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악가가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입니다. <겨울나그네>나 눈보라치는 날밤 아들을 잃는 아버지의 심정을 그린 <마왕> 같은 작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왠지 슈베르트의 삶과 겨울이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슈베르트의 삶과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슈베르트가 살았던 시대의 풍경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슈베르트는 179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1828년 역시 빈에서 사망했습니다.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1813년 그러니까 16세에 첫 번째 교향곡을 발표했으니
약 15년 정도 작곡가로서 활동한 셈입니다. 이처럼 짧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슈베르트를 기억하고 음악의 대가 반열에 올려 놓은 것은 그에게서는 다른 사람에게서 찾을 수 없는 그만의 음악세계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의 음악세계는 시대적 분위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슈베르트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1800년대 초로 가보겠습니다.
1800년대초 유럽은 프랑스대혁명의 후폭풍에
빠져 있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은 세상을 온통 바꿔놓을 것 같았습니다. 인간의 눈을 가리는 미신이나 도그마를 타파하고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한껏 키워가던 계몽주의와
계몽주의에 기초하여 사회를 전면적으로 새롭게 바꾸어 몽매한 어둠의 세계에서 이상적인 빛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유럽은 이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프랑스에서 시작된 새로운 운명은 프랑스만의 운명이 아니고 전체 유럽인들이 필연적으로 나아갈 역사적 운명으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유럽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프랑스대혁명을 환영하면서 구시대의 악습이나 교조적인 관습,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과 해방된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어디 역사가 그리 쉽게 진화하던가요.
프랑스대혁명과 자유주의 사상이 유럽 전역에 전파될 것을 두려워한 대륙의 강대국들이 동맹을 맺어 맞서고, 절대 패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나폴레옹조차 1814년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영원한 유배를 떠나면서 유럽의 꿈은 사그러들고 말았습니다. 1815년 유럽의 강대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러시아 등 네 나라는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를 앞세워 4국 동맹을 맺고 역사의 흐름을 혁명전 과거로 되돌리는 이른바 보수반동체제인 빈체제의 시대를 열어갔습니다. 베토벤이 지지했던 혁명의 물결은 사그러들고 반혁명의 물결이 펄럭이는 환멸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유럽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혁명과
반혁명이 교차하고 혼란과 격동의 시기가 거듭되면서 메테르니히가 장악한 빈체제 하에서 모든 진보적인 사회적 발언과 행동은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진보적인 교수나 학생, 예술가들을 사찰하거나 추방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점점 더 평화로워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일어난 것입니다. 구시대적인
왕정이 부활하고 군대와 경찰이 수시로 동원되는 탄압과 언론검열, 정치단체의 강제해산, 비밀경찰의 사찰 등이 난무하는 시대인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에 예술가들은 인간의 합리성을 믿는 계몽주의의 이성이나 조화로운 세계를 꿈꾸는 고전주의의 완전성 같은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대에 대한 환멸과 거부가 더 크게 자리잡았고 보수반동체제와 반혁명의 소용돌이에 갇힌 인간적인 고뇌와 호소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고전주의는 저물고 낭만주의가 시작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빈의 부르주아와 중산계층들은 혁명과 반혁명이 거듭되는 정치적 혼란에
대한 피로감에 사로잡혀 시대적 고뇌 대신 평화롭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나 혁명은 잊어버리고 복잡한 현실을 벗어나 개인적인 삶과 생활, 만족감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메테르니히가 주도한 경찰국가 시대의 문화양식을 ‘비더마이어’라고 하는데 빈의 활기없는 중산층을
빈정거리는 말로 이 시기에 유행한 문화가 가정음악회, 편지쓰기, 취미생활, 시낭송 등이었답니다).
빈의 시민들은 심각한 정치적 환경임에도 철저히 정치와 사회로부터 멀어져갔고 살롱이나 사교모임에서 정치적 대화나 논쟁 대신 일상적인 삶이나 최신 유행, 패션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더 즐거워 했습니다(파리가 유행의 중심지였는데 유럽인들은 파리를 따라하기 위해 파리의 소식을 전하는 정기간행물을 앞다퉈 구독했으며, 슈베르트가 사망한 1828년 <넥타이 매는 법>이라는 책이 대유행하기도 함).
이러한 현실도피적이고 자신의 평안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소시민적 경향이 팽배하던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음악을 즐기는 태도도 변화하였습니다. 빈 시민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아담한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며 음악을 즐기는 거실음악회를 선호하였습니다(집집마다 피아노를 들여놓는 일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탄생했습니다. 가족들이 둘러앉은 화목한 분위기에서 가까운 친구나 친지들을 불러 모아 때로는 연주가로 때로는 청중으로 함께 음악을 나누는 소박한 가정음악회, 이 분위기에서 슈베르트의 가곡들이 빛을 발한 것입니다(슈베르트가 교향곡이나 협주곡 같은 큰 곡 대신 왜 실내악이나 가곡을 즐겨 작곡했는지 알 법 합니다. 슈베르트는 1815년 한해에만 무려 144곡이나 되는 가곡을 작곡했답니다).
이러한 소박한 음악회는 작곡가로 하여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예술성을 마음껏 표현하게 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슈베르트는 더더욱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는 귀족의 후원제도가 사라진 대신 악보를 구매하는 일반 시민이나 음악회에 찾아오는 청중들, 그리고 악보를 출판하는 출판업자들의 구미에 맞추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에 더 집중하였습니다(그래서 슈베르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슈베르트가 거실음악회에 자주 참여하여서 그가 매우 사교적인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실제로 슈베르트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만 자주 어울렸을 뿐 매우 비사교적인 사람이었고 매우 고독한 외톨이였답니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그는 현실을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감성의 소리를 듣는데 더 열중하였고 오히려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과 완벽한 자율성을 얻게 되었습니다(이를 어떤 평론가는 ‘병적 낭만주의, 또 어떤 이는 ‘자기로의 망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낭만주의 초기 슈베르트나 그와 유사한 예술가들이 얻은 자유로움과 자율성은
반혁명적이고 보수반동체제인 폭압적인 질서와 거짓된 평화에 적극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동의한 시민들의 속물적인 태도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소외시킨 예술가들이 얻은 개인적인 보상이 아닐까요. 이러한 시대적 상황 때문인지 슈베르트 음악은 사회를
향한 역동성 대신 개인적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고독했으며 말년에는 병마에
자주 시달렸던 자신의 삶을 닮아 그의 음악은 방황하는 나그네를 그린 <겨울나그네>, <방랑자 환상곡>, 그리고 죽음과 비극적 서정으로
충만한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 <교향곡 8번 미완성>
등 쓸쓸하고 황량한 감성으로 가득찬 작품들로 나타나게 되었나 봅니다.
지금 서로가 서로를 안녕하냐고 묻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슈베르트가 살던 시기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설마 조만간 또다른 슈베르트를 만나게 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