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 |
[신귀백 영화엿보기] 후배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관리자(2008-10-13 15:39:20)
후배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페데리코 펠리니의 <8 1/2, 1963>
예술가의 벽
알지. 나? 펠리니야. 어느 중년 남자라고 말하기에는 좀 나가는 감독이란 것을. 지금부터 그대들이 보게 될 이 영화는 꼭 유명 감독이 겪는 것만은 아니야. 조금만 눈을 달리하면 작곡을 하거나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도 해당되겠지. 안 팔리는 잡지에 글을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일거야.
잘나가던 감독도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지. 이 위기극복에 대한 고민은 예술가 모두에게 관련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믿어. 한 개인의 운명에 맞선 좌절이나 단순한 백일몽이 아니기에 특히 젊은 영화쟁이들은 잘 봐두길 바래. 내 고민들이 그대 들의 통과의례를 담는 주요한 지평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니. 관객 역시 예술가의 세계를 이해하는 터닝 포인트가 되기에 당연히 주목하실 것. 특히 예술한답시는 ‘남자’들 잘 보시길.
135분이면 좀 길지. 길지만 예술가의 눈으로 보길 바래. 마피아의 관점에서 보아야 <대부>가 바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 야. 아시겠지만, 이거 <8 1/2>은 솔직히 자전적 이야기야. 내가 깐에 유명인산데 내 고통과 위기를 그냥 보여 줄 순 없잖 아. 그래서 꿈과 현실을 병치하여 좀 복잡하게 이야기 했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줘야 하는 괴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의 고 백성사니 너무 가혹하게 보지는 말아줘. 그리고 오래도록 엉킨 나의 연애와 연애의 고통도 담았어. 어린 날의 기억 또한 나를 옥죄는데, 별 수 없이 이 고백은 플래시백을 사용할 수밖에…….
다짐하건대, 사소설처럼 자기 연민이 넘치는 작품이 되게 하지는 않겠어. 내 고통에서 연민은 발견할 수 있을지언정 남 루와 애처로움 그런 것 없다는 것을 약속하지. 세기가 알아주는, 시대의 지평을 여는 작가라는 말을 들은 사람이 아픈 다 리 내놓고 장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그렇지.
당신들도 알 거야. 아이디어가 고갈된 예술가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다는 것을. 샘물이 고이지 않는데 바닥을 긁는 인 간은 가여운 영혼이야. 당신들이 나의 새로운 작품과정과 그에 따른 내 샘에 두레박을 길어올리는 것이 조금은 혼란스럽 겠지. 하지만 당신들은 이 권태롭고 무질서한 듯 보이는 나의 삶과 영화 속에서 질서를 읽어 주길 바래. 하지만 질서가 갖는 우아함까지는, 글쎄…….
나의 원수들
첫 장면 기억나지. 설정숏이 아니어서 당황했을 수도 있지. 고급 승용차 안에 갇혀 있다가 하늘에 오르지만 이내 끌어당 겨져 내려오는 추락 장면 말이야. 사실 꿈이지. 모더니즘 같다고? 그래, 그동안의 나 펠리니를 규정하던 사람들은 조금 혼란스럽겠지. 너무 규정짓지는 마시길. 여기 끌려 내려오는 남자, 기억나는가? 나폴리 해변에서 소피아 로렌의 귀걸이 를 삼킨 <해바라기>의 남자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아닌가. 뭐, 나 펠리니의 분신이란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어.
내 나이 마흔 셋, 그 동안 직업 감독으로 <길>이나 <달콤한 인생>을 장인낙관으로 봐주는 사람도 많았지. 그렇지만 네 오리얼리즘이라는 명칭도 이젠 도그마 아닐까. 그러니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하겠기에 제목도 추상화 번호 붙이 듯 <8 1/2>이야. 당연히 예술가는 예민한 촉수를 가져야 하고 더 이상 한 곳에 머무르면 안 된다는 것을 나 역시 누구보 다 잘 알고 있어.
나를 제작자와 대중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어릿광대로 보는 시선, 틀린 것은 아니야. 그래, 이 어릿광대에게 이 새로운 영화의 완성은 서커스의 탈출미션과 같은 일이야. 방대한 출연진들 아니 너무 많은 캐릭터의 등장으로 누가 누군지 모르 겠다고? 나는 끊임없이 칭얼대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 갇혀 살고 있어. 나는 이 거대한 감옥의 수많은 방을 화면으로 만 들었어. 당신들이 이걸 열어젖히는데 집중이 좀 필요할 거야. 그럼 우리 온천으로 갈까?
쌓아온 업적과 차기작 속에 새로운 세계를 강요받는 삶, 이거 죽을 맛이야. 그런데 첫 장면부터 시적 영감이 부족하다, 문제의식이 또 철학적 전제가 부족하다, 전체적으로 후지다고 말하는 놈 있지. 내 작품을, 고발로 시작해서 결국은 공범 의식으로 끝맺는다고. 흥, 좌익 지식인답게 말하는 이 시나리오 작가가 사는 패턴은 완전 라이트지. 내 대본이 대략적이 고 모호하고 피상적이라고 말하는 귀여운 자식. 옛날 같으면 내가 광천수를 퍼주는 저 가난한 소녀애들의 노동을 리얼리 즘으로 담았겠지. 이젠 아니야. 리얼리즘 아니면 판타지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던 당신들 다시 생각해 보시길. 그 사이에 프로이트와 기독교 그리고 섹슈얼리티 등 너무 많지 않은가.
온천리조트 주변에 설치된 아파트 열 채 값을 들여 만든 우주 발사대 배경은 돈벌이가 목적인‘그들’이 만든 망상의 바벨 탑이지. 내가 만들어야 할 새 영화는 지구가 파괴된 이후의 현대판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이야기인데, 알량한 저널들 마 주칠 일이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지. 여기다 제작자는 ‘모두에게 흥미 있어야 한다’고, 미치겠군. 그가 나를 마에스트로 라고 부르는데, 분명 비아냥기가 섞인 말이라는 걸 나는 잘 알지. 여기에 배우들과 사랑하는 나의 여인들 모두 나를 괴롭 히는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지. 이 온천탕은 거의 지옥 전 상황이야.
나이트나 패션쇼에만 관심 있는 애인도 애인이지만 마눌은 큰 문제야. 경매장 짧은 머리 그 여자가 내 아내야. 우아하면 뭐해, 마눌은 나를 짐승 혹은 건달이라고 말하는데. 진실을 내뱉는 이 매력적인 원수는 청소와 빨래는 못 하지만 헤어지 기에는 너무 아까운 여자야. 부루주아의 아내 역할이 지겹다며 나에게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말하는 것 들었지. “위선을 감추는 당신의 가상한 노력이 불쌍해. 당신의 거짓 맹세를 듣는 지겨운 일이야.” 마누라랑 오랜 시간 불 끄고 하는 대화 는 지옥이었어.
배역이 적다고 앙탈 대는 늙은 여배우. 사실 이것은 별거 아니야. 일로 생긴 고통이니까. 뭐, 인간적으로 친한 것이 나쁠 리 없겠지만 잔인하게 대할 때 좋은 연기가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이런 배우의 이기심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는 못해. 문제는 마눌 말고도 또 여자들이지. 나의 연인들이여, 한 마디 할까. 행복은 남에게 상처주지 않으면서 항상 진실 을 말할 수 있음에 있다고.
온천 스팀에 몸을 감싼 모습이 심판을 기다리는 연옥의 모습 같다고? 아니, 할 수 있다면 나는 압력솥으로 표현하고 싶 었지. 사우나에서 추기경께 왜 행복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데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씀만 하시더 만. 참나, 맹한 이 영감님이 무슨 새의 이름을 아느냐고 묻더라구. 나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살덩어리 여자가 언덕에서 내려오던 장면 뒤의 플래시백 화면 기억나지. 바닷가 풍경과 함께 하는 뚱뚱한 창녀와 흥겨운 음악 뒤에 신부에게 잡혀 오는 소년 그게 나야. 여럿 앞에서의 용수를 쓴 채 끌려오는 나의 굴욕적 참회 장면들에서 언제나 내가 자유로울 수 있을 지.
흐흐, 말 많은 시나리오 작가를 교수형 시키는 것 보았지?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은 서커스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을. 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추기경과 의사를 비롯 제작자부터 여배우들과 허름한 엑스트라 잡역부까지 결국 지들도 서커스 멤버야. 나와 나 아닌 것들과 함께 꿈을 꾸고 부대끼고 하는 모습을 서커스장의 윤무로 행진하는 스타일로 끝을 맺을 수 밖에 없었어. 뭔가 모르겠다고? 마술사 친구가 한 말 기억나시는지? ‘서커스에는 속임수도 있지만 실제도 있어’ 라는 말.
서커스 인생
저물도록 사막과 초원을 말달려온 나에게 이제는 늪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알아. 사실 여자나 제작자가 문제의 다는 아니야. 문제는 바로 나에게 있는 거지. 살아가면서 여자문제는 어떻게든 해결이 가지만 영화는 달라. 스텝과 배우들에 게 귀를 여는 것은 좋지만 세트벽에 못박는 녀석까지 다 챙길 수는 없는 일, 문제는 다시 말하지만 내 자신과 내가 표현 해야 할 나의 눈이지. 촬영의 후회, 편집의 후회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의 후회,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을 넘어서야 하는 것, 그대들의 장르도 비슷할 거야.
순수와 순결 이런 것들과 결별을 이야기 하는 이 영화의 뒷배경에 숨어있는 도상학을 읽어주길 바래. 단조로운 화면은 하나도 없지. 원경 근경 중경이 있는 풍성한 화면들이 보기는 좋지만 돈이 많이 들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차라리 내가 오래도록 좋은 그림들을 연구한 화가가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이 고귀한 이미지들을 포기하진 않을 거야. 관념보다는 새로운 이미지의 그림을 기대하시길……
팔할이 바람이었다고 말한 시인처럼, 팔할 오푼이 세상과 민중들에 대한 것들이었지만 나 좀 달라지겠다는 의미야. 선택 하는 법은 충분히 배웠어. 더 이상 보증을 원하진 않아. 팔할의 날들 동안 시대를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나 자 신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것. 이제는 빵만이 아닌 나만의 레시피로 나의 ‘요리’를 만들고 싶어. 문제는 이야기나 테크닉이 아니라 비전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시간이 별로 없어.
나는 나의 패를 보여주었어. 그렇다고 당신들에게도 패를 보여 달라고 하는 건 아니야. 부디, 나 펠리니에게 끌려가지 마 시길. 낙타처럼 마누라나 직장상사 혹은 고정된 이미지의 관객들의 짐만 지지 말고, 사자처럼 내달리시길. 그래도 절대 로 서커스단의 사자가 되지는 말 것. 끝으로 한 마디만 더 하지. 새로움을 보여주어야 하는 고통 받는 감독으로서의 예술 적 경외감이 느껴진다고? 후후, 이건 영화 속 연출이자 연기였어. 영화 속 구이도는 내가 아니고 바로 당신이었다는 것 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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