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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
[최효준의 숨쉬는 미술이야기] 불친절한 현대 미술
관리자(2008-10-13 15:40:32)
좋은 전시, 나쁜 기획 최효준  전북도립미술관장 오늘날 미술 시장은 범세계적으로 투자·투기 자본이 몰리는 특수한 시장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세계 미술품 거래의 절반  정도 규모의 시장을 형성한 뉴욕을 필두로 런던, 베이징, 상하이 그리고 모스크바가 그 뒤를 쫓고 있다. 아시아의 약진도  주목할 만하다. 중국의 자본력이 뒷받침되어 중국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 값은 계속 치솟고 있으며 이미 중국 현대미 술이 세계미술계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이제 인도가 그 뒤를 쫓고 있다. 지난해에 베니스(비엔날레), 바젤(아트페어), 카셀(도큐멘타), 뮌스터(조각 프로젝트), 런던(경매)으로 이어지는 유럽에 서 그랑투어(Grand Tour: 현대에 연이어 열리는 미술행사 참가 여행을 17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하던 문화탐방 여행에  빗댄 표현)가 화제였다면, 올해 아시아에서는 광주, 부산, 서울, 요코하마, 상하이, 광저우 등지에서 대규모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가 비슷한 시기에 열려 세계 미술관계자들에게 아시아판 그랑투어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 ‘관계자’는 전혀 아닐지라도, 미술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적어도 광주나 부산, 서울에서 열리는 비엔날레 중 한둘 을 관람했거나 관람할 계획이 있을 것이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일반 관람객이 이러한 행사에 다녀올 때 갖게 되는 인상,  느낌이다. 감동적이었는지, 즐거웠는지, 무덤덤했는지, 어리둥절했는지, 아리송해했는지, 황당했는지, 불쾌했는지… 어 차피 전시된 모든 작품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볼 수도 없고(그렇게 보자면 한 행사 관람하는데 며칠이 걸릴 수 있다),  몇 작품의 인상이 전체의 그것을 결정할 터인데, 모처럼 시간을 내서 먼 길을 가서 적지 않은 입장료를 지불한 만큼 좋은  쪽의 느낌을 간직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런데 왕왕 그것이 쉽지 않다. 우선 알아먹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현대미술’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미술은 친절하지 않다. 친절하다는 것은 설명적인 것이고 설명적인 것은 감상자의  자율적이고 주관적인 수용을 방해한다는 선입견이 만연해 있다. 그리고 암호와 같은 장치를 해 놓아 어느 정도 진입과  소통을 어렵게 만들어 ‘아는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통하게 하려는 숨은 의도도 엄존한다. 한편으로, 시간을 맞추면 도 슨트의 전시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준비되어 있다면 오디오 가이드를 들을 수도 있고, 도록을 구입한다면 거기에서 간단 한 작품 설명을 접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부산비엔날레의 경우 총무게가 5kg이 나간다는 고가의 도록시리즈물을 구입할  일반관람객은 많지 않다. 결국 대다수의 일반 관람객들은 전시물을 스치고 지나갈 때 얼핏 떠올랐다가 사라진 희미한 인 상의 기억만을 간직하고 자리를 뜬다. 그리고 많은 경우 어떤 분명한 인상조차 가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부산비엔날레 본전시에 카토 고라는 일본 작가의 대리석 조각 세 점이 한 공간에 설치되어 있다. 그중 하나, 눕혀진 대리 석의 남성 토루소 아랫배에 금속날과 나무 손잡이의 칼이 긴 반달 모양의 상처 끝에 꽂혀 있다. 즉시 받는 느낌은, 작품  전체를 대리석으로 만들지 않고 칼은 실물재료의 것을 썼다는데서 받는 어떤 불편한 긴장감 같은 것이다. 사실 바쁘게  전시장을 돌며 이 작품의 작가가 일본인인지 확인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그 일본 특유의 ‘할복(割腹)’의 형상화인줄도 모 르고 “좀 섬뜩하네”하고 지나치기 쉽다. 나중에야 도록을 보니 작품 해설에 이렇게 쓰여 있다. “<조각상II>는 할복, 그것 도 분명 일본의 문학자 미시마 유키오의 자결을 모티브로 하였다.” 아하, 그러고 보니 그렇다. 미사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노벨상 후보에도 올랐던 소설가로, 원래 약골에 수재였던 그가  보디빌딩을 통해 자신의 육체에 내재한 남성성을 확인하고, 동성애에 몰입하고, 금각사라는 소설을 집필해 널리 알려진 다. 1970년, 45세의 그는 자신이 조직한 우익단체의 대원을 이끌고 한 자위대의 주둔지에 난입하여 총장을 인질로 잡고  천명의 대원들 앞에서 일본의 재무장을 역설하는 일장연설을 하는데, 호응 대신 야유와 멸시를 받자 그 자리에서 할복  자살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군사대국 일본의 부활을 꿈꾸는 극우주의자들이 다시금 양지에 나서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순교자가 된 것이다. 그가 할복의 순간을 위해 보디빌딩에 집착했는지 모른다는 말도 있고,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여 영원히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고자 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런 ‘스토리’를 알고 다시 이 작품을 보면 그것은 좀 다르게 보인다. 더 많고 복잡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도록의 해설 은 이렇게 이어진다. “카토 고의 작품 중 다수는 외관이 스타일리쉬한 한편, 작품 내부에는 부성과 모성, 일본과 서양,  폭력과 관용, 우월감과 열등감 등 인간의 심리에서 서로 모순되어 존재하는 요소들이 갈등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이들  연작은 일종의 연약함을 지닌 남성성을 초극하고자 한 카토 고 자신의 격투의 흔적이기도 하다.” 알쏭달쏭한 해설이지 만, 미시마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보디빌딩을 통해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바꾸었고 연약함을 지닌 남성성을 초극하고 자 했다는 점, 국가적 민족적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바꾸는 데 집착하고 목숨까지 걸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작품을 다시 보고 그 떠오르는 느낌에 충실할 수 있다. 현대미술에 관해서 “뭘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암호의 해독과 같은 현대  미술 독법을 몸에 익혀야 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들은 이런 말에 기죽지 마시라. 오히려 좋은 소식이 있다.  위의 경우가 그저 한 예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요즘 비엔날레류의 전시에서 접하게 되는 대부분의 현대미술에서 미술 어 법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 그가 하고자하는 얘기, 작업의 배경, 이런 것들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 실 ‘미술’을 몰라도 그리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을 친절하게 전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관람자가 스스로 느껴보고 궁리해보거나, 기다 렸다가 시간을 맞추어 도슨트의 설명을 듣거나, 자료실에서 비치용 도록을 들춰보거나, 관계자에게 묻거나, 자료를 검색 해보거나 해서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누가 그 귀찮은 일을 하는가 말이다. 그러니 전시 관계자는 그러한 장치들을 다 양하게, 다기하게, 그러나 마음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게 준비해 놓아야 옳다.  부산비엔날레에 다시 갔을 때 카토 고의  방 입구에는 어느새 가드레일이 쳐있어 세 점의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관람객과의 소통 이전에 작품의 보 존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사람이 만지면 대리석도 피지분에 의해 변질이 일어난다). 너무 설명적이어서도 안 되고, 작 품 보존 조건도 지켜야 하고, 그러면서도 관람객이 사전 정보 없이도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작품을 매개로 작 가와 의미 있는 소통이 가능하게 하되, 감상자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전시 연출을 해주는 것, 이것이  21세기 전시 기획자가 늘 도전해야 할 목표이다. 그런 고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기획자는 나쁜 기획자이고 그런 고민이  담기지 않은 기획은 나쁜 기획이니 독자 여러분은 당당히 탓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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