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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 | [서평]
못다 부른 '노래'를 위하여 「늦은 노래」(고은, 2002, 민음사)
정창영 시인, 전주대 객원교수(2003-04-18 17:44:56)
이번 겨울 초엽에 나온 {늦은 노래}는 현대 문학사에 어느덧 전설이 되어가고 있는 고은 시인의 최근 행보를 담고 있다. 이 시집을 접하면서 자꾸만 '늦은'이라는 수식어에 신경이 쓰였던 것은 아마도 우리들이 가슴 한켠에 '늦은'이라는 말을 간직하고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이 단어 앞에서 우리들은 또 얼마나 절망하고 좌절해야만 했던가. 언제나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살지만, 정작 늦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경구 때문인지 이 제목은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너무 늦지 않기를 바라며 살지만 그 또한 부질 없게 느껴질 때가 더 많은 것이 우리 삶이기에, 일찍이 고은 시인은 초기시에서 선보였던 짙은 허무주의와 같은 개인주의 성향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을 것임을 [문의마을에 가서]에서 드러낸 바 있다. 시인은 승려와 재야운동가의 길을 거쳐 {만인보}와 {백두산}, 그리고 {고은 전집}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시력 한켠에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내려놓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슈비츠는 과거가 아니라고/제주도와 노근리는 과거가 아니라고/광주는 전설이 아니라고"([신록]) 항변하는 그의 외침은 새롭지 않다. 이 구절을 접하면서 근래 들어 술 마실 줄 아는 시인이 그립다고 되뇌이던 그의 씁쓸한 독백이 자꾸 목에 걸리는 것은 왜일까. 새해 벽두를 맞이하며 이번 가을걷이 시집에서 그가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세계의 파편화된 실상과 분단 현실 속에서 새롭게 발견한 우리의 모습이다. 일시나마 몸담았던 불교의 세계를 떨치고 다시 접한 세속에 대한 진지한 고뇌의 흔적은 방북을 다룬 2부 '시대의 자국' 뿐만 아니라 1부 전편에 걸쳐서도 폭넓게 드러난다. 매향리를 비롯하여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낯선 지명이나 '분단', 그리고 '통일'과 같은 단어들은 그의 낡은 뿔테 안경을 투과하면서 좀더 반짝반짝 윤이 나거나 날카롭게 날이 서기도 한다. 이번 시집에서도 여전히 고은 시인 특유의 걸쭉한 입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집에는 {만인보}와 {백두산}을 거치면서 녹슬지 않고 오히려 더 쨍쨍한 울림을 빚어내면서 사방으로 울려퍼지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돋보인다. 시인은 1부 '최근 시편'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들의 행태에 대해 매서운 죽비를 서슴없이 내리친다. 그는 아프간을 없애버렸다 지구는 초토가 되기 시작했다 아프간 이후 그는 또 어디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어디로 건너가고 있다 바그다드 혹은 어디로 그는 가고 또 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중모리로 그리고 자진모리로 화석이 되어가고 있다 - [그] 부분 시인에게 '그'의 존재는 한 나라의 존폐를 좌우할 정도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대상이지만, 위태롭게 보일 뿐이다. '그'는 한 나라를 없애고 난 후에도 여전히 위풍당당하게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전진에 전진을 거듭한다. '깊숙이'와 '가고'에서 나타나듯이, '그'의 속성은 내밀하게 이루어지며 완료가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속단할 수는 없지만, 이로 인해 향후 지구상에 또다른 '아프간'들이 발생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공생의 관계가 아닌 공멸의 최후를 떠올리게 하는 이 시를 통해 시인은 중심의 공동화에 대한 각성을 제기한다. 아이러니컬한 점은 일시적으로는 세계의 중심이 '그'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폭력 앞에 모두가 희생자로 전락해버리고 말리라는 예언이다. 거기에는 이를 주도한 '그'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빼앗긴 내 고향"([매향리])에서 발원한 "대한민국은 미국의 하와이"([미국])인가라는 의문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미국과 세계의 균형에 대한 관심이 지성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의무에 기인하는 것을 감안할 때 그의 시선 한 축에 우리의 현실과 북녘 동포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시인은 "이제 만나러 간다/이제 만나러 간다"([만나러 간다])를 되뇌이며 북녘땅을 밟았던 감격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아 만나지 못한 핏줄 흩어져 버린 자취들 돌이켜 울음 가득히 환희로 익어갑니다 - [새로운 8·15] 부분 하지만 그 감격 뒤에 다가온 것은 단발성 행사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분단과 통일의 문제는 어쩌면 평생동안 보듬고 가면서 넘어서야 할 또다른 벽이 아닐까. 아래 시는 이러한 물음의 연장선상에서 존재의 의미와 시에 대한 고민을 다루고 있다.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서사이듯이, 그의 삶 속에서 시 역시 녹녹치 않은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날은 손님인가 하였습니다 어느 날은 주인인가 하였습니다 이런 세월 굴뚝들 저마다 피워 올릴 연기를 꿈꾸었습니다 오늘도 모르겠습니다 시가 누구인가 - [시] 전문 초로를 지나 이제는 연만해진 시인은 손과 주인을 넘나드는 독법을 통해 시를 알아간다. 그에게 시는 때로는 손이기도 하고 주인이기도 했던 것, 사십여 년을 시쓰기에 매달려온 시인이지만 그 길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아련하고 애틋한 기억들이 그렇듯 시 역시 때로는 그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굴뚝들'로 의인화되고 있는 또다른 모습의 시인들 역시 내공을 쌓으면서 '저마다'의 독법을 준비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뇌의 끝에서 건져올린 시들이 시의 공장에서 밤새워 피워 올린 연기들에 섞여 세상 밖으로 날아갈 때, 그것은 단지 연기만이 아니다. 그 연기 낱낱마다에 존재해야 할 의미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되는 번뇌 끝에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만이 그에게 남는다. 그렇다면 시가 무엇이며, 우리는 왜 살아 있는가. 평생동안 시와 더불어 살아 왔고, 의욕적으로 자신의 시세계를 꿈꾸어온 시인이 시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이제 첫걸음을 떼었거나 서투르게나마 습작을 준비하는 이들, 그리고 독자들 역시 가장 고민하는 문제이자 쉽게 풀리지 않는 화두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보이는 질문을 스스럼없이 되뇌이며 힘들어하는 시인과의 간격이 쉽게 좁혀지지 않는 것은 그 사유의 폭과 깊이에 있다. 그것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다. '오늘도'에서 알 수 있듯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온 것이며 시인을 끊임없이 괴롭혀온 것이다. 나는 잠시 바래본다. 고은 시인의 시가 세상에 쌓이면 쌓일수록, 그의 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가 더욱 더 외로워지기를, 그 외로움과 고독을 견딜 수 없어 마침내 다른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시선 받은 이들 너무 행복하고 풍족하여 궁핍한 시의 세계를 외면하지 않기를, 더불어 우리도 그가 건네는 향기로운 말들 나누며 미소 한 웅큼씩 세상 안으로 가뿐히 털어낼 수 있기를. 장창영/1967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전북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현대시)를 얻었으며, 현대 전주대 교양학부 객원교수로 있다. {작가의 눈}(전북작가회의) 신인상과 사이버문학상 은상(시)을 수상했으며, 2003년 불교신문 시조 가작과 200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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