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5 | [문화저널]
릴레이연재/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
내 삶을 인도한 『뿌리깊은 나무』
이현배 옹기장이
(2003-06-02 12:12:41)
일천구백구십년 겨울. 오박육일 간의 남도여행 마지막 일정으로 벌교를 찾았다. 어깨가 아파 중단했던 조소공부를 다시 하느냐, 초콜릿 일에 보다 전념하느냐, 노동운동을 직업적으로 하느냐를 두고 고민하다 떠난 여행이었다.
동행했던 이 선생께 이 선생의 일정에 따라다니는데 옹기점에는 한번 들려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해남 대흥사에서부터 옹기점에 안가도 좋다는 소리를 했다. 지나서 생각해 보니 왠지 모를 불안감 같은 게 생겼던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오히려 이 선생께서 기왕 나온 얘기이니 꼭 가보자 해서 벌교까지 갔다.
벌교읍에서 다시 이십리를, 십리는 버스로 가고 십리를 걸어갔는데 대문간에서 저지를 당했다. 손님을 안 받는 곳이니 돌아가라는 거였다. 동행했던 이 선생께서 물이나 한 대접 얻어 마시자 해서 마루 한쪽을 간신히 얻어 걸터앉았다. 그때서야 관리인이 어찌 왔느냐 물어왔다. 나는 뜬금없이 "옹기일을 배우고 싶어서요" 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진짜로 '옹기일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연락처를 남겨두라는 말에 연락처를 적어주고 나도 연락처를 받는데 그 관리인이 당신 명함에다 적어주며 글자 '한'을 쓰는 거였다. 그래 내가 "혹시 뿌리깊은 나무 한창기 선생님하고 연관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이가 "여기 사장님이 그 분 동생입니다" 한다.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게 다 결정되고 말았다. 동행했던 이 선생께서 오히려 염려를 해 주셨다. 그 길로 서울행 밤열차를 타고 새벽에 내려 택시로 집에 가서는 잠자는 아내를 깨웠다. '내가 옹기일을 하고 싶으니 옹기점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내가 『뿌리깊은 나무』를 처음 알았던 것은 일천구백팔십년 고등학생 때였다. 불량하게도 가출을 했는데 어머니 장롱에서 오천원을 훔쳐 서울로 갔드랬다. 행위로 보면 학생 신분에 분명 나쁜 짓이었지만 나의 인생에서는 참으로 소중한 체험이 되었다. 그것은 이십 몇 층 하는 롯데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땅 밑을 보다가 '나'를 보게 된 것하고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보게된 거였다.
자기부정이 심했던 내가 교회에서도 해결을 못하고 가출을 한 거였는데 그때 "부정의 대상이 나이지만 또 거듭남의 대상 또한 나"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서는 그 방법의 단초를 찾을 수 있었다. 내용 중에 "이 더러운 버릇"이라며 '건강을 위하여 지나친 흡연을 삼갑시다'라는 말을 두고 호통을 친 게 있었다. 그 기사를 보면서 내가 혼났던 것이다. 담배곽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가장 좋고 굳이 있어야 한다면 그 구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은 건강에 해롭습니다"라고 적어야 한다며 말의 모순을 지적한 거였다. 그 말의 모순을 통해 나 자신 내면의 모순을 알게 되었고 내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졌던 것이다. 그래 나는 기꺼이 되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러고는 '내가 누군지' 나 자신을 알고자 했다. 그러면서 이 땅에 대한 인지를 하게 되었다.
일천구백팔십이년. 나는 학교를 휴학하고 팔십년 팔월에 신군부에 의해 폐간된 『뿌리깊은 나무』를 헌책방에서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한 질을 구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낮에는 고물장사를 했는데 니어커를 끌고 일부러 많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밤에는 『뿌리깊은 나무』를 봤다.
농사를 소망했으나 의지와 상관없이 진학하게 된 경희호텔 경영전문대학, 그리고 서울. 나중에는 우연히 읽게 된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그러면서 꾸러미로 읽게된 사회과학서적들. 좌익활동을 했던 아버님 세대를 이해하게는 되었지만 정체성에 혼란이 생겼다. 그러기에 고물장사와 『뿌리깊은 나무』는 내가 다시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지 되짚어보자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는 사람이 많은 고향 땅에서의 고물장사는 난처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러다 집집마다 있는 장독대에 재미를 붙였는데 마침 『뿌리깊은 나무』에 옹기에 대해 기사화 된 게 있어 옹기에 대한 식견을 갖게 되었다.
그 즈음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피신해왔던 친구가 있었는데 토론을 자주했다. 그 친구는 지금도 '뿌리깊은 냄새'라고 그때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헌책 『뿌리깊은 나무』한 질에서 나는 냄새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 세상을 바꾸는 방식에 그 친구와 나는 의견을 달리했던 것이다.
일천구백구십일년. 라면 상자 두 개로 시작했던 서울 생활. 십년이 지나 이삿짐을 꾸리는데 오톤 트럭에 실릴 만큼 늘었다. 거기에다 식구도 아내와 아이가 둘 해서 넷이었다. 이사를 하는데 한상훈 선생께서는 대청마루에 앉아 '눈구멍이 틀려먹었다'며 책도 읽지 말고 다른 물건들도 보지 말고 오직 당신 말만 들으라고 하셨다. 술을 드시면서 이삿짐을 살피셨던 것이다. 한창기 선생께서는 뭐하려고 옹기일을 배우려 하느냐고 하시더니 나중에는 잘 한 일이라고 하셨다. 서너 달 간격으로 다녀가시는데 워낙 어려운 탓에 별로 기억나는 얘기가 없지만 끝 얘기는 무슨 설명이든 '아무튼 역사가 완성시킨…' 하셨다.
나의 종교성과 사상성을 질타하시면서 오직 문화만 추구하라 하셨다. 그때는 무조건 예예 대답만 했드랬다. 그리고 옹기와 차, 그리고 자연염색을 함께 공부했기에 가끔 그곳에 뿌리를 내려 보라 하셨는데 이 모든 일에 대한 동기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 꾸역꾸역 그 짐을 다시 꾸려 문경에 잠깐 갔다가 손내로 왔다.
이제 혼자가 되고 보니 이제사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한때 여러 해 동안 『뿌리깊은 나무』 창간사를 외우려고 애를 썼는데 어찌된 일인지 도무지 외워지지 않았다. 그래 아예 작파를 했드랬다. 이 글을 쓰면서 꺼내보니 여전히 어렵다. 그렇다. 나에게는 실천의 문제인 것이다. 문화란 뭐뭐다 라고 알아서 될 일이 아니고 "살아서 알아질" 일인 거다.
여태껏 나는 비행기를 못 타봤다. 비행기를 타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뜨거운 대륙 위에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는 킬리만자로. 그 산의 모순을 오르고 싶은 거다.
이현배/경희호텔전문대학에서 초콜릿 빚는 일을 하다, 옹기의 매력과 전통 문화 복원에 대한 철학에 깊이 빠져들면서 진안 손내에서 옹기장이로 살고 있다. 옹기의 질박한 멋과 그 정신을 이어내고, 우리의 전통 생활 양식과 삶의 지혜를 회복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문화는 '살아서 알아질' 문제라며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는 이달의 필자가 다음 필자를 추천하면서 바통을 이어 갑니다. 이달의 필자인 이현배 씨는 진안치과 김주환 원장을 추천했습니다.
진안치과 단골(?)인 이현배 씨는 김 원장의 의사로서의 양심과 따뜻한 마음에 깊은 인상을 받아 오랫동안 '좋은 이웃'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김 원장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전북지부 회장을 지냈고, 국민개혁정당 덕진지구당 위원장을 맡으며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