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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5 | [문화와사람]
흩어짐의 미학에서 읽는 삶과 음악 산조예술제를 움직이는 사람들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3-07-26 12:05:33)
어디에서 무슨 연유로 모이게 된 것인지, 여러모로 방만(?)한 조직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행사를 치러내는 사람들에겐 직함도 별 의미가 없고, 그것에 크게 집착하는 이들도 없다. 산조예술제조직위원회. 조직과 행사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없는 듯 있는 듯' 오묘하게 존재한다. 겨우겨우 대외적인 명목상 직함이 사용될 뿐, 어찌 명함을 내미는 품새들도 영 옹색하기만 하다. 올해로 다섯 돌을 맞게 되는 산조예술제는 이들의 열정과 꿈으로 가동된다. 예술제의 모티브를 산조(散調)에서 착안한 것처럼, 글자 그대로 흩어질 산(散)이라더니, 사람들조차도 기막히게 자유롭고 '몰'형식적이다. 그러나 다섯 돌의 역사를 이어왔으니, 만만히 볼 게 아니다. 구성원 하나하나가 모래알 같다가도 행사 밑그림이 그려질 즈음엔, 흩어졌다 모여드는 형세가 흡사 진흙처럼 찰지고 단단하다. 산조예술제의 생명력과 각별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형식에 얽매어 조직이 조직을, 행사가 행사를 억압하는 식의 '자기 괴멸'이나 지나친 의무감에서 산조예술제는 자유롭다. 단답형 답을 내리자면, 민간 주도형의 축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오는 9월 산조예술제가 다섯 번째 행사를 갖는다. 사실 산조예술제가 좌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각광받고 지지 받았던 산조예술제만의 옥상옥, 그것에 대한 의도치 않은 자기부정이 잠깐의 허방이 되었다. 그러나 이내 옷깃을 여미고 다시 거울 앞에 앉았다. 지난 3월 말에 있었던 또랑깡대 음반 녹음 작업이나 4월 중순에 마련된 기금 마련 전시회 등이 잠시 떠나 있던 일반의 시선을 다시 거두어 들였다. 또랑깡대 음반은 자체의 마케팅 작업이 진행되고 있고, 서양화가 이상조·김충순·조병철·신석호·김인숙, 서예가 김두경, 판화가 지용출·유대수, 사진작가 정주하·정수미, 조각가 채우승, 서화가 김다음씨 등 12명의 작가가 선뜻 자신의 작품을 내놓아 기금 마련에 동참했다. "회원을 늘려가는 데 집착하지 않았고, 재정 문제는 조직 구성원들 공동의 책임이었어요. 작년엔 신경을 많이 못쓰다, 행사가 임박하면서 절박한 상황을 맞은 거죠. 어떤 판단을 내릴 여유나 상황이 아니었어요. 관의 지원을 받지 않았던 것이 민간 주도형 축제로 지지 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그 자부심에는 약간의 상처가 됐고 자책감도 적지 않았죠. 하지만 조직위원장께서 어떤 정치적 목적이 없었고, 순수하게 참여하고 도와주셔서 그 점은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올해 또랑깡대 음반 판매나 기금마련 전시회 등은 그런 평가와 반성을 통해 준비된 겁니다." '민간 주도형' 축제로서의 전형을 만들어가던 산조예술제가 관에 의지했던 한번의 경험만으로 쉽사리 폄하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지나치게 야멸찬 것 아닌가. 홀로서기의 지난함 앞에 가슴을 내밀고 선 이들이 그래서 또 새롭게 보이는 이유다. 산조예술제는 산조를 표방한다. 조금 더 깊이를 더하면, 산조의 미학, 산조 정신을 지지하는 축제다. 산조 100년, 산조가 무엇이고 그 산조정신은 또 무엇이길래. "산조정신, 잘 놀자는 겁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제대로 한번 놀아보자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닌, 운동의 개념일 수 있어요. 하지만 운동이라고 해서 누구를 가르치는 계몽적인 성격이 아니라 놀고 싶은 사람들, 문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것이 산조정신이에요." 산조는 기악독주의 정수이면서, 연주의 자율성과 즉흥성을 그 생명으로 한다. 그래서 음악적 구현은 절대 아마추어적일 수가 없다. 음악적인 성숙과 일정 단계를 거칠 때 비로소 자율과 즉흥의 미학이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굿연구소 소장이면서 한때 <굿>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던 현재의 예술감독 박흥주씨와 사무국장 오종근씨, 안성 죽산페스티벌 기획자 강정자씨, 사진을 전공한 백제예술대 김재현 교수, 미술가 채우승·조병철·유대수씨, 사업을 하는 유대하 사업국장 등이 산조예술제의 초창기 멤버다. 얼핏 봐서는 산조가 무언지도 모르는 아마추어들이 산조예술제를 한다고 나섰으니, 뜨악한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 조직위 사람들 사이엔 '대변인'으로 통하는 김재현 교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아마추어라는 평가는 표면적, 단편적일 수 있어요. 전문성을 가진 집단이 축제를 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고,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거든요. 그 전문성이라는 것이 문화와 공연 장르에 대한 접근 태도나 지적 인프라 정도로 설명될 수 있을텐데, 산조예술제는 문화행위의 직접적 결과물보다 태도나 정신에 더 주목하는 사람들이죠. 문화에 삶이 녹아들길 바라는 마음, 각각의 전문 분야가 있지만 산조 하나로 다시 모여드는 양상이 다분히 문화적이기 때문에 그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들은 "산조는 궁극이나 무덤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입을 모으는데, 그것은 '왜 산조냐'는 식의 소모적 질문에 집착하기보다는 산조정신을 그들 스스로 어떻게 깨우치고 많은 사람들과 공감해 가느냐의 방식에 더 많은 고민과 소신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어렵고 철학적인 이야기들이 쏟아져 정신이 '혼미'해진 기자가 타박을 하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고 하던가, 맹비난이 가해진다. 쉽게 설명 못하는 것은 자신들조차 정리되지 않은 때문은 아니냐고 묻자, 자신들 역시 아직은 배우고 느껴가는 과정이라고 넉넉하게 한 걸음 물러서며 호방하게 웃는다. 무대 위의 공연자와 관람객 사이의 이분적 구도를 극복하고 판의 음악, 마당의 음악으로서 산조가 갖는 장르적 가치를 환기시키고 국악의 대중화를 회복하자는 것도 산조예술제 사람들의 또 다른 지향이다. 산조예술제의 '히트 상품'인 '또랑깡대 콘테스트'는 그런 의미에서 판의 음악, 대중적 공연 향유라는 목적의식을 가장 잘 드러낸 부분이다. 판소리 다섯바탕을 토대로 기능적으로 잘 훈련된 소리꾼들만이 아니라, 입심 좋은 '나이롱 소리꾼'들도 좌중을 휘어잡으며 한바탕 걸게 얼크러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들이 바로 또랑깡대다. 옛날엔 그 어설픈 '소리 세계'가 동네 어귀 어딘가에서 푸지게 펼쳐졌다고 하니, 그것이 곧 마당의 공연, 판의 음악의 회복이 아닐 것인가. "또랑깡대 콘테스트에서 입상한 사람들이 지금 몸값이 치솟고 있어요. 그만큼 공연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의미일 테고, 그건 산조축제조직위 사람들의 큰 보람이 되는 거죠." 아마추어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었으니, 짚고 가야할 부분이 있다. 산조에 대한 음악적 성과나 연주자에 대한 요구까지도 아마추어적일 것이라고 예상한다면 성급한 판단이다. "산조는 연주 초보자들에게는 절대 넘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즉흥적이고 자율적이라고 해서 재즈와 손쉽게 비교하는 것도 위험할 수 있고요. 재즈와 산조는 사회적 계급적 상황이 다르고 감성과 내면을 드러내는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죠.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연주능력보다는 연주자가 얼마나 개방적이고, 삶과 미학적 관점에서 음악에 대한 고민을 깊이 있게 천착해 가고 있는가입니다." 9월에 만나게 될 새로운 산조의 세계. 다섯해의 농익은 고민과 노하우들이 어떻게 녹아들지, 조직위 사람들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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