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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
[서평] 놀라운 아버지 1937~1974
관리자(2008-10-13 15:26:48)
아들이 길어 올린 아버지의 기억 아들이 기획하고 아버지가 그림과 글을 쓴 책이 나왔다. 『놀라운 아버지 1937~1974』조동환, 조해준 부자가 함께 엮어 낸 개인사 다큐멘터리이다. 아버지 조동환(73)씨는 1935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서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6년 전 부터 옛 기억을 되살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이 다큐멘터리 드로잉을 기획한 화가 조해준은 조동환의 막내아들이다 . 그는 1972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이들 부자는 2002년부터 공동 작업을 시작하여 아버지 조동환의 개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드로잉 시리즈 ‘1937년부터 1974년까지’와 ‘1974년부터 2008년까지’를 진행하고 있다. 이들 다큐멘터리 드로잉의 기획과 출판을 주도한 사람은 조동환씨의 막내아들인 화가 조해준(36). 그가 아버지에 대해  비로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미술이라는 같은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제6회 프랑 스 현대 미술전(1927년, 동경/오사카)’도록을 어떻게 아버지가 소장하게 됐는지, 왕궁중학교에 있는 조각상에 대한 궁금 증이 이번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퇴직 후 전주에 머물고 있는 아버지와 편지왕래를 하면서 아들은 가족사와 아버지 개인 사를 드로잉으로 제작하기를 권유하게 되었고 이번에 책으로 엮여 나온 것은 기존에 전시되었던 것과 미발표된 작업을  한데 묶어 출판하게 된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하여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 어머니가 걸어 온 세월 속에서 경험하고 보고 들은 것은 내가 아버지와 대화하기 이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삶에 관심 을 가진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우리 부모 세대와 조상들의 삶에 대한 경외라고 생각한다”라고 조해준은 말한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내 나이 여덟 살 때 중백부(中伯父)님이 급성맹장염으로 병원에도 못 가시고 작고하시는 장면을 처음으로 보았다. 중백 부님은 딸만 두분 두셨는데 작고하시기 전날까지 6살 된 딸을 업고 모자리 피를 뽑으셨다(나는 현재 중백부모님의 제사 를 모신다)” 아파도 병원구경 한번 하지 못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일제 시대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의 모습이 눈앞 에 선하게 그려진다. 일본 북해도로 징용 간 아버지를 따라 갔던 조동환은 광복을 맞아 배를 타고 부산으로 귀국하게 된 다. 그 때의 기억이다. “1945 광복이 되어 일본 북해도 아오모리 항구에서 고국으로 귀국하기 위하여 6천여 명이 아래 배 를 타고 밤낮으로 가리지 않고 동해바다를 1주일 항해하여 오는 도중 동승한 산모 한 분이 아기를 출산하여 살리지 못하 고 동해바다에 수장하고 부산에 도착했었는데, 비바람으로 배가 심하게 흔들려 거의 다 배멀미로 어려운 고비를 넘겼으 나, 애석하게도 신생아는 살리지 못했다” 징용갔다 돌아오는 귀국선 안에서 낳은 아이를 수장할 수 밖에 없었던 산모의  고통은 어땠을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연필로 드로잉하고 한 글자 한 글자 새겨나간 글이 한데 엮인 『놀라운 아버지 1937~1974』(새만화책 펴냄)는 일제시대 부터 유신까지 조동환의 개인사이자 가족사를 풀어 놓는다. 그는 1954년에 마티스가 죽었다는 기억을 통해 “초등학교 3 학년 수준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는 마티스의 얘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의 그림이 바로 마티스가 이야기 했던 것과  같은 정감 있는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이 책은 개인사이자 가족사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개인사로 치부할 수는 없 을 것이다. 동 시대를 살아 나오면서 겪었던 우리 부모님 세대의 기억의 편린이자 바로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이 책에는  조동환이 겪었던 수많은 안타까운 죽음들이 많이 등장한다. 병원이란 것을 알지 못해서 맞게 되는 죽음에서 이념 때문에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었던 시대의 죽음까지. 이 기억들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모습이자 한국  현대사의 아픈 기억들인 것이다. 내 아버지도 이제 곧 칠십 되어 가신다. 은퇴하신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지금은 김제에서 조그만 흙집을 지어 놓고 어 머니와 두 분이서 조그마한 텃밭에서 온갖 야채와 과일을 키워 자식들에게 가져다 주는 재미로 소일하신다. 큰아들인 나 도 벌써 마흔이 다 되었건만 요즘도 전화를 하시면 가끔은 “그래, 아빠다”라고 하시는 경우도 있다. 마치 내가 네 살배기  둘째 놈에게 하듯이 말이다. 자식이 아무리 나이 들어도 부모님 눈에는 여전히 철부지 어린아이이고 불안하시기만 한 가 보다. 물론 내게도 나이가 드셨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가장 어렵고 무서운 존재이기만 하다. 웬지 꾸중이라도 들을라치면  초등학교 꼬마였던 때로 돌아가는 듯만 하다. 아버지의 한 말씀, 한 마디에는 권위가 살아 있고, 삶의 경험이 녹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도 아버지의 기억을 나누고 아버지를 좀더 이해하고 싶다. 윤영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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