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아비정전, 장국영을 추모하며
신귀백(2003-06-02 12:15:52)
멋대로 자랐지만 좀스러움이 전혀 없이, 나이 든 하녀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는 나쓰메 소오세키(夏目漱石)의 성장소설『도련님』을 읽으면서 영화속 주인공으로 <아비정전 阿飛正傳>의 그를 생각했었다. 깊게 응시하지만 애착을 갖지 않는 눈을 보여 주던 발 없는 새, 장국영. 그가 갔다. 홍콩식으로 종년(終年) 46세, 우리 나이로 원숭이띠에 75학번일 그는 목련꽃처럼 이울지 않고 동백꽃으로 뚝뚝 떨어져 내린 것이 만우절의 농담은 아니었다. 컬러에서 흑백의 시간들로 가기 전의 블루 톤의 시간들-해피투게더처럼-에 노래방서 '낭만에 대하여'나 부르면서 '나는 장국영 보다 젊으면서 왜 장국영 보다 더 늙었는가?'라는 한탄 섞인 건방진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 나의 4월 011 청구서의 절반은 4월 2일의 요금일 것이다.
그보다 네 살 손위인 그림을 그리는 손인홍 여사는 일주일 동안 흰옷만 입어야겠다고 문자를 보내왔고 그의 성정체성은 여성이기에 결국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거라고 임상심리학자 심영섭은 전화로 진단을 해 주었다. 빅토리아 항이 보이는 그 호텔에서 잔 적이 있는데 정말 떨어지고 싶었던 그 맘이 이해가 간다면서 시인 백학기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0시에 대한 시를 전했다. 오전 내 컴퓨터에 앉아 그의 죽음에 관한 메시지와 메일을 보냈고 해질 무렵엔 한 때 청춘의 문을 닫게 만든 옛날의 장만옥 혹은 유가령이었던 사람들의 전화번호까지 들추어댔었다. 날아간 그의 외로운 혼은 두고 온 시절과 사람들을 깨어나게 했고 멀리는 배호와 김광석까지 불러내었다. 한 손엔 핸드폰을 한 손엔 잔을 든 채 그의 죽음은 애인 탕(唐)과의 관계 그런 것 말고 존재의 근원적인, 견디지 못할 총체적인 것, 말로 안 되는 어떤 것들 아니겠냐며 맥주를 비웠다. 병풍 앞에서 메일과 문자와 핸드폰이 벌이는 커뮤니티의 작은 소란의 하루가 지난 뒤 일주일 동안은 틈만 나면 그가 출연한 영화들로 시간여행을 했다.
총알 세례 속의 스턴트 묘기와 커다란 화분에다 권총 숨기기 외에는 별 것이 없는 느와르 <영웅본색 英雄本色>은 애들 말대로 허접스러웠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의심으로 사랑을 잃고 20년만에 한 번 피는 꽃을 기다리기 위해 설상봉에서 고행하는 <白髮魔女傳>의 장국영이 고혹이었다면 난해의 독재를 보여주는 <동사서독 東邪西毒>에서의 그가 보여준 눈빛은 허무의 극치였다. 장국영의 캐릭터가 가장 잘 드러나는 영화는 역시 <아비정전 阿飛正傳>. 잘 빗어 올린 머리, 빛나는 이마, 고집이 센 코와 그 밑 또렷한 인중을, 도톰한 입술 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블라인드 쳐진 방에서 메리야스만 입은 채 몸을 비틀며 맘보춤을 추던 그를.
노신 선생이 쓴 『아Q정전』의 용렬한 주인공이 낡은 중국에 다름 아닌 것처럼 친엄마(늙고 무질서한 중국)를 찾아가는 이기적이고 비틀린 이복자식(홍콩) 阿飛가 떠날 때의 뱃고동에 뒤돌아보며 눈물 흘리는 새엄마(영국)의 늙은 얼굴이 상징하는 장치가 반환을 앞둔 홍콩의 정치적 불안이라는 반영론적 견해를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메시지는 강박으로 가르치려 들지 않기에 중국본질의 기표를 강요하는 장이모의 <英雄>보다는 버겁지 않다. 그런 정치성보다는 세상에 없는 대배우 때문에 영화는 훨씬 정서로 다가온다. "결혼 안 할 거야?"라고 묻는 장만옥에게 "안 해"라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그. 용돈도 주고 마루도 닦아주는 애인을 떠나는 필름을 보며 역시 덜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권력을 지니던 옛날의 추억들이 다시 상처가 되어 청춘의 날들을 소처럼 되새김했다. 실연의 외로움이 넘쳐나는 비 맞는 장만옥의 연기나 꽉 다문 입술로 제복에 감정을 감춰야 하는 고독한 영혼을 연기한 유덕화도 주연 장국영을 위해 잘 가라앉혀진 <아비정전 阿飛正傳>은 13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해는 이렇게 길어지고 발목을 적시는 보리가 저렇게 파래서 그리운 사람들이 사무치는데, 벚꽃길에서 사람들은 마라톤을 하는데, 꽃잔디 앞에서 구두끈을 천천히 매도 좋은 날이 계속되는데…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필리핀의 정글 숲을, 사막을, 설산을 날아다니다가 지쳐 바람 속에서 쉬다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은 발 없는 새, 기억한 것은 잊지 않는다던 阿飛 장국영. 그대 잘가라. 劇終.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