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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5 | [특집]
편견과 관습의 부부 '흔들기', 그러나 우리는 평범하다. 돈버는 아내 살림하는 남편, 김씨 부부이야기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3-07-26 12:00:13)
편견과 관습의 부부 '흔들기', 그러나 우리는 평범하다 돈버는 아내 살림하는 남편, 김씨 부부 이야기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 은근과 끈기. 우리 민족의 특질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내려온 말이지만, 전통적인 여성관에 있어서도 은근과 끈기는 '현모양처'에 이르는 가장 기본적인 미덕의 하나처럼 이해되곤 했다. 조용히 참고 희생하는 전통적인 어머니 상이 그 은근과 끈기의 특질 안에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랜 가부장적 사고와 유교 사회가 여성에게 디민 은밀한 압력이었고, 그렇게 해서 형성된 어머니 상, 혹은 여성관은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가치를 지진다고 믿어왔다. 본능에 가까운 모성애마저 그런 식으로 폄하하거나, 우리 사회 혹은 가족을 지탱해 온 어머니의 역할과 지난한 삶을 손쉽게 깎아 내리고자 함이 아니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한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사회참여와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도 눈부시게 성장했다. 전통적인 어머니 상, 혹은 여성관이 내포하고 있는 숭고하고 조건 없는 희생을 이제는 가족 구성원이 공동의 책임으로 나눠 갖는 의식과 실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흐름은 전통적인 가족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의 역할과 위상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육아와 가사 일을 공평하게 분담하는 이른바 평등부부의 등장, 혹은 경제활동을 하는 아내와 집안 일을 맡는 남편과 같은 달라진 부부 관계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러나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이들을 보는 사회의 시선은 낯설고 특별한 경우라는 의식에서 멀리 도망치지 못했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고등학교 교사인 김옥현씨(44). 사회의 시선으로 보자면 그 역시 조금은 '특별한'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 결혼하고 얼마 뒤 남편이 고시공부를 시작하면서 결혼생활 20여년 가까이 경제활동은 그가 맡고, 가계 일은 남편이 맡아왔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듯 해 조심스레 익명을 제안하자, 뜻밖에 이름을 밝혀도 상관없다며 망설임 없이 응수한다. 기자 역시 편견이 없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편견의 자리에 민망함이 들어섰다. 보편적(?)이지 않은 김옥현씨 부부의 20년 결혼생활을 통해 부부 사이의 변화된 가치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가족애, 달라진 부부 풍속도를 엿보고 우리 시대 부부와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봤다. 남편의 기약 없는 고시공부에도 억울하지 않은 이유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익명을 써요. 오늘 아침 남편한테도 상의를 했는데 저랑 똑같은 반응이더라구요. 아내가 돈벌고 남편이 가계일 돌보는 게 요즘도 그렇게 특별한 경운가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제자들이 부르는 말로 '옥샘' 김옥현 씨는 시원시원했다. 83년 친구 오빠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남들처럼 평범하게 연애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당시 은행원이었던 남편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시공부를 한다고 선언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가장 민감해야 할 김씨는 도리어 태평한 반응이었다. "갈등이나 걱정 같은 건 그리 크지 않았어요. 남편에게도 본인의 인생이 있는 것이고, 자기 앞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하니까 그냥 믿었죠. 저는 정읍에서 직장을 다니고, 남편은 서울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어서 떨어져 지낸다는 게 불편하다고만 생각했어요. 물론 아이들이 없었을 때니까 편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시댁이나 친정식구들의 걱정은 그나 그의 남편에게도 쉽지 않은 장애였다. 가뜩이나 외아들이었던 남편이 기약 없는 고시공부를, 그것도 가정을 꾸리고 나서야 시작했으니 양가 부모들의 걱정이 없을 수 없었다. "친정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제가 적극적으로 막아줬어요. 특히 시어머니가 아들을 지켜보시는 게 많이 안타까우셨던 모양이에요. 저한테도 필요 이상으로 너무 고마워하시고. 그래도 지금은 다행으로 여기세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 대화가 통하는 친구 같은 사람, 그게 제 결혼 조건이었는데, 나머지는 우선순위에서 아주 멀리 있었으니까요." 김씨는 돈 관리에 있어선 그 스스로 '먹통'이라고 할 만큼 감각이 없다고 말한다. 남편이 돈을 관리해주는 일이 그는 편하고 좋단다. 그리고 신경 쓴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닐 것 같으면, 그저 마음에서 놓아버리는 게 '상수'라면서. 그러나 상황에 늘 의연한 그이지만, 동창회 자리에 나가 친구들을 대면하는 일이란 적지 않은 곤욕이었다. 아직까지도 동료 여 교사들은 어쩌면 그렇게 무심히 살 수 있느냐고 놀라워한다. "동창들 만나면 으레 남편 뭐하냐고 묻고 그렇잖아요. 그럴 때는 다들 좀 놀라더라구요. 하지만 친구들과 좀 다를 뿐이지 그걸 숨기고 싶지는 않았어요. 남편이 퀴즈를 좋아해 방송에 나가 세탁기며 침대며 다 쓸어온 적도 있어요. 알뜰 살림 퀴즈, 그런거 있잖아요." 김씨는 남편이 고시공부를 그만 두었을 때도 억울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가계 일이나 돈 관리는 자신의 영역 밖의 일이라고 생각해온 터라, 남편이 하는 일에 특별히 고맙다는 느낌도 없이 살았다고 털어놓는다. 한창 교육비 부담이 많아지는 고1과 중3 아들을 둔 학부모에, 고3 담임을 맡고 부터는 아침 여섯시에 집을 나서 밤 열시가 넘어서야 퇴근하는 고단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억울하지 않은 이유. 남편이 벌고 여자가 살림하는 전형적인 부부관계에 대한 고정관념, 그리고 일반적으로 아내가 남편에 거는 기대치나 전통적인 남편상을 그 스스로 이미 해체해버린 듯한 느낌이다. "고시공부도 원 없이 했으면 그만이고, 그건 철저히 그 사람 인생이고 영역이니까 제가 뭐라고 할 계제가 아닌거죠. 그리고 가정에서의 제 역할이 있듯, 남편 역시 아이들 교육이나 살림 챙기는 일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걸 억울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남편은 이런 상황에 대해 내게 빚을 진 것처럼 느끼는구나 싶을 때가 있지만 저는 그러지 말라고 해요. 남편이 하는 일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부족하지 않다고 얘기해주거든요." "아빠도 하는 일 없으면서…" 둘째 아들의 돌출 발언 김씨는 가정에서 부부가 해야 할 일이나 공동의 책임이 있을 뿐, 그것을 반드시 누가 맡아야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에서는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인다. 남편이 가장 고마울 때가 언제인지를 묻자, 친정오빠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남편이 서울까지 올라가 병 수발을 도맡았을 때라고 말한다. 반대로 가장 미울 때를 묻자, 아이들을 다그칠 때라고 말한다. 요즘 두 부부가 가장 마찰을 많이 빚는 것도 교육 문제다. "친정오빠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남편이 병상을 지키고 병상일지를 써가며 수발을 들어줬어요. 저는 직장일도 있었고, 오빠가 문병을 오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남편이 오빠의 병상을 지켜줘 너무 고마웠죠. 그런데 아이들을 너무 다그치고 나무랄 때는 좀 심하다 싶을 때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많이 부딪쳐요." 한번은 남편이 둘째 아들을 꾸짖다 아이의 '돌출 발언'으로 두 부부가 적지 않은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에게도 부모들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어쩔 수 없이 스며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둘째 아이가 아빠랑 다투다가 벼랑에 몰리고 방어기재가 발동하니까 아빠더러 아빠는 하는 일도 없으면서 왜 나만 몰아대느냐고 그러더라구요. 우리 부부 둘 다 방방 뛰고 그랬죠, 뭐. 나중에 아이 불러서 제가 그랬어요. 아빠는 우리 집 살림을 운영하지 않느냐, 아빠는 우리 집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고 계신 거라고 이야기해 줬어요. 남편이 둘만 있을 때 그렇게 믿고 이야기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구요." 의젓한 큰아들도 가끔 "우리집은 거꾸로야. 딴집은 엄마가 학원이다 뭐다 수선을 떨고 성적으로 막 윽박지르는데, 우리집은 아빠가 그렇잖아"라고 타박을 놓는 경우도 있단다. 그런 것들이 남편을 알게 모르게 상처받게 하는 일이 아닐까 김씨는 오히려 그것이 걱정이다. "나한테 빚 진 심정 없이 그냥 당당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과 싸우는 걸 보고 있으면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아요. 하지만 그걸 내색 안하는 게 남편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아는체를 하지 않죠. 남편은 우리 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믿어요. 한 사람은 돈을 벌고, 한 사람은 살림을 맡고. 부부의 책임이 그렇다면 누가 무얼 맡느냐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고 봐요.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죠."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씨는 60~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집안 분위기가 가부장적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 집안 환경도 사회의 편견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토대가 되었던 것 같다고 덧붙인다. 남편 역시 고지식하긴 하지만, 가부장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아 집안 대소사는 늘 상의하며 결정하는 편이다. 김씨 부부를 특이한 경우로 몰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가정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 그리고 이 둘의 이야기를 흔치 않은 소재로 다룬다는 것 자체가 김씨 부부 '흔들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가정 안에서의 부부 역할이 주어져 있지만, 그것을 오랜 관습의 틀에 대입해 남녀의 성 역할로 규정짓는 것 역시 시대착오적이고 위험한 편견이다. 서로를 보듬고 아껴주는 부부, 아이들 교육문제로 간혹 마찰을 빚는 부부. 김씨 부부의 이야기는 내용상으로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다. 다만, 형식과 관습, 남녀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이들을 원치도 탐탁해 하지도 않는 '특별함'으로 규정짓는 요소일 뿐이다. 이 두 부부의 결혼생활이나 가정 운영 방식이 더 이상 특별한 그것이 아닐 때, 아내와 남편의 위치에서 혼자 씨름하며 가슴앓이 해 온 남편의 굴레, 아내의 멍에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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