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9 |
[박물관대학] 전북대학교 제2기 박물관 대학
관리자(2008-09-18 10:58:37)
지상강좌 l 민화
民畵는 감상을 위한 것인가?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이다. 그는 192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민예품전람회에서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민화’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937년 2월, 일본의 월간 <공예>지에 기고한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을 민화라고 하자.”고 주장했다. 그가 민화라는 용어를 부른 것은 일본 민속화의 일종인 오오쓰에(大津繪 : 먹으로 간략하게 그린 그림에 호분(胡紛) 등으로 착색한 일종의 조화(粗畵). 원래는 불화(佛畵)였으나 후에 토속화(土俗畵), 회화(繪畵)로 변했다. 에도(江戶)시대 오오쓰(大津)지방에서 많이 그렸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도로에(泥繪 : 간판 등을 그리는데 쓰는 값싼 물감으로 그리는 그림. 대개 값싸고 불투명한 호분 등을 섞어서 그린다), 에마(繪馬 : 절이나 신당 등에 기원할 때나 그 기원이 이루어졌을 때에 사례로 말(馬)을 대신해서 바쳤던 말 그림. 후에 와서는 말 이외에도 다른 그림을 그려 넣거나 글씨 또는 시문을 써 넣기도 했다.)를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화’란 용어를 쓰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민화에 대한 개념은 있었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에서는 어염집의 병풍, 족자 또는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속화(俗畵)라고 칭했다. 우리나라의 민화 연구가인 조자용(趙子庸) 씨는 한국의 모든 회화를 한화(韓畵)라 하고 이를 순수회화(純粹繪畵)와 실용회화(實用繪畵)로 분류하면서 민화란 넓게 보면 한화를 일컫고 좁게 보면 실용회화를 일컫는다고 말했다. 그는 광의의 민화관과 협의의 민화관은 ‘민(民,)’의 개념이 틀린데 원인이 있다고 보고, 종래의 협의의 민화관을 극복하고자 주장했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순수회화’란 정통회화, 이론화, 순화 혹은 감상화라고도 할 수 있으며 미술이론을 바탕으로 한 의식적인 예술행위로서의 그림을 뜻한다. 순수회화는 동양화의 경우 그 화풍에 따라 남화(南畵), 북화(北畵), 문인화(文人畵), 선화(禪畵), 원체화(院體畵) 등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채색을 기준으로 하여 묵화(墨畵), 채색화(彩色畵), 농채화(濃彩畵)로 분류할 수도 있다. 이에 비해 ‘민속회화’는 대체로 실용화(實用畵), 용화(用畵), 실화(實畵), 응용화(應用畵) 등으로 불리는 그림들이며 미술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 삶을 위한 그림으로서 불리는 목적과 쓰이는 곳에 따라서 생활화(生活畵), 기록화(記錄畵), 종교화(宗敎畵), 명화(冥畵)로 대별된다.
민화는 토속신앙과 세계관이 반영된 그림이다.
민화의 특성으로 실용성, 상징성, 예술성을 꼽을 수 있다. 순수미술은 예술성을 앞세운다. 이와 달리 민화에서는 예술성보다는 실용성이 강조되는데 이는 민화에는 상징성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 시대마다 그 때에 그려진 그림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상징성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상징성은 그 시대의 문화적 특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의 민화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어서 그것이 그려진 시대의 시대상을 읽어내는데 중요한 척도가 된다.
민화의 상징적 표현은 서민들이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희노애락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사소통이 바탕이 되는 공통의 세계관을 매개해 주는 역할도 한다. 가령 부귀다남(富貴多男)·부귀공명(富貴功名)·무병장수(無病長壽) 등 인간으로서의 소박한 바램이 민화에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민화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동경의 대상을 글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민화에서 표현되는 이러한 상징성들은 사회 전체에 의해 공유되기는 하지만 특수한 사회부류에서만 통용되는 것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감수성에 의해 그 상징이 변질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징성이 민화만의 독특한 상징적 표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민화에는 어떤 그림이 있나?
이우환, 김철순, 김호연, 조자용 선생은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두고 민화에 대한 분류를 시도하였다. 이 가운데 조자용선생의 화제별 분류가 가장 세분화되고 현실적으로 체계화된 분류로 보이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자용 씨는 민화를 크게 한화라 이르고 이를 순수회화와 실용회화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상징별로 수(壽), 쌍희(囍), 자복(子福), 재복(財覆), 영복(寧福), 녹복(祿福), 덕복(德福), 길상(吉祥), 벽사( 邪), 민족(民族) 등 열 가지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화제별로 나누어 산수화(山水畵), 수석도(壽石圖), 화훼도(花卉圖), 소과도(蔬果圖), 화조도(花鳥圖), 축수도(蓄獸圖), 영수화(靈獸畵), 어해도(魚蟹圖), 초충도(草蟲圖), 옥우화(屋宇畵), 기용화(器用畵), 인물화(人物畵), 풍속화(風俗畵), 도석화(道釋畵), 기록화(記錄畵), 설화화(說話畵), 도안화(圖案畵), 지도화(地圖畵), 혼성도(混成圖), 춘화도(春畵圖) 등 20여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민화에는 주술적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들 그림이 가진 주술적 힘이 여러 가지 재앙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또 소원하는 바도 이루어 준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벽사구복( 邪求福)’ 사상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현세 복락주의와 벽사의 관념은 서민들에게 유구하고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샤머니즘 혹은 애니미즘의 일종이다. 이 원시적 형태의 종교가 불교나 도교 등과 융합을 거치면서 독특한 민간신앙을 형성하였고 우리의 정신세계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음은 새삼 부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민화 중에는 토착적인 종교와 결합된 풍습에 의해 주술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들이 있다. 이를 세화(歲畵)라 하며 매우 널리 그려졌다. 궁중은 물론이고 사대부들의 저택, 일반 서민들의 집에서 입춘방처럼 축귀(逐鬼)나 구복의 상징으로 그린 세화를 정월 초하룻날 대문 또는 집안에 걸거나 붙이게 했다. 그 대표적 예가 호랑이 그림인데, 호랑이는 영물로서 악귀를 쫓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호랑이는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에 그려진 것처럼 음양오행설로 따지자면 서쪽을 상징하는 금(金)에 해당하고, 털짐승의 우두머리이며 지상에서 가장 힘이 센 동물의 상징으로 지상의 잡귀를 능히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영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로선 이것이 상식이고 사실이었으며 ‘영적인 힘을 지닌 동물 그림을 집에 둠으로써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은 민화의 발생과 전파에 큰 사상적 기저가 되었다. 이러한 주술적인 요소를 지닌 벽사화로는 사신도, 사령도, 용그림, 산신도, 신장도 등이 대표적이다.
민화는 ‘뽄’ 그림이다.
민화는 그 주제와 표현의 원류에 있어서 문인화나 도화서 화공들의 그림을 철저히 모방하고 있으면서도 담아내는 내용이나 표현기법은 다르다. 이는 민화가 속칭 ‘뽄그림’이라고 하여 일정한 본(本)에 의해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가운데 점차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특징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즉 본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가운데 조선시대 상류층과 왕권 중심으로 형성된 유교적인 세계관이 토속적이고 종교적인 민중들의 세계관으로 전이되었으며, 민화가 양산되고 보급되면서 점차 서민들이 지배층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세계관을 형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화의 형성 과정에 담겨 있는 서민들의 미의식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자연 환경에 대한 순박한 감정과 소박한 생활양식, 그리고 거짓없는 진솔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표현기법에서의 독특함 그리고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은 바로 서민들에 의한 여타의 예술이 드러내고 있는 미적 특질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민화를 이제 어떻게 볼 것인가?
민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크게 두 가지로 연구의 방향을 잡아 볼 수 있겠다.
첫째, 만화에 대한 연구를 단순히 민화 자체에 대한 특수성을 밝히는 문제로 국한할 것이 아니라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것이 수용되었던 사회구조까지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른바 정통미술사에서 민화의 가치를 어떻게 인정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미술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당시사회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로서 민화가 가지고 있는 충분한 가치, 즉 자료로서의 민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사를 단순히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훌륭한 작품의 역사로 엮을 때 부딪치게 되는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특히 조선 후기의 시대적 특수성 속에서 민화의 발전은 곧 전체적인 미술계의 구조와 사회적 양태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민화에 대한 연구는 미술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사관을 형성하는 기초적 작업이 될 수도 있다. 민속학이나 종교사상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도 민화는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조선시대 일반인의 한(恨), 또는 민중의식이나 일반적인적인 미의식을 가늠해보는 근거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민화가 지니고 있는 조형적 측면에 대한 보다 과학적이고 세밀한 연구가 요구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둘째, 민화를 오늘날 어떻게 계승·발전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연구다. 민화는 일제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가치 없는 저급미술로 치부되어 소멸되었으며, 민화가 당시의 미의식을 반영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그 가치는 골동적 취미의 대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민화가 지니고 있는 조형성은 오늘날의 회화의 표현방법에 다양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있다. 그 시대의 사상적 기저에서 오는 독특한 시점과 채색기법 등에서 비롯된 민화의 표현방법이 오늘날 우리의 사상적 기저에서 공존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화의 계승은 단순히 외형적 방법론만을 모방하고 복제하는 것에서 그치고 있으며, 이는 민화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부족한 현시점에서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