의 본령이라고 했을 때, 미당 서정주 시인과 관련된 여타의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미당의 시가 오직 예술성만의 논의라면 그것대로의 성취가 있겠다 싶어요. 그러나 그것이 다름아닌 정신의 산물인 "시"이기 때문에 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정신이 혼탁해진 자의 삶과 태도가 혼탁할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고, 따라서 그의 친일은 곧 그의 혼탁해진 넋의 또 다른 모습이고, 그 모습이 문자화한 것이 그의 시일진대 어찌 그 시를 좋은 시라 인정할 수 있겠어요. 저는 그것은 시가 아니라 혼탁해진 넋, 혼탁해진 정신이 낳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최 : 미당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그 사람은 알다시피 친일파고 친일행각이 두드러진 사람이지. 얼마나 역사의식이 빈곤했느냐면, 일제가 앞으로 3백년은 가리라고 생각해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천황을 받들어 모셔야 한다고 주장을 했으니까. 물론 말재주나 우리말 구사 능력은 인정해 줘야지. 그러나 그것이 훌륭한 가치가 있느냐 했을 땐, 자네 말대로 바탕이 썩고, 얼이 없고, 혼이 없는 시가 어떻게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어. '국화꽃 옆에서'가 퍽 좋은 시로 비쳐지지만, 한 평론가의 분석에 의하면 국화꽃이 일본 황실의 꽃이고, 거기에 나오는 거울도 일본 건국 신화에 나오는 그 거울의 무의식적 표출이라고 보더구먼. 그러나 '국화꽃 옆에서'의 발표 시기가 미 군정하의 이승만 정권이 탄생한 무렵이고 보면, 서정주의 친일 바탕은 친미 바탕으로 바꿔진 셈인지 모르지. 그래서 이른바 '문학정신'으로 진보 진영 문학을 헐뜯고. 하기는 대통령 전두환의 얼굴을 두고 단군 이래의 제일 가는 관상이라고 아부를 한 서정주니까, 짐작할 만해. 헌데 미당(未堂)을 말당(末堂)이라며 손뼉치던 사람들도 세상이 미국식이 되어버리니까 미당 나발 불어대더구만. (모두 웃음)
문 : 선생님 내내 건강하시고 계속 좋은 작품을 발표하셔서 게으른 저 같은 젊은 시인들에게 회초리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는 것에 코 빠뜨리고, 넋 놓고 있으면 가끔씩 정신 번쩍 들게 혼줄도 내주시구요.
최 : 혼내줄 게 있어야지. 문 시인 같은 젊은 정신, 한결같은 일관성이 중요하고, 그게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인 것 같아요.
글쓰기는 허전함과 외로움을 쓸어내는 비질
문 : 참, 한 가지 얘기할 것이 더 있습니다. 빠뜨릴 뻔했네요. 잊을 만하면 저희 집으로 배달되어오는 '가톨릭 문우회'의 문집에서 선생님의 시를 종종 만나게 되는데, 지금도 가톨릭 문우회 활동은 계속하시지요? 그리고, 구상 시인이 언젠가 선생님을 '전주 선비의 판박이'라고 표현했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최 : 가톨릭문우회 회원이지. 구상 선생이 내 글에 서문을 쓰셨는데, 거기에 욕을 할 수도 없고 과장되게 표현한 거겠지. (웃음) 물론 그런 표현이 싫지는 않지. 나를 높이 평가해 주시고. 선비 정신이라는 게 꼿꼿한 면에서 지사 정신으로 통하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선비라는 표현을 쓰신 것 같어. 그러나 민중의 편에서 싸우는 사람이 선비라는 표현을 즐겨하거나 좋아해서는 안돼. 물론 꼬장꼬장하고 강단진 성품, 또 자기 이해관계에 혹하지 않은 지사정신을 말하는 것이지만, 선비보다는 나는 민들레 같은 사람이 좋더라고. 요즘 우리 집 주변에서 민들레를 많이 보는데, 내 마음을 유난히 끌어당겨. 민들레는 아침나절에 햇빛을 보고 확 피었다가, 저녁이 되면 오므라들거든. 달맞이꽃은 반대로 저녁에 피었다 아침이면 오므라들지. 그게 심지도 돌보지도 않았는데도, 혼자 그렇게 피는 거여. 그 생명력을 보면 참 놀라워. 민들레를 보고 있으면 들녘 처녀나 문학 소녀가 연상되거든.
문 : 예. 그동안 <푸른 황지>로부터 <푸른 겨울> <다시 푸른 겨울>로 이어지는 <문학산맥>을 이루어왔는데 앞으로 구상하시거나 계획하신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으신지요.
최 : 기운내야 할 텐데, 이렇게 기대앉아야 할 형편이니 잘 될지 모르겠어. 담배도 술도 기운이 없어서 많이 못할 상황이거든. '푸른 겨울'이나 '다시 푸른 겨울'과 같은 힘드는 것 못 쓸 것 같어. 글 쓰다 보면 때로는 밤샘도 하고 그러는데, 그러다간 이튿날 옴짝을 못해. 서정시나 이따금 쓰는 정도인데, 내 친구 중 누가 너는 좀 색다르고 남다른 삶을 살아왔으니 그걸 자서전으로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하더라고. 그거 쑥스러워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지. 다른 사람 자서전도 꽤 읽어봤는데, 내가 톨스토이의 작품은 좋아하지만, 톨스토이 자서전은 별로 마음에 안들어. 참회록도 마찬가지고. 참회록은 어느 시기의 자기 자신을 절절히 반성하는 글이지만 여러 참회록을 봤는데, 그 중에서도 루소의 참회록은 참 절절하고 솔직하더라고. 루소는 거기 서문 첫머리에 인간 한 마리를 발가벗기겠다고 말했는데, 인간의 동물적 특성이나 어두운 것을 대담하게 써내려 간 것이 맘에 들었지만, 이래저래 자서전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좀 갖고 있었지. 어쨌든 대작을 쓰지 못할 상황이 되다 보니까 무슨 취미에 열중해 보아도 어찌 허전하고 외롭다고 할까 그렇더라고. 조경에 취미가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파초를 30여 그루쯤 가꾸는데, 마음은 여전히 허전하단 말이지. 그래서 이 허전함을 좀 메우려고 내 일생을 한번 써 볼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작년 늦가을인 것 같어. 시시한 일기를 쓰느니 차라리 자서전을 쓰자고 한 것이라서 '일기체 자서전'이 된 셈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건 내 허전함을 메우려고 붓을 든 것이지.
문 : 독특하고 새로운 형식의 자서전이 될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우문입니다만, 선생님 혹시 사람들에게 무슨 문학성보다 유행을 따라 많이 읽히는 글에 대한 유혹 같은 건 없으셨습니까? 이름도 세상에 알리고, 책도 많이 팔렸으면 하는 욕심 같은 것 말입니다.
최 : 그런 유혹도 없지 않았지만, 억지로 내 이름을 알리거나, 또 어디에 껄떡이면서까지 내 글을 발표하고 싶지는 않았어. 더구나 뜻을 달리하는 지면, 신문이나 잡지와는 되도록 거리를 두고. 그래서 원고 청탁을 사절한 적도 여러번이었지.
문 : 네, 선생님. 이곳에 이렇게 홀로 나와 계시는데, 외롭거나 적적하시진 않으십니까.
최 : 다른 사람들은 심심해 어떻게 견디느냐고 하는데, 문 시인도 잘 알겠지만 문학하는 사람에게는 바쁘고 부산하고 시끌시끌한 것보다는 좀 외로운 것도 좋잖아? 습관이 돼서 그런지 어느 땐 TV 보는 것도 번거러워 밖에서 혼자 앉아 있곤 하는데, 먹을 걱정 없으니 혼자 풍경을 보는 것도 종교적으로는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호강스런 일인가 생각해.
문 : 예. 오늘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선생님, 내내 저 봄날처럼 화창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