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5 | [특집]
현모양처 효부, TV에 갇힌 전통적 여성
김선남 원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2003-07-26 11:58:57)
TV가 가족문화의 중심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다. 이는 무엇보다 TV 시청 구조에서 비롯된다. 방송문화진흥회(2001) 조사에 의하면, 우리 사회 절반 이상의 가정이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서 가족 만남을 이룬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30-40대, 중소도시에서 더 뚜렷하다.
텔레비전이 '가족매체'임은 우리들이 TV를 시청하면서 동시에 무슨 일을 하는 가에 관한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텔레비전 시청에 병행되는 것은 가족 간의 대화(18.3%)였다. 그 다음은 식사(15.2%), 가사일(15.1%)이다(방송문화진흥회, 2001). 이와 같이 TV 시청은 가족 구성원을 이어주는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될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관습적인 행위의 일부가 된다. 가족 성원들은 쉽게 TV 내용을 사실이나 진실인 것으로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가족매체 TV 구조는 가족 관련 내용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의 모든 드라마를 가족 드라마로 규정해야 할 만큼, 실제로 '가족'은 드라마의 주요 테마가 된다. 드라마 인기는 그것의 내용이 가족 간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과 결코 무관치 않다. 대다수 드라마는 가족 성원들간의 얽히고 설킨 복잡한 관계를 설정하고 그 관계에서 파생되는 갈등, 그로 인한 위기와 파경, 또 그것을 풀어 나가는 가족성원(특히 여성)의 노력 등을 골격으로 한다. 시청자들의 드라마 몰입은 그것이 전제하는 가족규범과 현실 속 자신의 가족규범간의 제도적 연관성을 충분히 인식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50여 년 전통의 우리 드라마는 '전통적인 가족관'과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있다. 특히 드라마의 보수성은 가족의 이미지와 가족관계 속의 성 역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족 매체로서 TV의 보수성을 살펴보자.
첫째, 우리 현실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가족 구조가 있으며 또 보편적으로는 핵가족을 지향한다. 그러나 TV는 시종일관 남성 가장의 대가족 형태만을 고집한다. 이는 높은 시청률을 확보하는 일일드라마, 주말 연속극에서 뚜렷하다. 최근 KBS-1TV <노란 손수건>, KBS-2TV<저 푸른 초원 위에>, SBS-TV<흐르는 강물처럼>을 보면,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간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가 구성되며 가부장의 권위를 둘러싼 갈등이 주요 소재가 된다. 실제로 이런 류의 드라마가 시청자의 사랑을 쉽게 확보한다. 예를 들면 지난 3월 세 번째 주 성인여성의 선호 프로그램 다섯개 가운데에는 두개의 드라마(<저 푸른 초원 위에>, <흐르는 강물처럼>)가 포함된 바 있다(TNS 미디어 코리아 제공).
둘째, TV는 가족관계 속에서의 성 역할 이분법을 철저히 고수한다. 우리는 모든 장르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여성=표출적 역할=가정, 남성= 도구적 역할=직업이라는 파슨즈류 도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드라마 속에서 여성은 가족들 상호간을 조정하는 역할 담당자이다. 여성은 가사, 자녀양육을 전적으로 수행하며 남편과 아이를 정신적으로 지탱해주는 존재이다. 마치 여성은 가사일 밖에 할 수 없는 것처럼 부각된다. 반면 남성은 가족 외부의 사회에 대하여 활동하고 가족과 사회를 이어주는 경계의 역할, 즉 직업노동자로 그려진다. 물론 최근 들어 드라마에서는 '일하는 여성' '성공한 여성'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 재현은 외형적인 포장일 뿐 스토리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SBS-TV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실직하고 병든 아버지를 대신하는 어머니(고두심 분)는 '가장'으로서 성공하고 존경받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가정의 일시적 주도자로서 단지 가족 간의 화합과 조정의 중재자로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아버지의 빈자리에는 결국 숨겨진 아들 김지헌(박상원 분)이 대신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모든 TV속 가족 관계에서 여성은 한결같이 비생산적인 사회적 존재로 설정된다. <저 푸른 초원 위에>에 등장하는 직업 여성들의 관심사는 한결같이 사랑이나 결혼에 있다. 산부인과 의사이며 성공한 종합병원 원장 나정란(양희경 분)의 경우 그녀는 커리어우먼으로서가 아니라 자녀 결혼에 목숨거는 어머니로 전락된다. 반면 드라마에서 아버지는 각 분야의 직업인으로서, 가족을 통제하는 절대적으로 가장으로서 존재한다.
셋째, TV는 남녀관계를 다룰 경우 결혼이나 외도를 주요 관심사로 설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연인관계는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되면서도, 결혼관계는 여전히 보수적으로 조명되어진다. TV는 독신녀, 이혼녀, 가정을 버린 여자 등등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난 여성들을 과거와는 달리 예외적이고 부도덕하며 나쁜(惡) 존재로 다루지 않는다. 한편에서 TV는 전통적인 결혼관을 강조하며 일탈한 가족 성원이 가정에 돌아오게 되는 획일화된 가족 구조를 수용한다. <흐르는 강물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 등의 드라마에는 어린 자식들을 버리고 떠났던 어머니(박혜숙, 김자옥 분)가 등장하여 자식에게 용서를 비는 장면이 삽입되었다. 각 드라마에서 그들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게 되며 또 그들 가정도 돌아온 어머니로 인하여 화합하고 행복을 찾게 된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의 주요 소재는 사랑, 배신, 외도 등이며 또 이를 둘러싼 남녀간의 갈등관계가 주요 이슈가 된다. 이 과정에서 남성의 혼전 관계나 외도는 자연스럽고 문제가 되지 않은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남성 역시 종국적으로 가장으로 귀환한다. <흐르는 강물에서>의 아버지(장용 분)는 결혼 전 아들을 낳았으며, 그 아들 김지헌(박상원 분) 역시 많은 여자들과 자유로운 애정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들은 한 여성과 결혼하여 모범적인 가정을 일구게 된다.
넷째, TV는 효, 현모양처 등 전통적 가치를 끊임없이 재생산해낸다. 최근 사회 변화로 인한 직업 여성의 증가와 여성의 성공에 대한 욕구 향상에도 불구하고 TV 드라마 주인공은 여전히 자신의 사회적 성공이나 직업의식보다는 사랑 받는 며느리, 아내, 올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 예를 들면 소아과 의사로 성공한 커리어 우먼 성연호(채림 분, <저푸른 초원 위에>),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성공한 방송 작가 은아리영(장서희 분, <인어아가씨>)이 바로 그들이다. TV 속 여성들에게 있어서 성공은 단지 허울일 뿐 그들은 '가족'의 행복에 주력하는 어머니, 사랑 받는 며느리나 아내 등 전통적인 이미지 안에 있다. 시청자들은 가족 성원의 성 역할과 그에 따른 규범과 가치를 TV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학습한다.
텔레비전 속의 '가족' 테마는 결국 시청률의 부산물이며, 또 TV속 가족과 현실 속 가족이 별개의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TV의 보수성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