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 | [시사의 창]
봄은 왔건만..
고 명천 이문구 선생을 생각하며
유용주 시인(2003-05-01 13:28:38)
거짓말처럼, 한 세상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봄이 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그런 봄이 아니고, 몇 번 눈이 내리고 그 눈이 진눈깨비로 바뀌었다가 다시 비가 오고, 꽃망울 움츠러드는 찬비가 내린 다음에도, 몸살과 감기와 코피와 함께 봄이 왔다. 늘 그렇지만 봄은 앓고 있는 사람에게 먼저 온다. 봄 언덕에 누워 눈 가늘게 뜨고 향불 사르듯 아지랑이 피어오르면 어디선가 산비둘기 구슬피 운다. 한 세상이 향불 사르는 연기처럼 사라졌는데도 봄은 왔다.
그 때도 봄이었다. 다북쑥 여린 솜털이 바람에 가냘프게 흔들리던 쌀쌀한 봄이었다. 봄은 봄이었으되 차림은 한겨울 노동자 차림으로 청라 선생님 작업실을 찾아갔었다. 오후의 알맞게 데워진 햇볕이 작업실 앞 텃밭에 내려앉았다. 선생께선 봄 쑥을 뜯고 계셨다. 직접 심었다는 매화나무와 소나무 가지가 선생님 머리카락과 함께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거, 공공근로 안 하고 뭐하러 여기 왔습니까?"
힐끗, 일별하시고 다시 쑥을 뜯고 양수기를 덮어씌웠던 짚을 정리하고 태연하시다. 송구스러워 주춤주춤 곁에 앉아 쑥을 캐고 있자니, 사모님께서 한 마디 거드신다.
"이이는 참, 선생님 뵙겠다고 오셨잖아요?"
"볼 게 뭐가 있어, 있기는. 하루 쉬면 일당이 얼마인데. 그 돈 누가 땅 판다고 나오나."
계속해서 퉁을 주셨다. 환대 정도는 바라지 않았지만 쓴 소주라도 한 잔 대접받을 걸 미리 예상을 하고 들린 길이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소 닭 보듯 하실 줄 꿈에도 몰랐다. 저렇게 무섭고 쌀쌀맞은 분이라면 정말 다시는 찾아뵙지 말아야지. 똥 눌 곳을 찾지 못해 낑낑거리는 강아지가 되어 한참을 밍기적거리고 있는데 비로소 일이 끝났다. 흙 묻는 신발을 탈탈 털고 제각기 거실에 앉았다. 간단한 차와 과일이 나왔지만, 시도 때도 없이 갈증에 시달리고 있던 젊은 육신들에게는, 아까부터, 화장실 안에 담가 놓았던 각종 과실주가 선생님 말씀보다 더 귀에 밟힌다. 자주 찾아온다고 혼나더라도 언제 달빛 좋은 날 밤에 와서 깨끗이 비우고 가리라.
선생께서는 문학에 대한 말씀보다는 호구지책에 대해 자꾸 물어보신다. 어느 것 하나 똑바로 정리하지 못해 뒤죽박죽인 채로 이끌려 온 삶에 대한 또 다른 질책이셨다. 얼버무릴수록 매서운 채찍이셨다. 고개도 못 들고 반쯤은 웃고, 반쯤은 거짓말하고, 반쯤은 같이 동석했던 안학수, 한창훈, 이정록이 매꾸어 주었는데도 구석으로, 구석으로 밀려났다. 어느덧 해는 서쪽바다 맨 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드디어 붉은 얼굴을 가릴 수 있겠구나, 술시가 되었어. 술은 모든 것을 덮어두지, 그까짓 부끄러움쯤이야 한 순간 타올랐다 꺼지는 노을 정도밖에 되지 않겠지. 술은 부드러웠고 밤도 부드러웠고 밤 파도와 밤바람도 주름지지 않고 부드러웠다. 오직 주름 잡힌 건 좌중을 압도하는 이정록의 노래자락이었을 뿐. 박장대소였을 뿐. 이미 몇 순배 술잔에 인자한 웃음을 선보인 선생께서는 안학수, 한창훈, 유용주의 재롱에 거듭 소주 잔을 비웠으므로, 이정록이 자기 장기인 남인수 노래를 들고 나왔을 때는 크게 웃을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 때, 우리들은 선생님의 가장 크게 벌린 입과 가지런한 이빨과, 가장 크게 웃으시던 웃음소리를 기억한다.
"크흐흐, 저, 물건. 저, 물건. 진짜 물건이구먼."
박수를 아끼지 않으며 남인수 만큼이나 오래된 답가를 서너 곡이나 하셨다. 그렇게 밤이 깊었다. 파도가 잠이 들고 바람은 어디로 숨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간혹 가다 빗방울이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있는 힘껏 취했다. 노래방을 갔었고 포장마차에도 들렀으며 따로 캔 맥주를 사 가지고 백사장에 눕기로 했다.
이 모든 게 처음 받은 인상과 다르게 따뜻하게, 인자하게, 부드럽게 젊은것들 술 주정을 받아주신 선생님의 너른 품 탓이었다. 왕 소나무처럼 든든하게 서서 철없는 어린것들 재롱을 너끈히 받아주신 바다 같은 깊은 가슴 탓이었다. 파도 잦아들 듯, 바람 잦아들 듯, 흩뿌리던 빗방울 잦아들 듯 필름이 끊어졌다. 새벽이었다. 머리맡에 큰 파도소리가 공명판이 되어 규칙적으로 들렸다. '어이쿠, 이거 술김에 또 실수한 거 아닌가' 지레 겁먹어 황급히 깨어 일어났더니, 사위는 고요하고 코 고는 소리 요란하다. 어제 술 먹었던 자리가 깨끗하게 치워지고 이부자리가 정갈하다. 다들 웅크리고 큰 대 자로 뻗고 모로 쓰러져 정신이 없는데, 아뿔싸? 창가에 고목처럼 가부좌 틀고 선생께서 안아 계셨으니, 새벽 담배 냄새가 쌉싸름하다. 무슨 말씀을 하셨던가, 허구한 날 싸구려 술로 좋은 몸뚱이 망가뜨리지 말고 술도 안주도 질을 높여 삶의 질을 높이라고 말씀하셨던가. 세 살 술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술버릇 좋은 친구를 사귀라고, 술버릇 나쁜 개망나니 곁에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던가, 글 쓰는데 무거운 책임을 가지라고, 장난치듯 가볍게 쓰지 말라고, 자기 이름을 달고 나온 글은 죽은 다음에도 책임을 져야 하니 진지하게 다가서라고 말씀하셨던가, 파도 소리와 함께 비몽사몽간에 들은 선생님 말씀은 한 귀로 흘려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새벽인데도 줄담배를 태우시며 자꾸만 앞 바다를 바라보시던 선생님의 무른 눈 때문이었다. 말씀을 하시면서도 시선은 바다에 두셨다. 그래, 저 바다가 셋째 언니를 산 채로 삼켰지. 몹쓸 세월이 앗아갔지. 셋째 언니뿐인가, 둘째 언니와 아버지는 굴비처럼 엮어 총살을 당하셨지. 아들과 손주를 먼저 보낸, 통한의 세월을 근근히 버틴 할아버지도 한국 전쟁이 나던 그 해 돌아가셨지. 3대에 걸친 4명의 혈육을 먼저 보낸 선생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무 말씀도 없이 허허롭게 담배연기를 뿜어내던, 바다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생의 물기 젖은 눈을 더 이상 쳐다 볼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도 여러 번 봄이 왔지만, 선생께서 염려하신 삶의 주름은 제대로 펴지질 않았다. 공공근로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을 해도 막막하기만 했다. 다행히 1997년도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았다는 소식을 드렸더니 흔쾌하게 기뻐하시면서 참석하셨다. 결혼식 이후에 처음으로 양복을 입은 날이었다. 주인공이었지만 데려온 자식처럼 어색해 자꾸만 구석으로 숨고만 싶은 날이었다. 넥타이가 올가미가 되어 조여오던 날이었다. 능수버들이 곱다랗게 빗질하고 봄을 맞이한 바로 뒷날이었다. 맥주를 한 잔 가득 올렸더니,
"허, 허, 정태수 사촌 같은 놈, 마누라는 잘 얻었구먼."
명천 선생은 뒤풀이 자리가 펼쳐진 인사동 술집에서 늦게까지 후배들과 술잔을 나누셨다. 진정으로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슬퍼하고 기뻐하셨다. 문단에서 애경사 챙기는 일과 궂은 일 하는 것과 술 주정 받아주는 일에 명천 선생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 선생께서는 맨 밑바닥보다 더 아래에 계시려고 겸손해하셨다. 새까만 후배에게도 하대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사셨다. 중간이길, 중간 아래이길, 중립이길 원하셨다. 남과 다투는 일이나 무슨 욕심을 내어 경쟁하는 일을 싫어하셨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다. 특이 어려운 문인들을 위한 복지 문제와 삶의 질 향상에 깊이 고민하셨다.
명천 선생을 아는 문인들은, 우선 그 유장한 문장에 감복하거니와 힘없고 빽 없고 가진 거 없는 갑남을녀들이 주인공이 되어 입심을 발휘하는 소설뿐만 아니라, 힘있고 가진 거 많고 잘났다고 으스대던 놈들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통쾌한 산문뿐만 아니라, 사람 하나를 완전히 옆에 세워놓고 손금 들여다보듯 자세하게 그려내는 발문뿐만 아니라, 자기가 책을 낼 때 선생님 표사를 달아보는 게 평생 소원인 작가들이 많았다. 공공근로자가 되었든 정태수 사촌이 되었던 지금 이 글을 쓰는 잡범도 첫 산문집을 낼 때, 선생님의 크고 부드러운 축문을 받을 수가 있었으니 생긴 거와는 달리 복을 받았음에 틀림없었다.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려놓은 지 십 년이 다 되어가도 셋방을 전전하던 내게 '시인 말고 그 밖에 다른 무엇 하나는 더 되어야 비로소 삶이 풀릴 것 같은 느낌이다'라고 예언하신 것처럼, 시인 말고 그 밖의 다른 무엇 하나가 되었고, 신문 연재까지 하였으며 분에 넘치게 느낌표에 선정 작가가 되기도 하여 빚도 갚고 밥술이나 걱정하지 않고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우연 같지만 선생님 말씀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안주 걱정 안 하고 소주 정도는 마시게 되었다는 말이다.
늘 만성위염에 시달리는 선생께 겔포스 두 박스밖에 사 드린 적이 없는 내게는 소원이 하나 풀린 셈이었다. 위암 수술 받고 누워 계실 때에도 못 가 뵙고 수술 경과가 좋아 작업실에 내려오신 뒤에야 겨우 손두부 잘 하는 집에 모셔가 식사 대접할 때에도 무슨 돈이 있어 계산을 했느냐고 뭐라 하셨을 정도로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던 양반이었다. 이제는 선생님께 가끔 식사 대접할 정도는 된다고 말씀드리지 못하고, 그저 포도주 한 잔도 못 드시는 선생님 얼굴을 뵙는 게 괜히 죄송스럽고 섭섭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렇게 서둘러 가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찾아 뵐 걸. 정신차리고 효도하려도 했더니 효도할 부모가 없다고 했던가. 그예 선생님은 손수 심어 놓은 작업실 뜰 앞 봄꽃도 피기 전에 가셨다. 그나마 가시기 일 주일 전에 병원에 올라가 손이라도 만져본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우리 서주교 일행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다리가 풀려 죄 없는 술을 맹물처럼 들이켰다. 서로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명절뿐만 아니라 시간 나는 대로 찾아뵙고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선생님 냄새라도 가까이에서 맡고 싶었는데 아지못게라, 사람의 목숨은 하늘의 뜻이라고 하지 않던가. 산천은 나날이 병들고 인걸은 간 데 없다. 용점이와 대복이랑 어린 시절을 보낸 아랫갈머리에 선생님을 모신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나갔다. 세월처럼 무서운 게 없다. 세월은 사람도 나무도 풀도 쇠도 구름도 바람도 다 녹인다. 바다도 녹이고 별도 녹이고 하늘도 녹일 것이다.
한 세상이 사라진 뒤에도 또 다시 봄이 왔다. 선생님 뛰놀던 왕 소나무 아래에도 봄 쑥이 돋고 꽃이 피어났다. 지난 겨울 눈 속에서 잠자던 벌레들도 꿈틀댄다. 봄 숲 속에는 나뭇잎보다 작은 우물이 있고 나뭇잎보다 작은 바다가 있다. 왕 소나무를 흔들며 바람이 분다. 여느 때처럼 왕 소나무 그늘 밑에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데 정작 선생님은 가고 없다. 해마다 그 때처럼 서럽고 아픈 봄은 왔다 가건만.
<필자 약력>
유용주 / 1960년 장수에서 태어났다. 199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시 '목수'외 두 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 제 15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으며, 시집으로는 『가장 가벼운 짐』『크나큰 침묵』 두 권이 있다. 최근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를 펴냈으며, 한겨레 신문에 '노동일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고 이문구/좌익활동을 이유로 아버지가 처형되고 두 형이 대천 바다에 수장된 아픈 가족사를 겪어야 했던 소설가 이문구 선생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며 문단통합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인물로, 그 질박한 문장과 자신만의 구어체로 한국문학의 한 산맥을 세운 작가였다. 지난 2월 28일 향년 62세로 타계했다.
1966년 『현대문학』에 단편 '백결'이 추천되어 등단했으며 소설집으로 『이 풍진 세상을』(1972), 『으악새 우는 사연』(1978), 『우리 동네』(1981) 등이 있고, 장편으로 『산너머 남촌』(1990), 『매월당 김시습』(1992) 등이 있다. 제5회 한국창작문학상(1972)과 제5회 한국문학작가상(1978)을 수상했으며, 1982년 제1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