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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
[명인명장 | 내가 살아온 세상] 악기장 고수환
관리자(2008-10-13 15:41:09)
악기장 고수환 천년을 사는 오동나무에 소리를 담다 정리  윤영래 편집장ㅣ 사진  유백영 사진작가 우리 국악이 침체되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우리 고장에는 묵묵히 전통을 지키고 잊혀져가는 전통문화를 되살리기 위 해 노력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판소리건 한국춤이건 악기가 빠지면 제 맛이 살지 않습니다. 여기 40년을 악기 와 함께 해 온 장인이 있습니다. 천년을 가는 오동나무에 혼을 실은 끌질 한번, 대패질 한번으로 멋스런 소리가 울려납니 다. 겉모양이야 소목장이 더 잘 하겠지만 거기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장인의 손과 귀가 결정합니다. 재료하나 준비에도  30년은 족히 걸려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악기 하나는 천년을 울립니다. 천년의 소 리를 손끝으로 빚어내는 장인을 만납니다. 악기 만들기는 단순 목작업이 아니다 출장 가는 거 제외하고는 항상 작업장에 나와요. 아침9시에서 7시까지 거의 있어요. 여기서 만들고 있는 거는 가야금, 거 문고, 해금, 양금 하여간 줄 달린 악기는 전체적으로 다 생산을 허지. 굳이 가야금 만드는 사람이 거문고도 만들고 허는  거지. 가야금하고 거문고는 한쌍이에요. 음과 양이란 말이에요. 내가 가야금을 전공도 했고. 전공이라기 보담 작고허신  황병조 선생한테 사사를 받았어요. 가야금이 너무 좋고 해서 가야금으로 해서 문화재에 지정이 된 거죠. 어차피 이걸 만 드는 사람들이 흔치 않아요. 목공하시는 분들이 악기 만들기는 그러잖아요. 외모를 만들라고 하면 그 분들이 더 이쁘게  만들겠지만 음을 만들어야 되니까 차이가 좀 있구. 미얀마 쪽에서 온 것 같은 공후 공후도 초창기에 만들었어요. 특허가 내 앞으로 다 되어 있는 상태고. 뭐냐면 공명통이 기둥에 있어요. 그걸로 해가지고  특허를 받은 거지. 이 악기들이 보면은 예를 들어서 가야금 같은 경우도 중국의 쟁을 보고 가야국의 가실왕이 말하자면  우리 것으로 만든 것이지. 공후로 보면 아마도 미얀마 쪽에서 흘러들어 온 것 같아요. 지금 여러 사람이 맨 첨에 시작하 게 된 동기가 MBC 임성희 부장께서 전화를 혀서 가지고 공후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한번 해 보것다고 조그막하게 만 들어달라고 혀가지고. 근데 그거 가지고는 소리가 안 나가지고 사라진 것이거든요. 악기라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음량이  적대든가, 활용의 가치가 적다든가 허면 소멸되는 것이거든. 너무 공명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공명통을 좀 키우고 이렇 게 키운 상태에서 또 한 단계, 그러니까 지금 연주허고 다니는 것은 조금 더 키우고 그랬어요. 근데 한번  작업이 더 들어 가야 되요. 국악과 서양음악은 선의의 경쟁 해야 옛날에는 음악을 했던 곳이 이렇게 큰 무대가 없고 한 3평짜리 이런데서 하고 그러니까 서너 명이 주고 받고 하는 공간 이 됐죠. 근데 지금은 무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소리가 적은 악기는 음을 전달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없어지게 돼 있 어요. 해금도 한때 없어졌다가 갑자기 몇 분들의 노력으로 해가지고 섬세하게 음악이 되니까 발전이 와 갖고. 서로 할려 고 하고 배울려구 하고. 가야금은 자꾸 비싸지니까. 옛날에는 해금 정말 인기 없었잖아요. 깽깽이라고 그러고. 옛날에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분들이 가지고 놀고 그랬는데 역시 서양음악 하시는 분들 도움이 컸어요, 사실은. 정확한 음정으로  연주하고 작곡을 하시고 하니까. 그것을 자극으로 해서 발전을 한 거에요. 지금은 해금 쪽에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 에요. 지금은 국악이 또 서양음악을 자극을 주고 있는 건데요, 바뀌어가지고. 서로 공존하려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도 뭔 가 선의의 경쟁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악기연주자들이 아주 지금은 대단히 연습들도 많이 허고. 해금연주자들 손가락을  보면 시골에서 농사짓는 분들처럼 옹이박혀 있고 그러더라고. 깜짝 놀라게 하는 연주자들 많아요. 그렇게 서로 허니까  아무래도 음악의 정확성을 쫓다 보면은 서양음악을 참고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만큼 발전헌것 같아요. 가야금 같은  경우에도 옛날에는 정악악기였잖아요. 궁중에서 애용됐던 것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했던 그 무렵에 악기들은 지금 궁중 음악을 할 때 사용되는 정악악기, 소위 법금이라고 하는 거고. 그것이 한 천 삼백년 전 될 꺼에요. 근데 그 후로 전라도에  김창조 명인이 계셨어요. 그분이 산조 창시자에요. 그렇게 해서 음악이 빨라지면서 악기도 점점 좁아지는 거에요. 아무 래도 손가락을 빨리 움직일래면 그마만큼 좁아야 되니까. 정악은 간격이 넓고 산조는 좁고. 그래서 이 안족도 움직이게  돼 있어요. 이렇게 높낮이를 이넘으로 조정하는데. 엄청 발전 헌거에요, 지금. 할머니들 사랑방에서 귀동냥을 하다 내가 어릴 때 태어났을 때가 6ㆍ25때 두 살이었어요. 그 후로 급격히 농경사회 아니에요. 정말 집이 가난한 사람 많잖아 요. 머슴살이를 해도 젊은 사람이나 하잖아. 근데 5남 3녀 중에 막내로 태어난거야. 우리 아버지는 아주 할아버지야. 우 리 어머니가 사십이 넘어서 나를 낳았으니까. 그러다 인자 가사가 기울어져. 그러니까 진학을 못하는 거지. 저그 정읍 태 인 증산리라고 하는 지금 태인 컨트리가 있는 그 마을이에요. 그 어릴 적에 동서남북으로 큰 밭은 다 우리 것이었어요.  어릴 때 기억에. 근데 애들을 5남 3녀를 키우다 보면 당연히 가사가 기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내가 진학을 못 했어요.  그래서 자라는 과정도 내가 자는 방도 할머니들 사랑방이었어. 우리 외할머니가 홀로 되셨는데 동네 모든 할머니들은 전 부 우리 집으로 모이는 거여. 할머니가 입담도 좋으시고 바느질도 잘하시고 요리도 잘 하시고 다 그래. 어디 혼사나 관혼 상제가 있었다면 우리 할머니가 대장이여, 모든게. 그러다 보니까 그 때 이런 자리깔고 살 때 아닙니까. 할머니들이 밤이 면 흥타령, 쑥대머리 같은 거. 거기에 내가 항상 젖어있었어. 우리 외할머니는 우리 어머니 한분밖에 안 계셔. 외삼촌들 은 6·25때 보국대 거기 끌려가셔 가지고 다 돌아가셨고. 어머니 한분만 계시니까는 나는 완전히 우리 집에 막내에다가.  나는 굉장히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고. 가죽가방에 가죽신발을 신구 학교를 댕겼어요. 근데 갑자기 나 초등학교 4학년  때 몰락을 했어. 아버지가 모든 거를 다 탕감하고 갚아주고 하다 보니까는 나는 막내는 혜택을 보지 못 한 거야. 재미로 파준 동네 사람들 도장 그때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우리 주위에 산이 다 민둥산이에요. 그래서 조림사업이 벌어져. 사방공사를 허는데,  계단 만들어서 뗏장 입히고 나무 심고 허는데. 마을사람들이 도장이 없어요. 동네사람들이 도장이 없어갖고 월급도 주고  주급도 주고 그려야 하는데 도장이 없어서 주덜 못하는 거여. 그래서 내가 한번 파봐야것다. 어따가 팠냐면 맨첨에 상수 리에다 팠어. 상수리에다 파고 나니까 더 좁은 데다 파고 싶드라고. 그래서 분필에다 팠어. 그러고 나니까 나무에다 파고  싶드라고. 그래가지고 시장에 가 가지고 도장파시는 분을 유심히 봤어. 어깨너머로 어떻게 파나 하고. 기술은 앞에서 보 는 것보담은 어깨너머로 보는 게 더 빨리 느는 것 같애. 그 후에 도장이란 도장은 다 파주고. 예를 들어서 방학에 이상한  나무가 나오면 이게 새모양이 비슷하다 하면 새를 만들고, 이게 말 같으면 말을 만들고. 자동차를 만들면 유리창까지 만 들어. 십대 중반이지. 나는 도저히 진학을 못해. 저기 옹동에 상도산이라는 데가 있어요. 동네 아줌마덜 따라서 나물을 뜯으러 갔어. 지금도 한번 찾아보고 싶은데. 어디  깊은데 도 닦는 분인가봐. 어느 절벽 밑에 불상을 하나 놓고 정한수 그릇도 있고 촛불도 있고 그래. 근데 나보고 와보래.  이 얘기는 첨 하네. 너 일루 와 봐라 이래. 야야, 너 이리 와 봐라. 너 손 한번 보자. 너 생일이랑 생시는 아냐? 그래. 알지 . 애기를 했지. 그랬더니 너는 농사 질 놈이 아니니까 너는 집을 나가라 그러시드라고. 서북쪽인가 동북쪽인가 하여간 북 쪽으로 나가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러고 그 말을 듣고는 근데 누가 농사짓고 하고 싶겠어요. 그 무렵에 한문공부를 했 어요. 천자문을 읽고 사자소학, 동문선습을 읽으니까 계몽편을 그냥 알겠더라고. 인제 명심보감을 읽으니까 통감을 알겠 드라고. 일곱 여덟 번 읽으면서 음새김을 할 때 서당선생님이 우리 어머니한테 쟤는 너무 가르키면 돌아버리니까 그만  갈키시오 그랬다는 거야. 작고하시기 전에 그 말씀을 하시더라고. 서당선생님이 사실은 감당을 못 하시는거야. 너무 가 르키는 대로 쑥쑥 담아내니까. 그러자 마침 인제 나보고 인제 가야금을 만들어보겠냐고 우리 누나가 그래. 우리 누나 매 형의 동생 되는 사람이 가야금을 만들어가지고 그때 막 독립해서 나오는 찰나였던 가봐. 그 무렵에. 그 시절에 버스가 몇  번 다닙니까? 태인에서 전주로. 가보라고 하니까 근데 이걸 손으로 깎는다는 거야. 깎는 거는 내가 도산데, 어린 마음에.  신기하고 재밌잖아. 그래가지고 이걸 배우기 시작하는 거야. 그 때만 해도 돈이고 그거 전혀 관심이 없어. 오직 어린 마 음에 깎는 재미. 그게 열 대여 섯 살 먹을 때니까.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왔으니까. 한문공부와 가야금을 머리에 담다 그 대신 한문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내가 어른들보다 더 많이 알아. 한자에 대해서는. 그때 부고장을 다 돌리고 댕겼어 . 그 째깐 것이. 우리 아버지는 나를 한약방, 한약사를 만들라고 했어. 그때 부모님 말씀이 꼬부랑 글자 배우서 어디다 쓰 냐. 그 때만해도 한약사들 괜찮았지, 그 시절에. 그러니까 인제 나를 한문공부만 시키셨지. 입춘대길, 인내, 백인당 뭐 한 문공부 한 것이 사회생활하면서 큰 보탬이 됐지. 그 공자님 말씀이 도움이 된 것 같애. 하여간 공장에서 처음에는 어설프 지만 계속 깎아보니까 재밌는 것이여, 이게. 맨 처음에는 어설프지만. 나중에 인제 줄을 걸어가지고 소리가 나는데 그 묘 한 소리가 나는 거야, 그게. 그래서 어린 놈이 더 빠지는 거야. 가야금 타는 것을 배워야겠는데, 기술 배우는데 가야금 배 운다고 어떻게 그래, 못하지. 얼마나 좋아했는지 내가 이것을 내 머릿속에 담아버렸어. 가야금 타는 소리를. 따딩 딴 딴  따안~ 하면서 여깃다 담는 거야. 가야금 소리를. 그러다 보니까 내가 언젠가는 가야금을 배워야겠다 했지. 그러고 인제  보통 일을 하는데 몇 시까지 하냐면은 보통 아침 8시부터 시작하면 밤에 11시 반에나 끝나. 요즘 일을 어쩐다고. 지금은  아주 행복하지. 어떤 날은 새벽2시까지 일해주고. 그런다고 먹고 싶은 밥이나 배불리 먹나. 이거 허는 사람도 없어요. 인 제 집을 떠날 때도 자립에 대한 얘기는 한문공부 속에도 다 들어 있어요. 시골에서 농사짓는 것 보다는 나와서 깎는 것이  더 재밌잖아. 지붕 이을 볏단을 훔치러 다니기도 하고. 60년대 중반인데 생계유지가 안됐어. 우리 선생님도 됫쌀로 말쌀로 빌려다 먹었어요. 가야금 팔아다 갚고. 빌려다 먹는  것은 우리 누나가 했어. 시아재가 어렵게 사니까. 얼마나 가난하냐면은 먹는 것도 먹는 것이지만 지붕이 새는데 지붕을  이을 볏짚을 못 사. 그러면 볏짚을 훔치러 가야되잖아요. 그러면 인제 볏짚을 훔치러 가잖아. 야, 그거 도둑질 아무나 하 는거 아니더구만. 논바닥에 볏짚이 굴러다니잖아. 밤에 훔치러 가서 한 세 사람이 가요. 이게 멜빵을 딱 해서 메고 오잖 아요. 일어나면 넘어지고 일어나면 주저앉고. 언덕에 고개하나 넘어가야 오는 거여. 언덕에 올라오면 뚜르릉 굴러 떨어 지고. 근데 목재는 눈비를 맞쳐야 돼요. 눈비를 맞치면서 말리는 거여. 그때만 해도 돈들이 없으니까 재료를 많이 사지를 못해.  그껏해야 재료를 샀다하면 한 20개치나 샀나. 나는 재료를 사면 많은 공력을 들이면서 말려요. 곰삭을 정도로 말려야 되 거든. 근디 그 시절에 나무를 제대로 건조를 시키지 않고 만들었던 사람들이 지금 다 문을 닫은 거여. 지금도 명맥을 잇 고 계신 분들은 그때 신용을 잃지 않은 분들이여. 아, 볏짚도 없어가지고 지붕도 못 이을 형편인데. 국민교육헌장 발효가 국악회생 기회가 되다 갑작스럽게 그 때 69년인가 국민교육헌장에 조상에 얼을 되살려하면서 정부에서 소위 국악양성소를 만들어. 서울대 국 악과 생겨, 한양대 국악과 생겨 이러면서 국악기 수요가 필요로 하게 되는 거야. 우리 선생님이 가야금을 만들어가지고  주문을 그 사람들이 한 거요. 그래가지고 서울에서 왔어. 그래가지고 싣고 가다가 차를 갔다가 세우는 거여. 고장났다고  세우는 거여. 그래가지고 저기가 공구를 빌려오라고 하는 거여. 우리 선생님한테. 그래서 공구를 빌리러 갔을꺼 아닙니 까? 근데 공구를 빌리러 갔는데 차가 붕 떠버리는 거야. 그 뭡니까? 닭 쫓던 뭐가 하늘 쳐다본다는 식이지. 이런 나쁜 사 람들이 있어요. 그때 다 비포장입니다. 꽁무니 봐 봤자 뿌연 먼지만 풍기고 있는 거여. 그래서 이 양반은 그냥 허망하게  돌아오시는 거야, 사기당했다고. 그러면 인제 악기값을 팔아다 쌀도 팔고 재료값도 주고, 집세도 주고 그럴꺼 아냐. 근데  재료를 못 사니까 공장이 마비가 되야. 그것도 공장이라고. 그럴때 아무 대책이 없어. 그 시절에 돈을 빌릴 데가 없는 거 여. 됫쌀이나 빌릴까. 그때는 누가 부자였나면 빵집이나 하는 사람들. 우리 선생님 친구가 도넛츠공장을 했어. 신흥고등 학교 납품하고 그랬어. 그 사람이. 그러먼 돈을 많이 벌으니까 돈 빌려줬다 하면 5부, 6부 하는 거야. 근데 어쩔 수가 있 나, 그 사람한테 돈을 빌려 써요. 근데 돈을 갚아야 되는데. 그래서 공장 문을 닫아요. 야, 인제 전부 멍하니 된거야. 근데  나보고 어디로 가라고 하냐면 지금 서울에서 최고 일류로 치는 숭인동에 김광조 선생한테 가라고 그래. 지금 가장 이름  날리고 있잖아요. 거기 가라고 그러는데, 내가 공장을 하실 겁니까 하니까 한다는 거야. 그럼 같이 고생하십시다. 나는  그래서 내가 남겠다고 했어요. 숭인동에서는 나를 보내주기를 원했어요. 그때 거기로 갔으면 지금 최고가 됐을 꺼야. 지 방이 아니고 서울로 갔으면 최고로 우러르는 위치에 갔을 거에요. 그래가지고 뭐 하러 다녔느냐? 다시 돈을 빌릴 때까지  헐일이 없잖아. 산에 가서 나무 해다가 때야 돼. 겨울이면 갈퀴로 박박 긁어가지고, 불은 때야 헐 거 아녀. 날씨가 풀려야  일이라도 허고.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온 거야. 그때 국민교육헌장 그것 땜에 갑작스럽게 바빠지는거야, 이게. 주문 한번  받으면 한 삼 개월 기다려야돼. 삼 개월 정도 기다렸다가 악기를 갔다 주고 그러는데. 보통 일을 하는데 아침 8시부터 시 작하면 일찍 끝나야 11시 반, 그러고 새벽 2시. 그러고 봉급이 있냐? 그것도 없어. 봉급은 없어. 명절이면 통일화 한 켤레 , 약주 한병이면 끝나. 그러고 마음먹으면 극장 하라고 돈 몇 천 원 줘. 아마 몇 백 원이었을 거야. 그 때 당시에 전주에  무슨 극장이 있었냐면 오스카 극장하고 제일극장인가 코리아극장인가 그랬는데. 한번 들어가면 촌놈이 극장 구경 할라 고 두 프로 세 프로를 봐요, 이제. 그러고 밤이잖아. 극장 문 앞에 나오면은 어딘지를 구분을 못 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내 집을 찾아가는 지를 몰라.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그 때 황방산 너머였거든. 지금은 조촌동인가, 만성초등학교 있는데 . 그때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들어와. 그것도 거까지 들어가지도 않았어. 완전 비포장이야. 그러면 인제 물감 하나 살라고  해도 전주 남부시장까지 기다렸다가 나오는 거야. 물감 한번 사 가지고 들어가면 한 나절이야, 하루. 서울, 대구, 전주 찍고 거기서 조금 발전을 해 가지고 이쪽 그 다가공원 밑에 부자들 사는 동네잖아. 문간방 하나 얻어가지고 거그서 만들기 시 작하는 거야. 그러자 인제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면, 우리 선생님이 군미필자였나봐, 군미필자. 그러면 사람을 어떻게 부 려 먹냐면은 내가 군대가니까 내가 공장을 너한테 넘겨 줄테니까 니가 해라. 그러는거야. 지금은 기억 안난다고 그래. 그 러니까 막 독립해서 나온 분이라 연세가 많지도 않았지. 내가 밥 다해먹고 식순이까지 내가 다 했어. 그러면 반찬 사러  가는 게 제일 챙피해. 어두울 때 가는 거야. 그러다 보니까는 또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고. 이게 만들어 놓면 안 팔리는거 야. 그 시절을 지나면서 세 사람이 합작을 하더라고. 그러니 인제 이게 잘못된거야. 예를 들어 한 집에 영감이 셋이나 되 는데 이것이 되겠어요. 한 사람은 대구로, 한 사람은 서울로, 한 사람은 전주에. 거그서도 내가 가장 오래있었으니까 종 합적인 기술자가 나야 인제. 그때 당시에 한진고속이 맨 처음 나왔을 땐데, 그때 한진고속도 서울까지 몇 번 뛰지 못할  때에요. 그 때 내가 어떻게 일을 했냐면 그때가 70년대 초에 5급 공무원봉급이 2만 5천원 갔어. 그런데 내 봉급은 인제 4 만 5천원까지 올라가게 돼. 그러면 그 시절에 엄청 많이 받는 거여. 그래가지고 각 공장마다 내가 10일씩을 일을 해 주게  돼. 서울 찍고 대구 찍고 이러면서. 찍고 찍고 돌아다니면서 일을 해 주는 거야.  그러면 내 봉급을 세군데서 주는 거야.  만 오천 원씩 나눠서. 내 월급을 올려 주자는 데는 아무도 반대를 못해. 근데 내가 올려달라고 해 본적도 없어. 근데 그  때 봉급을 올려주는데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더라고. 반대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거 같애, 근데 나를 부려먹기 위해 서 한꺼번에 많이 올려 주는 것이 아니고 한 달에 오백 원씩 올려줘. 기분 좋잖아. 오백 원씩. 근게 그 오백 원씩 오르는  재미로 열심히 한거야, 내가. 근데 영장이 나오는 거야. 그 때 당시에 우리 집이 넉넉하지 못하고, 내가 할머니 어머니 다  부양을 해야 되는데. 근데 영장이 나온 거야. 그때 정말로 내가 좀 눈물을 흘렸네. 맨 처음엔 보충역으로 어떻게 좀 빠져 갔고. 왜냐면 학벌이 없으니까 충분히 가능했지. 근데 한번은 병무청 부정사건이 일어나게 돼. 그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2년차 보충역 무조건 쓸어 넣어라. 그래서 내가 72년도에 입대를 하게 돼. 군대를 늦게 간거지. 호적도 늦게 된데다가 24 살에 입대하니까 나보다 두어 살 어린 친구들이 상병이고 그랬지. 27살에 제대를 했는데 내가 벌써 없는 동안에 내 밑에  일하는 사람들이 양성이 되가지고 인제 나를 일을 시키는 것은 굉장히 두려워. 나는 봉급을 많이 줘야 되니까. 그때 2만  5천원만 줘도 충분히 아니면 만 8천원만 줘도 일을 시키는데 나를 4만 5천원을 줄라면 부담되지. 그래가지고 또 다시 여 러 사람이 인제 며칠씩 돌아가면서. 내가 일손이 빠르니까 하루에 안족을 120개씩 깎었어. 이게 손이 날라가, 조각을 하 는데. 한마디로 손이 날라가는 거야. 휴가오면 휴가때 오일도 못 쉬어요. 한 15일 휴가를 주죠? 일좀 해달라고. 가장 중 요한 부분만 나한테 맡기는 거야. 그 대신 주인들이 야간이면 술도 사주고 그러잖아. 전주사람은 서울로, 서울서는 나한테 십년 안에 내가 인정받는 위치까지 간 거야. 선배도 없고, 주인들 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일부분은 하는데 종합적인 기 술자가 없는 거야. 이거 하나만 깎는 게 아니고 조립해야지, 줄도 매야지, 조율도 해야지. 이런 게 없었기 때문에 갑작스 럽게 내가 최고의 저기가 되는 거야. 근데 군대제대하면서 내가 최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자만심이 든 거지. 최고 지 하는 생각이 들어가지고 나는 어디 있어도 돼.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어 한 거야. 그래가지고 전주로 내려 온 거야. 나 는 전주니까 전주를 빛내야 돼, 의협심 같은 거 있잖아, 이게. 그리고 내가 집도 일부러 장승백이, 학산 옆에. 지명을 따  가지고 아무리 서울사람이라도 장승백이 하면 찾을 수 있다 해서 장승백이에다가 자리를 잡게 돼. 지명만 알면 다 찾아 오게 돼 있으니까. 그게 다 내 자만이거든. 근데 전주에 와 가지고 내가 엄청나게 바쁘게 돼. 모든 주문이 각 도시에서 들 어오니까. 서서히 진행이 되면서 문제가 생겨. 내가 영업을 못 해. 영업을 못 하니까 시장을 하나씩 하나씩 놓치게 돼. 전 주 사람들은 서울로 갈라고 하는 경향이 있어. 근데 서울 사람들은 내 걸 가져가는 거야. 전주 사람들은 서울 것이 좋은  줄 알어. 서울선호사상이 딱 있는 거야. 그게 아닌데. 정말 6개월만 쓰면 1년만 쓰면 이게 못 쓰는 악기들인데. 내 악기는  십년, 이십년 후에 인정을 받는 악긴데, 그걸 모르는 거야. 이제 그 분들이 다시 찾아 와. 고등학교 때 구입했던 분들이  다시 나한테 찾아오는 거야. 역시 선생님 것이 악기가 변치 않고 좋습디다하고 인제 그 분들이 찾아와. 그게 인제 알짜배 기 손님들이 되는 것이야. 그러고 나는 인제 지금도 영업을 해 본적이 없어. 입소문으로 찾아오는 손님들만 하지 악단 찾 아다니면서 내 악기 좀 써 하고 어쩌고 해본 역사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어. 수십 년이 되도 한 번도 그런 얘기 안 해. 내 가 자존심이 강하다고 하는데 자존심이 아니에요. 장인은 만들면 만들수록 이게 악기에 대해 겁이 나는 것이에요, 이게.  내가 아무리 잘 만들어도 이것이 뭔가 어딘가 부족한 느낌을 받는 거야.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거야. 그러면 이게 영업 을 못 하게 돼 있어요. 오는 손님은 받아도. 또 내가 가야금을 배웠기 때문에 내가 아는 것인데. 그러니까 누구도 나하고  거래를 한 번 했다 하면 안 떨어져, 대부분. 근데 이제 상술이 아주 강한 사람들이 이렇게 하잖아. 이거 하나 사시면 하나  끼워 들이겠습니다, 그러잖아. 이게 몇 백만 원 짜린데. 내가 어떤 친구한테 그랬어. 야, 너 그거 얼마줬냐? 그랬더니 이 거 사백 오십 만원 줬어요 그래. 야, 이 멍청한 놈아. 그러면 니가 두 대 값을 다 준거지. 공짜로 받은 게 뭐 있어. 악기 하 나에 이백 오십 만원이면 사는데. 그러니까 나한테 이벤트를 안 한다는 거야. 서울 사람들은 예를 들어 대아쟁을 하나 사 면 산조 아쟁도 하나 끼워주는데. 참 나. 국악기의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되고 싶다 가장 재밌는 거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경상도에서 손님들이 왔대요. 그때 내가 삼십대 중반 정도였나. 고수환씨가 아버 님 되세요? 그러는 거야. 내 얼굴은 몰르고 이름만 아는 거니까. 전주에서 악기 만드는 사람 이름 고수환만 아는 거야.  근데 찾아갔고 보니까 너무 젊거든. 지금도 젊은데. 그런 적도 있었는데. 지금도 삼십년 전에 사 가신 분들이 다 찾아와.  안 변한다 이거야. 사람들이 묘한 것이 뭐 악기를 입시용? 한번 사면 영구적으로 쓰는 거에요. 대물리는 것이거든. 깨지 면 갈고 줄 끊어지면 갈면 되고. 평생 쓰는 것이 이건데. 이걸 육 개월 짜리 일 년짜리를 사서 쓰는 거야. 그것도 칠백만 원, 천 만원 주고.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물론 자기 위상을 높이는 것은 좋아요. 비싸게 받으면 자기 위상이 올라가지 . 하지만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진다는 것은. 물론 책임질 수 있는 것이라면 천 만원이 아니라 삼 천만 원이라도 받아야죠 . 예를 들어서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바이올린 같은 경우 다 좋았던 거는 아니었을 거란 말여. 지금 그 분이 만들었던 악 기가 좋았기 때문에 보존되어 왔고 그 악기 가치를 인정을 하고 증명이 되니까 비싼거야, 이게. 나도 인제 죽고 나서 수  백년이 지나면 몇 대 남은 것이 가격이 올라가는 것인데, 검증도 안 된 악기를 그렇게 많이 받는 것은 나는 좀 맞지 않다 고 생각을 하거든요. 근데 이게 또 돈이 얼마나 많으면 그쪽으로 쏠리냐 이거지. 애들이 그거 아니면 안할라고 그런다는 데. 글고 시험을 보러 가면 교수가 그런다는데 야, 뭐 이런 악기를 사오라고 그랬어. 자기가 권하는 악기를 안 사왔다는  거야. 그러면 안 되지. 그런 사람들이 있어. 악기가 좋은 것은 삼천 만원도 되죠. 근데 검증이 돼야 된다, 이거지. 내가 79 년도에 국악기 만드는 사람으로는 최초로 매스컴을 타게 되는 거야. TBC 동양텔레비젼 ‘나의 비밀은’이라는 거에 출연 하게 돼요. 그리고 중앙일보에서 대서특필을 하니까 외국 사람들이 붙게 돼. 악기를 만들어서 자기 나라에 수출해 달라 고. 삼 개월 만에 익혀버린 가야금 산조 악기를 만들다 보니까 내가 알지를 못하면서 악기를 만드는 것은 안되겠다 싶어가지고 제대하고 서울에서 일을 하면서  황병조 선생을 만나게 돼요. 선생님, 제가 돈은 없습니다. 대신 제가 최고로 좋은 악기를 하나 만들어 드릴 테니까 가야 금 좀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흔쾌히 승낙을 하시드라고. 그래가지고 우리 사장님한테 근무시간에는 만 들지는 않을 테니까 쉬는 날에 만들 테니까 재료를 날 하나 좀 주십시오 그랬지. 그래가지고 뒷판 하나, 앞판 하나를 얻 게 돼. 황병조 선생한테 최고급 악기를 넘겨주고 가야금 산조를 가르켜 주세요 그랬지. 근데 그게 삼 개월 만에 산조를  배워 버렸어. 악보도 없이. 그때만 해도 악보가 별로 없었어요. 싹 머리에다 담아버린 거야. 머리에 담았기 땜에 손만 보 면 돼.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양이 성이 안차. 그러면 나보다 진도가 빨리 나가는 학생들이 있어. 고 이삼학년 짜리들. 그 러면 야, 어디 한 번 타볼래 해가지고 어깨 너머로 이렇게 보는 거야. 인제 머리는 입력이 돼 있으니까 손가는 것만 보는  거야, 뒤에서. 앞에서 보면 헷갈리니까 뒤에서 방향 그대로 본 거지. 손 가는 걸 본 거야. 지금 민희식 교수라고 있어요.  그 친구가 고등학교 이학년이었어. 같이 배우러 다녔어요. 종로 단성사 거기까지 장충공원에서 걸어 다녔어. 외울려고.  따링 땅 땅 따앙 하는 식으로 외는 거야. 그리고 까먹었어. 그러면 전화를 해서 선생님, 어느 대목을 까먹었는데 한번만  연주해 주세요 그래. 그러면 전화기를 밑에다 두고 연주를 하나봐. 그러면 수화기로 받아가지고 잊어버린 부분을 연결을  시키는 거야. 올바른 선생님은 열심히 하는 제자 하나 만나는 걸 큰 행운으로 생각하는 거잖아. 그랬더니 인자 그만 배워 도 되겠네 그러시드라고. 삼 개월 만에. 사실은 월수금이니까 따지고 보면 한 달 반 밖에 안 배운 거지. 그 대신 연습한  시간이 들어가는 거지. 나는 절대 앞에서 배우는 것 보다 어깨 너머로 배우라고 그래. 뒤에서 보면 손이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 수 있잖아. 근데 앞에 앉아 있으면 반대로 가잖아. 제대하자마자 만난 아내 독립을 해 가지고 내가 완전히 어려운 생활을 하게 돼. 그때 내가 현재 처를 만나게 돼. 처가 그때 뭐를 했냐면은 이불제 품을 했어. 카시미론이불 있잖아. 어떤 사람들은 챙피하다고 하는데 나는 한개도 챙피할 것 없어. 그때 제품을 해 가지고  시장에 막 내고. 근데 나를 어떻게 봤는지 나하고 결혼하겠다는 거야. 친구소개로 만났는데. 내 군에 있을 때 공수훈련  받으면서 베레모 쓰고 찍은 사진을 봤던 가봐, 이 친구가. 제대하고 왔는데 친구가 그래. 어떤 아가씨가 널 소개해 달라 는데. 야, 내가 지금 여자 만나 뭐 하겠냐. 야, 너 그 여자 만나면은 충분히 너 먹고 살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 그래서 군 대 제대한지 사오일 만에 코낀거야. 그래서 대둔산을 놀러 갔는데 높은 데서는 끌고 올라가고 부축도 하고 그랬는데 거 기서 정이 좀 들었던가봐. 우리 와이프는 나하고 결혼 할라고 마음을 굳혔지. 난 결혼이 사치라고 생각했거든. 거기다 내 가 가진 게 없기 때문에. 근검하면 뭐해. 우리 집이 너무 너무 없는데. 하여간 선 한번 본 적도 없었고. 74년도에 만나가 지고 77년도에 결혼을 했지. 1월 28일 날. “오동나무는 천년을 가요” 여기 옥상에서 자연건조를 시키는 거에요. 어떤 분들은 레이져로 건조시킨다고 하는데 레이져로 하면 섬유질이 파괴가  돼. 오동나무가 결이 끊기는 거지. 급속도로 건조를 하면. 국산은 무늬가 이쁘게 나와요. 구름문양 같은 거는 천연적으로  나무를 켜면 나와요. 문양도 산수문하고 구름문양하고 나오는 것이거든. 오동나무하고 한지는 천년을 가요. 음 전달도  좋고 벌레도 안 슬고. 옛날에는 농을 만들 때 오동나무로 했잖아요. 오동나무 강도를 제작자가 얼마나 잘 아느냐에 따라  두께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딸려서 음이 나오는 것이거든. 이게 1~2년 바깥에서 말리고 그늘에서 숙성을 또 시켜. 한  3~4년 더. 고수환 연보 1979년  TBC 동양TV ‘나의 비밀은’            전국관광 민예품 경진대회 특선 1980년  전국산업디자인 공모전 우수상 1990년  전라북도 공예품 경진대회 심사위원 1991년  미국 LA 한국우수 상품전          스페인 골든 트로피 수상 1996년  전라북도 공예품 경진대회 심사위원           전라북도 전승공예 연구회 회장 1997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 지정 2000년  한국공예대전 운영위원 2001년  온고을 전통공예 전국 공모 운영위원장 2004년  의장등록출원(공후) 2005년  전주국악기 기능 보존회장 2007년  스페인 마드리드 시립박물관 초대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협회 기능회장          자랑스런 한국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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