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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
[허철희의 바다와 사람] 부안 해방조개
관리자(2008-10-13 15:40:02)
해방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해방조개 조찬용 조개들 살이 올라 부풀어 오르는 철이다 동네 사람들 잠시 농사일 제쳐두고 바다 풋것들 입맛 그리워 바다로 간다 '아무리 생각혀도 이놈의 날씨가 못씨게 변히가는 겝이여' 한숨짓다 둘러보면 날은 가물어 보리는 제 키를 크지 못하고 바람에 흙먼지만 봄이 한창이다 키 작은 민들레 땅에 엎디어 크다 말았다. 바닷물이 어디에 제 몸을 숨겼는지 모래뻘이 십리 끝이다. 물가 따라 호미로 모래뻘을 뒤지면 호미끝에 들킨 황금색 해방조개들 '뻐글뻐글헌 것이 징그랗게도 많네 그려 참말로 오져 죽겄네' 해방되던 해 먹을 것 없어 날이면 날마다 모래뻘을 뒤지던 동네 사람들 이야기 속엔 살기 좋은 그리움 냄새인지 때때로 바다에 얽혀 산 내력의 신음인지 혀끝에 간간한 조개 국물 생각하면 땀방울이 허기져 보인다. 뜸했었다 해방을 맞아 제 고향으로 다 돌아갔는가 싶었다 해방된지 오래 됐는데 해방조개는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도 모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이곳을 제 땅이라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고개가 누이고 어깨가 늘어지도록 바구니에 그득 담긴 해방조개 바닷물 찌꺽거리는 신발 소리에 집으로 돌아가는 모랫길 동네 사람들 허기진 그리움을 보면 아직도 우리에겐 해방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고려가요의 하나인 <청산별곡> 여섯 번째 연이다. 몽고군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들의 강점이 계속되는 암울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 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들이 살아갈 이상향은 다름 아닌 심산구곡과 바다였다. 그곳에서는 침탈자들의 말발굽을 피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머루랑 다래랑 나문재랑 굴, 조개랑 먹으며 연명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섬으로 들어갔다. 그리 고 강화도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고려 정부에 물자를 공급해주었다. 이 덕분에 최씨 무인정권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 던 몽고군을 상대로 60여 년 동안이나 저항할 수 있었다. 비록 삼별초는 장기간의 항쟁경험을 축적한 민중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조직화 할 생각을 갖지 못하고 섬에서 섬으로 옮 기며 항쟁하다가 곧 진압당하는 한계점을 지녔지만 진도에 들어와서 용장성을 쌓고 궁전을 건립하여 도성으로서의 시설 을 갖추는 한편, 진도를 거점으로 먼저 전라도를 장악한 후 해안지대는 물론 경상도 일대까지 강력한 영향권을 행사함으 로써 약 9개월간의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다. 민족의 자주정신을 드높인 이러한 삼별초의 항몽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갯벌의 높은 생산력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갯벌에서 밭농사 열 배의 소출이 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환경부의 연구 결과 갯벌은 농지보다 3배 이상, 영 국의 ‘네이쳐’지는 갯벌과 강 하구가 농경지보다 1백배 이상의 경제적 가치를 지녔다고 한다(허정균의 ‘새만금 새만금’에 서 따옴). 해방조개 이야기 '뻐글뻐글헌 것이 징그랗게도 많네 그려... 참말로 오져 죽겄네' 호미로 뻘을 긁어 내려가노라면 주어 담기 바쁘게 연달아 누런 몸뚱이를 드러내는 조개를 보며 아낙들이 좋아라 하는 소 리다. 해방조개 이야기다. 해방조개를 다른 지역에서는 '개량조개' 혹은 '노랑조개'라고 부른다. 모래펄갯벌에 서식하며  몸길이는 6~7cm 정도, 황갈색의 껍데기에 살은 누런색을 띤다. 개량조개를 부안사람들이 해방조개라 부르는 연유는 이 렇다. 해방되던 해,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보릿고개를 넘어야 할 판국인데 설상가상으로 부안에 흉년이 들었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갯벌에 조개가 섰던 것이다. 그 해 이 조개로 굶주림을 면했다하여 '해방조개'라고 부른다고 이 지역 어른들 은 말한다. 그 후로 자취를 감췄던 해방조개가 1960년대 초에 부안의 갯벌에 다시 섰다. 어찌나 서식밀도가 높은지 뻘 반  조개 반으로 뻘 한 평 남짓만 뒤집어도 한 양동이를 채울 정도였다. 연일 사람들은 갯벌로 몰려들고, 갯벌은 화수분처럼  파내도 파내도 또 그만큼의 조개를 밀어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고구마 수확하듯 갯벌에 소를 몰고 와 쟁기로 뻘을 뒤엎 었다. 가족들은 쟁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살 드러내는 조개를 주워 담기 바쁘고... 처치 곤란하게 많은 양의 조개를 부려 놓은 집집마다 또 한 번 바빠진다. 해방조개는 원래 찌개나 회무침을 해 먹어야 제  맛이지만 그 많은 조개를 무슨 재주로 다 깐단 말인가. 그러기에 대부분의 가정은 고추 말리듯 말려 저장하는 방법을 택 한다. 그러려면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몇 차례고 삶아 살을 꺼내어 말려야 한다. 담장 밖의 조개무지는 높이를 더해가고,  광주리, 멍석, 장독대 등 좀 넓다란 도구란 도구는 다 꺼내놓고 그 위에 해방조개 말리는 풍경이라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이렇게 말려 갈무리해 두었다가 겨우내 김치나 무를 넣고 찌개를 끓여 먹는데,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고 맛이  있었다. 새만금갯벌 해방조개의 운명 “조개가 다 뒤집혔어요.” 지난 해 7월 22일 계화도 주민으로부터 다급하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달려가 본 계화도갯벌은 참혹했다. 새만금 가력배 수갑문에서 가까운 돈지, 계화도 갯벌의 하조대 수만 평에는 수백 톤의 해방조개 사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사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배수갑문을 열어 물을 빼자 평소에 물에 잠겨있던 조간대 하부 깊숙한 지대가 드러났고, 긴 장마 끝이 라 만경, 동진 두 강 상류로부터 오염 물질과 민물이 대량 유입되어 부영양화와 염분농도가 낮아진 상태에서 모처럼 드 러난 지대에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자 조개들이 집단으로 폐사한 것이다. 이제 해방조개는 부안의 갯벌에서는 더 이상의  종 보존이 어려워 보인다. 모래펄갯벌을 선호하는 해방조개는 부안의 경우 마포갯벌이나 대항리갯벌, 그리고 새만금방 조제 내해지역인 계화도갯벌에 주로 서식하는데 마포나 대항리갯벌에서는 2000년대 들어 자취를 감추었고, 계화도갯벌 에서는 하조대 깊은 곳에서만 서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마저 이렇게 몰살해 버린 것이다. 하조대 더 깊은 곳 그 어디 에 아직은 모진 명줄 붙들고 있는 해방조개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나 새만금 물길을 트지 않는 한 이들도 시한부 생명일  뿐이다. 뭇생명을 품고 있는 갯벌은 개발대상이 아니다. 새만금 해방조개의 해방을 바라는 마음이다. 허철희/ 1951년 전북 부안 변산에서 출생했으며, 서울 충무로에서 '밝' 광고기획사를 운영하며 변산반도와 일대 새만금 갯벌 사진을 찍어왔다. 2000년 1월 새만금해향제 기획을 시작으로 새만금간척사업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2003년에는  부안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룻 『새만금 갯벌에 기댄 삶』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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