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 | [삶이담긴 옷이야기]
분홍 이야기
최미현 패션 디자이너(2003-05-01 12:02:39)
봄이다. 꽃이 핀다. 팔랑거리며 나는 노랑나비도 보았다. 저런 고운 것들이 도대체 어디 숨어 있다 나왔을까.
따뜻한 봄에 피는 진달래나 살구꽃이며 복숭아꽃이며 모두 분홍색인데 강렬하기보다는 왠지 곱고 애잔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분홍은 때묻지 않은 소녀를 연상시키고 이 세상의 고통이나 고단한 인생과는 상관이 없을 듯이 여겨지는 색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이 느낌은 같은지 분홍색은 행복을 상징한다. 약혼식 날의 신부가 분홍색을 입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고, 어린 소녀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는 모두 분홍색이다. 명칭도 갈색이 섞인 인디언 핑크, 복숭아 빛 피치핑크, 달콤한 캔디핑크, 산호색 도는 코랄핑크, 체리핑크, 누드핑크, 베이비 핑크, 피그핑크, 핫핑크, 쇼킹핑크 등등 다양하다.
우리의 분홍색 명칭은 참 재미있다. 잇다홍 같은 옛말에서부터 팥 분홍, 촌 분홍, 토끼 눈 분홍, 꽃 분홍, 거짓 분홍 등 재치 있는 표현이 많다.
서양의 핑크가 여성을 상징하고 여자 옷에만 쓰였던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남자 옷에도 참 많이 쓰였다.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 이정응의 옷 중 진분홍 모시두루마기가 남아 있는데
안감 또한 진분홍 명주로 받친 것이다. 이 옷을 입은 흥완군의 자태는 어떠했을까.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권력이나 힘과는 상관없는 분홍의 느낌이 권력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던 그의 모습과 왠지 일치하는 것 같다.
서양 남성복에서라면 이런 색이 파격적으로 보일텐데 한복에서는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검은머리와 망건이나 갓 같은 검은색 머리장식이 중화를 시켜서 인지도 모르겠다.
또 분홍은 붉은 색에서 분노와 성적인 느낌을 제거한 색이지만 여전히 관능적이다.
그래서인지 성인용품을 파는 곳은 거의 핑크와 관계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옅은 분홍색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안정시킨다고 한다. 분홍색 옷을 입은 사람은 다정다감하고 부드러우며 젊고 활력 있어 보인다. 사업상으로 적합한 색은 아니지만 이성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색이다.
몇 년 동안 지배적이던 장식과 형태가 극도로 절제된 무채색의 미니멀리즘 의상이 쇠퇴하고 올해는 색과 무늬가 강세이다. 그 중 분홍과 보라가 특히 많은데, 이 색상들은 까다로운 색들이다. 잘못 입으면 촌스럽고 다른 색과 같이 입기도 아주 까다롭다. 또 구두나 스타킹의 색에도 섬세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의상뿐만이 아니라 화장품도 역시 분홍색이 유행이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필자가 대학생이던 80년대에도 분홍색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거금을 들여 분홍색 아이세도우를 사서 발랐는데 노 교수님의 말씀 '눈 두덩이에 무슨 분홍을 바르나, 그리고 자네는 화장 안 해도 될 나이야.'
그래서 그날로 나의 분홍시대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유행이라면 뭐든 한번씩 해보고 싶던 젊은 마음을 몰라주시는 교수님이 야속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하자면 그때 내 나이 자체가 분홍을 무색하게 하던 때가 아니었을까. 하긴 봄에 핀 진달래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떠나는 님도 있고, 봄에 복사꽃 피면 가슴아픈 시인도 있는데 봄이라고 다 좋은 일만 있을건가.
그래도 벚꽃 향기 가득한 황혼을 가져오고, 피뱉듯 뚝뚝 꽃이 떨어지는 이봄이 좋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