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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4 | [문화시평]
전시공간에 욕망이 소통한다 서신갤러리 기획전 '담론의 공간 - 욕망에 대하여'
이건용 군산대 교수, 미술학과(2003-05-01 10:52:13)
도내 6인의 작가 (고보연. 곽승호. 배용근. 오미아. 임택준. 존톨만)가 서신갤러리에서 ‘욕망’이라는 주제하에 담론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간 전시공간이 보여주는 것으로써 조각, 회화, 설치 등 밝은 빛의 공간이었지만 최근으로 오면서 칸막이식 공간안에 슬라이드, 비디오, 영화 등이 잠식하면서 비가시적 영역의 담론으로 변화되었음에 비추어 이들의 전시 형식도 그러한 과정에 놓여 있음을 발견한다. 이들 중에는 오미아의 경우 가장 전통적 기법을 현장에서 사용하고 있으나 그것 역시 3D (three dimension)로 받아드려 진다는 의미에서 ‘지각의 모델’이 바뀌지 않으면 감상의 불편을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사태는 존톨만이 전시장 입구의 응접실 공간을 투명 접착 시트지의 마커나 조명을 사용하여 마치 바(bar)의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전시장보다 응접실 소파에서 담소가 주로 이루어지는 리얼성에 작가는 주목하고 있다. 그는 전시장과 응접실 사이에 대형 투명유리를 통한 안과 밖, 밖과 안의 공간적 음미를 확대하고 오피스 공간의 담론적 기능에 비중을 간파하고 있다. 그가 연출한 바의 조명은 은은하며 벽에 부착한 우드써클도 비닐씨트 디자인도 주도적 갤릭터를 형성하지는 못한다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하면 배용근의 섹스 샵은 전시장 창고까지 확장하여 남성 성기를 캐릭터하여 진열하는 주도성을 보여준다. 그의 상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성적 결핍(발기부전, 조루, 지루, 성행위거부등)과 과잉(성욕,자위행위 등)을 통해서 욕망의 소유의욕을 갖게한다고 가정해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석고보다는 촉감을 위한 소재선택과 이에 걸맞는 형광색이 필요하던가 공공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야외의 거대 스케일도 생각해 볼만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작은 스케일 경우 소장하고 싶은 호객을 위한 구체적 배려 없이 전시 자체만을 위한 것은 너무 소극적 태도로 보여진다. 고보연의 경우 메카닉한 현실 생활에서 느림, 쉼, 재충전 등 자생을 위한 짧은 숙면의 욕구는 정신적 불안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또 다른 욕망일 수 있다. 불행하게도 현대인은 편한 침대와 차단된 환경에도 깊은 숙면을 취할 수 없다는 데에 일상의 틈새나 악조건 하에서 오히려 짧은 숙면과 기분의 회복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는 한 소설의 주인공이 우연히 발견한 작고 어두운 협소한 동굴에서 꿈도 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는 정신적, 심리적 휴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은 틈새 , 책상 밑, 옷장 안, 다락방, 항아리 안 등에 쪼그린 수면은 우연한 버스 안이나 수업시간의 짜릿한 단잠과도 유사하게 숙면을 갖는다. 그는 이러한 정보들을 슬라이드를 통해 보여준다. 그가 설치한 수면 샾은 매우 구조적 면에서 탁월하며 쪼그리고 단잠을 청할 수 있는 공간에는 비디오모니터가 장치되어 숙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수면 샾의 구조는 자본주의적 마케팅구조를 인간주의적 심리 현실과 맞물려 퍼포먼스화 했다는 데에 공간화로 주목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곽승호의 경우 어설픈 샾의 반 밀폐성 내부공간은 일본의 포르노성 만화와 작가의 메모, 드로잉 등과 함께 전시되어 훔쳐보는 듯한 관음적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 그의 욕망의 공간은 어설프게 각목과 천으로 구성되어 성인용 공간과 어린이용 공간이 구분되어 있다. 어린이용 공간은 장난감과 함께 모니터에는 만화가 상영되고 있다. 그의 임시적 구조물들은 화랑의 제도화되고 규격화된 공간으로부터 어설픈 가능태의 매력으로 공간에 원초적 호기심과 해체를 촉발하고 간림지(間林地)나 사막지대의 임시거주 공간으로부터 느끼는 호기심이 있다. 그러나 임택준의 붉은 욕망의 텐트는 곽승호의 해채적 텐트에 비하여 욕망과 정착이 공존하고 그 행로를 추적하는 세계지도, 여행용 배낭, 나침반, 물통, 조명등, 침구, 배개, 그릇, 인체해부학 책 등이 텐트안의 테이블과 의자 위와 주변에 놓여지고 필요에 따라 앉아서 생각을 더듬게 한다, 그의 메모들과 규모는 정착과 비정착의 지배적 텍스트의 일부이며 텐트안을 떠있는 새의 모형들은 유랑과 정착의 지배자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영적 존재일까? 그의 낙서에는 "나는 모든 고통을 경험하였다. 나는 모든 환희를 경험하였다..... 나는 완벽한 탄생을 눈앞에 두고 건조한 생물로 눕혀져 있다"는 말로서 인간 스스로 위대하기 위해서 모든 것 위에 자신의 위치와 패망을 확인하려는 집착의 붉은 방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의 교조적 메카니즘은 그가 윗세대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오미아를 빼고는 빠(bar)나 샾(shop)또는 엿볼 수 있는 임시주거 공간을 연상하게 하며 전체적으로 그간의 화랑공간 같은 밝은 조명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이들의 전시공간은 어둡거나 빛의 감소로 전체적으로 일견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가 아니다. 작가 개개인의 차단된 칸막이는 아니더라도 하나하나 방문하려 들어가거나 참여하지 않으면 소통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따라서 밝은 조명 아래에서 보아야 하는 오미마의 드로잉은 平面에 그려졌음으로 해서 2D(2차원)的이지만 2D에서 3D(three dimension)를 아우르는 현장적 드러잉이 되어있고 그의 드로잉은 느슨함과 흘러내림의 자유로운 지평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의 드로잉은 두 개의 벽과 사이에 바닥과 연결된 장소적 조건에서 그려졌기에 자발적이며 본능적인 그의 線이 보다 드로잉적 자유에 대한 욕망으로 전개된 場을 연출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드로잉은 걸어 들어감과 동시에 좌우를 움직이며 전개되어 깊이와 넓이를 갖기 때문에 감상자가 신체를 움직여 감상하게 하며 기존 회화적 차원보다는 신체적 장소 그리고 현장적 드로잉의 욕망에 참여시킨다. 이 전시를 위해서 서신 갤러리의 기획자는 작년 11월부터 준비작업을 하였고 여러번의 작가모임이 있었다. 그리고 디스플레이 기간이 길었다는 의미에서도 그간의 아트리에 작업을 단지 옮긴다는 방식이 현장적 작업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주목된다. 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프로젝트를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보다 큰 후원이 요구되며 작가의 의도가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남으로서 문화계의 영향력을 갖는 전시기획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미 미술계의 소통 방식이나 관객의 지각 모델이 바뀐 상황에서 전시 기획자와 작가는 변화에 적응하는 시간을 단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어쨌든 이번 6인의 담론의 공간은 기존 밝은 공간에서의 조형적 볼거리를 제공하는 미술 전시 공간이라기 보다는 욕망의 소통이라는 전제하에 연극성으로 이루어진 바(Bar)나 샾(Shop)의 시스템이거나 끝없는 유목성과 가변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비가시적 칸막이식 공간연출이라는 면에서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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