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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4 | [문화저널]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릴레이 연재 모순 속의 합리를 일깨워준 한 권의 책
오용규 전북대 교수 경영학부(2003-05-01 11:43:47)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이고 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참으로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간다면 참으로 아는 것과 참으로 모르는 것은 아주 중요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나도 알고 또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알고 또 이러한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만이 각자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고 이를 토대로 나의 행동도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어린이의 외침은 다른 모든 어른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올바르다는 점을 일깨워 준 것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알고 이를 전제로 서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 때 사회적인 협력이나 조정이 가능해진다. 갈등이나 대립도 해결의 길이 열린다. 협력이 잘 이루어지고 갈등이 잘 해결될 때에 사회는 경제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제대로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그 시대 그 사회 나름대로의 지식을 전제로 협력 수준이 결정되고 사회 차원의 삶의 수준이 정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제대로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선 "제대로 안다"는 말의 의미가 다양하고 각자 이해하는 바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나로 하여금 앎의 의미를 추구하도록 함으로써 비록 목소리는 작지만 올바른 생각을 하도록 깨우쳐 준 책은 M. Blaug라는 경제사상가가 저술한 『경제학 방법론』이다. 나는 이 책을 20여년 전에 나의 전공인 회계학 서적을 통해 소개받았다. 회계학은 다른 전통 학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가 길지 않아 어떤 것이 회계 이론인가에 대해서조차도 학계에서 합의되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종류의 회계이론들이 서로에 대한 검토와 비판 없이 단지 각자의 이론만이 주장되고 있는 상태에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학계에 처음 입문한 나로서는 도대체 이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고 학문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관한 토론은 지극히 감동을 주는 일이었다. M. Blaug의 책은 입문자를 위해 과학철학에 대한 개요를 제시하고 있는데, 초보자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깊게 내용을 잘 다루어 주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중에 나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회계학 방법론을 다루게 되었으므로 나의 인생에서 참으로 큰 영향을 받은 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기존의 방법론을 귀납론, 논리실증주의, 포퍼의 반증주의,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론, 라카토스의 종합론 등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아울러 전통적 방법론인 귀납주의나 논리실증주의 문제점을 잘 적시하고 있다. 특히, 칼 맑스의 유물론이 귀납주의의 전형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포퍼의 주장은 참으로 설득력이 있었다. 과거에 대해 보편적으로 설명되는 귀납에 의한 법칙이 미래에 대해서도 적용될 근거가 없다는 내용은 지금도 경청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논리실증주의에 대해서도 설명과 예측이 같은 원리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다아윈의 진화론을 예로 들어 원숭이에서 사람이 진화되었다는 설명은 가능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원숭이는 언제쯤 사람이 될 것인가 라고 반문하는 점은 유쾌하기까지 하다. 칼 포퍼는 귀납법이나 논리실증주의처럼 어떤 이론이 옳다고 믿을 수 있다는 근대 과학철학을 붕괴시키는 분수령을 이룬다. 그는 인간에게는 어떤 내용이 맞다고 확인할 능력이 없다고 본다. 반대로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지식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100번째까지의 백조가 희다는 사실이 "모든 백조가 희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101번째의 백조가 검다면 "모든 백조가 희다"는 명제를 부정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이란 반증 가능하지만 아직 반증되지 않은 지식일 뿐이다. 칼 포퍼는 이러한 방법론을 토대로 소위 "열린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토머스 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식의 근본은 패러다임에 있기 때문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각자의 근본적인 우주관에 의해 보이고 이해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패러다임이 다른 경우 서로 이해를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칼 포퍼와 토머스 쿤을 종합한 사람이 라카토스이다. 그는 과학을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SRP)"으로 보고 SRP를 증명하거나 부정하기는 불가능하며 다만 발전하는지 혹은 퇴보하는지를 기준으로 과학 지식을 분류하고자 하였다. 어떤 지식이 발전하는 프로그램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적 내용"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식은 퇴보한다. 점성술은 미신이 아니고 퇴보하는 지식일 뿐이다. 지식의 기능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한 경험적 내용을 새롭게 파악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 지식의 발달에 의해 우리는 새로운 경험 현상을 활용하여 더 나은 삶을 살고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예컨대 이데올로기에 비해 그 속도는 느리고 꾸준할 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이 이러한 성질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인정한다면, 그리고 패러다임이 다름에 따라 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서로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만 인정하여도 자신만이 옳고 따라서 힘으로 사회를 지배하고자 하는 경향만 줄어도 우리 사회는 훨씬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자신과 사회와의 연결 고리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흔히 리더 쉽을 올바른 내용을 강제로 적용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데, 민주적 리더쉽은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구성원들이 목표에 합의하고 따라 오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이울러 다른 사람들의 패러다임이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고 어떤 패러다임이 옳은가 혹은 틀리는가 보다는 어느 패러다임의 경험적 내용이 더 많은가를 비교하여 선택하는 것이 자유로운 삶의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선현을 읽으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병이고 생각만 하고 선현에게서 배우지 않는 것은 독이다. 불안하면서도 역동적이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갖게 하는 최근의 우리 사회를 바라보며, 우리 모두가 기존의 확신에 찬 지식을 버리고 무지의 상태로 돌아가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통로를 찾을 길은 없을까. 오해와 편견이야말로 모두를 사슬로 엮어 독재에게 받치는 원동력임을 깨달을 수는 없을까. 긴 겨울을 떨치며 노랗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남녘의 산수유처럼 해맑은 우리의 새 봄은 진정 참다운 지식을 통해서 올 것이다. 항상 희망을 갖고 인내하며 성실하게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냉철하게 잘못된 앎을 지워나가는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참된 지식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열정을 현실로 만든다. 다수의 선택이나 어떤 전문 지식도 사회 전체의 이익을 보장하는 방안을 내놓을 수 없다는 깨달음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된 앎인 것을. 모순 속에 합리성이 살아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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