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 |
[박물관 대학] 도자기
관리자(2008-10-13 15:25:54)
익살의 풍요로움과 단아한 백색의 향연 - 조선시대의 도자기
강경숙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시대개관
조선(1392~1910)의 국가 이념은 성리학(性理學)이다. 이는 태조 이성계(1392~1398)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나간 원동력이었다. 3대 태종(1400~1418)은 정치제도를 개혁하여 왕조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새로운 정치의 틀 위에서 세종(1418~1450)은 집현전(集賢殿)을 중심으로 한글을 창제하는 등 민족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새로 운 활자가 주조되어 인쇄술이 발달했고, 천문·농업·과학·무기 등의 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세조(1455~1468) ·성종(1470~1494)에 걸쳐 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편찬되고 각종 사서(史書)·지리지가 출간되어 국가의 체제가 완비되기에 이르렀다.
성종대부터 시작한 지방에 근거를 둔 사림(士林)과 역대 왕을 보좌했던 실제적인 지배층인 훈구(勳舊) 세력의 대립은 드 디어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으로 번졌다. 이에 정계의 진출을 포기한 사림 학자들은 지방 서원을 중심으로 인재를 길 러냈으며 이 결과 한국 유학사상 최고의 학문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 대표적 학자는 퇴계 이황(李湟)과 율곡 이이(李珥) 이다.
임진·정유왜란(1592~1597)과 정묘·병자호란(1627~1636)은 사회, 경제적 개혁인 대동법를 실시하게 된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수취 체제의 변화가 초래되었고 부농(富農)과 거상(巨商)이 등장했다. 경제 구조의 변동은 봉건적인 신분 질서의 붕괴를 초래했고 서민 문화가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중국을 통해 들어온 기독교 사상과 서구 문물은 문화 전체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은 신사조는 실사구시(實事求是)에 기초한 실학으로 구체화되어 영조 (1724~1776)와 정조(1776~1800)대는 세종 이래 문화의 제2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이 기간에 제작한 백자 달항아리는 중 국·일본에 없는 순결과 포용을 상징하는 무한한 저력의 표상이다. 또 겸재 정선을 중심으로 진경산수화에서, 단원 김홍 도와 혜원 신윤복을 중심으로 풍속화에서 독자적인 한국만의 화풍을 이루어냈다. 이 외에도 수원 화성과 같은 세계 문화 유산은 18세기 선비 문화의 총체적인 결과물이다.
19세기의 조선은 약화된 왕권과 대원군의 쇄국정치에 봉착하여 세계 열강의 제국주의에 휘말리면서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는 1910년 종말을 고하고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일제 강점기 시대를 겪 어야만 했다.
분청사기
분청사기는 백자와 더불어 조선도자의 2대 주류를 이룬다. 이는 14세기 중엽경 상감청자에서 자연스럽게 출발하여 15세 기 전반에 다양한 기법으로 발전했고 16세기 전반경 백자에 의해 흡수 소멸되었다. 분청사기는 청자나 백자와는 구별되 는 특징과 내용을 가지고 있어 한국 도자사상 가장 독창성이 발휘된 도자기이다.
분청사기의 특징 및 종류
분청사기라는 용어는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없다. 19세기 이후 일본 도자 애호가들 사이에서 미시마[三島]로 불렸지만 그 출처가 불분명할 뿐 아니라 특징을 나타내는 이름도 아니다. 1930년 경 고유섭(高裕燮)은 그릇의 특징을 들어 ‘분장회청 사기(粉粧灰靑沙器)’로 명명했으며, 이를 ‘분청사기’로 줄여 오늘날 학술용어가 되었다. 분청사기의 태토는 천연산의 이 차점토인 목절점토(木節粘土)이다. 유약은 천연에서 얻을 수 있는 생유(生釉)로서 주성분은 장석이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백토분장기법과 활달한 무늬에 있다. 백토분장을 어떻게 하는냐에 따라 나타나는 아름다움의 효과가 각각 독특하다. 무늬의 종류에는 상감기법·인화기법·박지기법·조화기법·철화기법·귀얄기법·분장(덤벙)기법 등 다양하다. 상감기법은 청자 상감기법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무늬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상감과 인화기법을 동시에 사용한 <분청 사기 상감 용문 항아리>는 크기나 용무늬로 보아 왕실용이었을 것이다. 이 형태는 청자에서는 볼 수 없다. 또 <분청사기 상감 어룡문 매병>은 물가의 수금·연화와 함께 어우러진 어룡(魚龍)의 율동미가 돋 보이며 형태는 14세기 청자 매병의 여운를 가지고 있다. 상감에는 선상감과 면상감이 있는데, <분청사기 상감 모란당초문 항아리>는 모란과 당초 넝쿨의 두드러진 모습이 면상감으로 장식되었고 입체감을 준다.
<분청사기 상감조화 모란문 네귀 항아리>는 면으로 분할한 후 중심에 모란잎만 상감하고 그 위와 아래 문양대는 연판 문과 기하문양을 가볍게 조각하여 시원한 활달성이 차분한 가운데 표현되었다. 이러한 면상감기법에서부터 박지기법이 고안되었을 것이다. 박지기법의 분청사기는 백토분장 위에 그린 무늬의 배경 부분을 긁어냄으로써 배경의 회색과 무늬 의 백색 대비가 자연스러운 효과를 자아낸다. <분청사기 박지 연어문 편병>은 너울너울한 연잎 서너잎이 시원스럽게 펼 쳐진 사이에 연봉오리와 물고기를 적절히 포치시켜 한 여름날의 서정적인 연지(蓮池)의 풍광을 소박하게 감상하게 해준 다. 이처럼 재구성된 무늬는 높은 수준의 작가 수업을 받은 전문화가가 그린 무늬와는 달리 한국인의 원초적인 정서가 풍긴다.
분청사기의 진면목은 그릇의 전면을 도장으로 찍어 완전히 메운 인화기법에 있다. <분청사기 인화 집단연권문(集團連 圈文) 병>은 작은 국화꽃 5~6개를 묶어 한 단위의 도장으로 만들어서 이를 반복해서 찍은 후에 백토를 감입한 것이다. 이러한 장식기법은 동일한 문양의 반복이어서 현대 추상화를 방불케 한다. 현대의 추상화가 15세기에 이미 분청사기에 서 이루어진 셈이다. 이 기법은 주로 경상도 지역에서 유행했다. 중앙 관아의 공납품은 정교한 집단연권문에 상납 관아 의 이름과 제작지 이름을 같이 새긴 그릇이 많다. <분청사기 인화 집단연권문 ‘경주장흥고’명 항아리>가 이러한 예 중의 하나이다. 관아 이름과 같이 새긴 지방이름은 주로 경상도 지명이라는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관아의 이름을 새긴 동기는 태종 17년(1417)에 호조(戶曹)가 기명 관리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방안을 올린 내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외공 사목기는 사옹방에서 받아들여 시행하고 장흥고에서 봉납을 관장하는데…그릇이 나가면 거 두어 드리는 일이 끝까지 않되어 숨기거나 파괴되어 환납의 수는 겨우 1/5이다…장흥고에 바치도록 된 사목기는 장흥고 석자를 새기게 하고 기타 각 관청에 납부하는 것도 장흥고의 예에 의해 각각 사호를 새겨 상납케 하며, 이상에서 제시한 글자 새긴 그릇을 사장한 사실이 드러나면 관물을 훔친 죄로 처리하여 거폐를 없애도록 하십시오 하니 모두 이를 따랐다 .” 『太宗實錄』卷33, 太宗 17年 4月 丙子(20일) 條.
“…外貢砂木器 以司饔房納施行 而庫專掌捧納…故未得終始考察 或匿或破 還納之數 僅至五分之一…長興庫貢案 付砂 木器 今後刻長興庫三字 其他各司所納 亦依長興庫例 各刻司號 造作上納 上項有標器皿私藏現露者 夷官 物坐罪 以絶 巨弊 皆從之” 또 제작 지명이 들어간 이유는 세종 3년(1421)에 공조(工曹)가 진헌한 내용에 “진상(進上)하는 모든 그릇 은 단단하게 만들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고 깨진다. 금후로는 그릇 밑에 장인의 이름을 쓰게 하여 후일의 증거를 삼고자 한다. 주의하지 않고 함부로 만든 자의 그릇은 물리도록 하겠다” 라는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世宗實錄』卷11, 世 宗 3年 4月 戊申(16日) 條.
“工曹啓 凡進上器皿 不用心堅緻造作 緣此不久破毁 今後於器皿底 書造作匠名 以憑後考 其不用心者 徵其器皿 從之”
이상에 소개한 두 곳의 문헌 내용을 종합해 보면, 관아 이름을 새긴 것은 공납자기에 대한 적절한 관리를 위한 방안이고, 제작 지명을 넣은 이유는 공납의 행정적인 책임을 가진 그 지방의 수령을 지명으로 밝힘으로써 그릇 제작의 책임을 수령 이 지도록한 방안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있다. 朴敬子,「粉靑沙器 銘文 硏究」,『講座 美術史』25(한국불교미술사학 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05), pp. 261~292.
<분청사기 조화 쌍어문 편병>은 두 마리의 물고기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박진감 넘치는 간략한 필선에서 회화적인 완성 도가 높다. 이 외에도 구획선을 긋고 추상의 선무늬를 조각한 <분청사기 조화 선문 편병>은 중앙을 면분할하고 물고기· 연꽃 등이 분할 구획선 안에서 나란한 빗금으로 처리됨으로써 연지(蓮池)를 연상시키는 달인의 경지를 보이는 편병이다 . 이처럼 주저함이 없는 숙련된 필력은 청자나 백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분청사기만의 독창성이다. 분청사기의 매력 은 과감한 생략과 자유자재한 익살스러운 표현 능력에 있다. <분청사기 철화 연화어문 병>은 보조문양 없이 중심 문양 대에 연꽃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는 물고기를 그렸다. 활짝 편 지느러미와 추상적인 비늘의 표현은 박진감이 넘친다. 또 <분청사기 철화 연지조어문 장군>은 연꽃이 피어 있는 연지로부터 자기 몸보다 큰 물고기를 낚아 채서 날아가는 새의 모습이 절로 웃음을 자아내며, 반대면에는 목을 길게 빼고 연지안에 서 있는 소박한 새 모습은 또 다른 분청사기의 서정 성이다. 이와 같은 철화 분청사기는 주로 공주 학봉리에서 제작되었다.
귀얄기법은 귀얄이라는 일종의 풀비에 백토를 찍어 분장하는 기법이다. <분청사기 귀얄문 태호>는 귀얄이 돌아간 흔적 이 그릇 표면에 남아 빠른 운동감이 싱그럽게 느껴진다. 귀얄분청사기는 백자로 이행해 갈 때 많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백자와 함께 출토된다. 분장분청사기는 백토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 분장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 일명 덤벙분청사기라고 도 한다. 대체로 굽다리를 잡고 거꾸로 담그므로 <분청사기 분장문 항아리>와 같이 굽다리 근처는 백토가 분장되지 않 지만, 때로는 백토 물이 굽다리로 흘러내려 특별한 효과를 자아내기도 한다. 굽까지 포함한 표면 전체가 백토분장된 경 우 육안으로는 연질백자(軟質白磁)와 구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상에서 본 여러 종류의 분장기법은 결국 표면 백자화를 모색한 것이다. 태토의 잡물이나 검은 색의 태토가 백토분장으 로 감추어지는 효과와 함께 다양한 기법이 고안되는 과정에서 분청사기만의 독창성이 발휘되었다. 14세기 중국은 청자 에서 백자로 전환한 시기였고, 고려는 왕조의 교체라는 정치적인 혼돈 가운데 강진의 자기소는 1370년대 이미 해체되었 다. 강진의 장인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상감청자를 제작했으나 기형과 문양은 이미 변형되어 갔다. 1392년 조선왕조가 건 국됨에 따라 변형되어 가던 말기 상감청자는 백토분장으로 분청사기라는 새로운 장르의 도자기를 자연스럽게 탄생시킨 것이다. 이것은 장인들의 숙련된 기술과 보다 고급의 백자를 생산하고자 했던 의지가 새로운 예술세계를 창출해 낸 결과 이다.
분청사기의 변천
분청사기는 편년작품·문헌기록·기타 등을 통해 볼 때 태동기, 성립기, 발전기, 변화 쇠퇴기의 과정을 밟고 있다.
태동기
태동기(1365~1400)는 상감청자 문양의 해체와 변형, 기형의 변화, 암록색 등에서 특징을 보인다. 태동기의 시작은 <청 자 상감 연당초문 ‘정릉’명 발>의 연당초무늬에서 출발한다.(도 참조) 또한 기형의 변화는 S자형의 14세기 매병들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도 참조) 연당초무늬와 매병의 기형은 이 시기에 전국의 가마터에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강진의 장인들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음을 의미하며 이 시기가 분청사기의 태동기이다. 姜敬淑, 「初期 粉靑沙器가마터 분포 에 대한 一考察(Ⅰ)」,『泰東古典硏究』10(태동고전연구회, 1993), pp. 957~1013.
성립기
성립기(1400~1432)는 발의 경우, 14세기에 유행한 연당초문의 전통이 이어지는 동시에 성긴 인화문이 중심 문양으로 자 리 잡는 시기이다. 이를 보여 주는 것이 ‘공안(恭安)’과 ‘공안부(恭安府)’의 관아 이름이 새겨 있는 두 점의 발이다. 공안 은 공안부의 약자이며 조선 2대 정종의 상왕부(上王府)로 1400~1420년간 존속한 임시 관청이다. <분청사기 상감 연당 초문 ‘공안’명 발>은 내면 문양이 <청자 상감 연당초문 ‘정릉’명 발>의 문양과 같은 연당초문의 구성을 따르고 있어 14세 기의 전통이 이어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姜敬淑, 「蓮唐草文 變遷과 印花文 發生 試考」,『梨大史苑』20(이대사학회, 1983), pp. 1~30. 반면 <분청사기 인화 국화문 ‘공안부’명 발>은 듬성듬성한 성긴 국화무늬가 내면 중심 문양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는 상황을 보인다. 그래서 성립기의 상한은 공안부가 설치되는 1400년에 두었다. 따라서 성립기는 전통의 상 감 기법과 새로운 인화 기법이 공존한다.
이후 인화 기법은 세련미가 더해져 꽃 한개가 새겨진 도장으로 빈틈없이 전면을 메우기도 하고, 한번에 여러개의 꽃을 찍는 집단연권문(集團連圈文)으로 발전하여 분청사기 기법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경승부(敬承府)’가 새 겨 있는 접시와 정소공주묘에서 출토된 항아리에서 볼 수 있다. <분청사기 인화 국화문 ‘경승부’명 접시>는 내외 중심문 양대에 작은 국화꽃 도장으로 빈틈없이 인화하고 외면에는 경승부라는 세 글자를 새겼다. 경승부는 1402~1418년간 설 치되었던 세자부이다. <청자 상감 초화문 네귀 항아리>는 문양의 소제는 고려의 문양과는 다르나, 학문(鶴文)이 일부 조합되고 있어 고려의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와 함께 출토된 <분청사기 인화 집단연권문 네귀 항아리>는 이미 안정된 분청사기 집단연권문의 모습이다. 이들은 상감기법과 인화기법의 집단연권문이 동시기에 제작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소공주는 1424년에 죽은 세종의 큰 딸로서 두 항아리의 하한 연대를 알 수 있으며, 네 귀가 달린 것으로 보아 용도는 태항아리였을 터인데 묘에서 출토된 이유는 알 수 없다.
성립기의 정황은 『세종실록』「지리지」토산조의 324개소의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陶器所)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324개소 중에 현재 수십 곳이 지표조사와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대표되는 가마터는 경기도 광주 도수리, 공주 학봉리, 공주 중흥리, 연기 송정리, 충주 연하리, 영동 사부리, 상주 우하리, 칠곡 학상리, 진주 효자리, 사천 송전리, 곡 성 구성리, 부안 우동리 등이다. 이들 가마터로부터 수습된 도편은 14세기 상감청자의 여운이 남아 있는 연당초문과 듬 성듬성하게 인화된 도편이 함께 수집되는 특징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관아 이름이 새겨진 도편이 모두 출토되었다. 이 처럼 성립기의 가마터가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현상은 태동기부터 자기가 토산(土産) 공물(貢物)의 대상이었기 때문이 다. 드러나는 시기이다. 공납의 의무가 없어진 가마들은 얕고 조잡해진 인화문 위에 백토를 귀얄로 슬쩍 바르거나 혹은 무늬가 없는 대접의 내외면에 백토 귀얄 자국만이 한번 휙 돌아간 그릇을 제작했다.
공동기획 : 문화저널, 전북대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