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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9 |
[제115회 백제기행] 중국 운남성
관리자(2008-09-18 10:52:19)
우린 세상의 온갖 시름을 그 곳에 내려 놓았다 노기환 / 미륵사지유물전시관 지난 8월 7일부터 11일 까지 3박 5일간 중국 운남성 곤명·여강 일대로 (사)마당에서 주관하는 제115회 백제기행을 다녀왔다. 나는 평소에 여행(旅行 :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과 기행(紀行 : 여행하는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것을 적은 것)에 대해서 잘 구분을 하지 못하고 지내왔던 터라 백제기행을 신청을 할 때에는 놀러간다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기행문을 쓰는 사전적 의미의 기행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 각기 다른 사물과 자연이 있듯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점도 다양할 것이다. 첫째 날 2008. 8. 7(목) 몇 해 전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하는 글이 유행을 했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인천공항에서 중국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앞서 면세점을 구경하는데 다른 분들은 먹거리·입을 거리 등을 다양하게 구경하고 있는데, 그 넓은 면세점들의 상품 중에서 우리나라 민속상품 등이 있는 코너만 구경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사립미술관의 고급스런 기획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우리 전시관은 어떻게 언제쯤 해볼 수 있을까?’ 생각을 하고 기록을 해두었는데 정말 언제쯤 실현할지 모르겠다. ‘언젠가는 기회를 만들어 볼 것이다’라고 다짐해본다. 저녁 9시경 중국 동방항공 비행기에 올라 약간은 좁고 움직이기 힘든 자리에서 4시간에 걸친 인내 속에 중국 곤명공항에 12시(우리나라보다 1시간 늦음)에 도착했다. 우리가 머문 호텔은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4성의 곤명진강(昆明鎭江)호텔이었고 정리를 하고나니 새벽 1시가 되었다. 둘째 날 2008. 8. 8(금) 아침 7시 30분경 일어났다. 내가 잔 곳이 11층이어서 창밖으로 보이는 시야가 넓다. 곤명시(昆明市)에서 호텔의 위치를 알 수 없었지만 내 방에서 바라본 방향이 서쪽으로 생각되는데 내 눈높이 보다 높은 건물이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파트로 보이는 비슷한 건물들의 옥상에 태양열 집광판들이 가득하다. 아파트의 겉모습이나 집광판의 상태를 보아서는 적어도 10년 이상은 되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야 아파트에 태양열을 이용하는 일부 시스템을 갖추었다는 가사를 보았는데, 자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여기가 우리보다 이쪽 분야에서는 빠른가보다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는 잘 모르는 것과 향이 진한 것을 고르지 않아서인지 맛이 좋았다. 그 중에서 닭으로 만든 육수에 쌀국수를 먹었는데 깔끔하고 맛이 있었다. 특히 우리 전북의 장수지역에서 먹는 고수를 쌀국수에 넣어 먹으니 향이 아주 좋았다. 일행 중 고수의 향을 좋아 하지 않는 분은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저걸 어떻게 먹나하는 눈빛이다. 호텔에서 석림(石林)으로 출발이 늦어진다. 우리를 안내할 조선족 남자 안내원은 무엇이 잘 안되는지 얼굴이 붉어진다. 그리고 (사)마당의 김승민 실장도 얼굴 표정이 좋지 않다. 해결이 되었는지 예정시간보다 30여분 늦어서야 출발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생각하며 창밖을 구경하며 가는데 기름을 넣어야 하고, 바퀴가 펑크나 교체를 해야 한다며 주유소에 정차했다. ‘그럴 수 있지? 그런데 기사님은 어제 밤과 아침에는 무엇을 하시고 이제야 수선을 떠실까?’ 주유소에 도착했는데 기름을 빨리 주유하지 않는다. 듣기로는 기름을 하루에 넣고 싶은 만큼 넣을 수 없다고 한다. 그건 그렇다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같으면 이만한 버스에 다섯 번 정도는 넣고도 남을 시간에야 기름을 넣었다. 우리 차만 그런게 아니라 뒤에 들어온 국영 우편물 수송차 3대가 들어왔는데 그 차도 ‘세월아 가라’식이다. 중국의 만만디 소산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기름을 넣고 뒷바퀴 펑크를 때운다고 했는데 늦어진다. 정비가 될 때까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시장을 구경을 하기로 했다.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골목이 한가하다. 시장 길은 아직 포장되지 않았고 신발·옷가게의 디자인으로 보면 80년대 초반 전주 모래내시장 정도의 풍경이다. 20분 정도면 수리했거니 하고 돌아 왔는데 아직도 정비 기사가 도착하지 않았다. 세상에! 바로 기사가 도착하여 뒷바퀴를 빼려 너트를 푸는데 수동 장비로 하고 있다. ‘한국에서 카센터 하나 그대로 옮겨오면 돈 벌겠다’라는 쓸데없는 상상을 해보면서 실없이 웃고 말았다. 나중에야 안 사실인데 펑크를 때우려고 보니 뒷바퀴를 고정시키는 너트가 반절이나 없더라는 것이다. 펑크는 때우지도 못하고 풀려 없어진 너트만 채우고 하루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정말 다행이다. 석림은 곤명에서 남동쪽으로 126㎞정도에 있는데 곤명 호텔에서 버스로 2시간 정도 달려서 도착하였다. 석림은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며, 해발1,750m 정도의 고지에 형성된 카르스트 지형으로 약 2억7천만 년 전에 바다 속에 묻혀 있던 석회암이 지각변동에 의해 융기되어 침식 작용을 거쳐 현재의 기괴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대석림과 소석림으로 불리고 있는데 대석림은 사각기둥 또는 비슷한 형태로 높이가 높은 것들이 있는 곳을, 소석림은 높이가 낮은 형태의 석회석 기둥들이 서있는 곳을 말한다. 대석림 입구의 석회석 큰 기둥에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한 석림(石林)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현재 시점에서 우리나라에서라면 기둥에 바로 글씨를 새길 수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대석림 입구에서 보면 넓은 공간이 나타나는데 그 공간에 양잔디를 깔아 또 다른 황홀감에 빠져들게 한다. 2분 정도만 관람로를 따라 들어가면 돌기둥 사이에 축구장 1/3정도넓이의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워, 큰 기둥들이 물에 비치게 하였다. 주변에서는 전통 옷을 대여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해 질녘 물에 비친 대석림은 노을빛과 어우러져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것 같다. 만약 이 웅덩이가 인공적으로 판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얼마나 더 경이로울까? 아마도 이 인공의 물웅덩이가 없었다면 대석림은 밋밋한 기암괴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원래에는 없던 웅덩이를 파고 인공으로 물을 채워 더 보기 좋게 경관을 만들었는데, 이는 원래의 상태를 변형 시켰음으로 훼손일까 아니면 잘한 것일까? 석림은 이족(彛族)소수민족자치주 내에 있다. 여기에서 여자를 호칭하는 두 가지가 단어가 있는데 한글로 100% 정확하게 표현됐는지 모르겠지만 ‘아쓰마’라고 한다. 우리의 ‘아주머니’발음과 비슷하다. 또 하나는 우리가 흔히 아는 ‘소저’가 있는데 이는 술집 여인을 칭한다고 한다. 곤명과 석림을 오가는 주변의 산, 구릉들은 거의 모두를 개간하여 쓸만한 곳에는 모두 옥수수가 심어져 있었다. 2006년 백두산, 국내성 답사 때 압록강 건너 나무 한그루 없이 옥수수와 콩이 심어진 북한의 산을 보는 듯 했다. 곤명 시내의 새로운 시가지에 들어서는 3층 정도의 연립과 아파트들이 중국적 요소의 다양한 디자인, 색상 대비가 선명하고 윤곽이 뚜렷하여, 우리나라의 볼륨 약하고 일률적인 아파트와 대비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언제쯤 이런 느낌을 받는 아파트가 지어질까? 오후 4시경 곤명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8km 거리에 있는 민속원에 도착하였다. 운남성의 26개 소수민족 중 13개 민족의 촌락을 실제 형태로 조성한 민속마을이다. 그중에서 ‘리수족(이수족)’이 행하는 긴 장대 사이에 작은 작두날처럼 생긴 칼의 날을 하늘을 향하도록 사다리처럼 묶어놓고, 맨발로 밟고 먼저 올라간 사람이 꼭대기에 달린 술을 먹는 도간절(刀杆節)축제 시연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의 강신 무당이 신 내림 할 때 맨발로 작두 위를 걷는 것을 보는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저녁 식사는 버섯전골 요리였는데 소간버섯과 여러 종류의 버섯과 그리고 완두콩 줄기 끝 등 다양한 야채가 나왔다. 그와 곁들여 먹었던 52.6% 소호도선(少湖途仙) 고량주의 맛과 향이 일품이었다. 여강으로 가기 위해 곤명공항에서 7시 30분에 비행기에 탑승했다. 바로 이륙할 줄 알았는데 조금씩 움직이던 비행기는 47분이 지난 8시 17분에야 이륙을 했다. 중간에 무어라 안내 방송을 한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중국 사람들은 알아들었는지 누구하나 항의하는 사람 없이 즐겁게 이야기 하거나 자고 있다. 나중에 들으니 왜 이륙을 하지 않는지 안내가 없었다고 한다. 추정컨대 8시에 시작되는 북경 올림픽 개막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될 뿐이다. 8시 52분에 여강 비행장에 바퀴가 닿았다. 오후 10시에 5성 호텔인 여강 왕부반점(王府飯店)에 도착하였는데 버스가 호텔까지 직접 들어올 수 없어 7분정도를 걸어 들어왔다. 이유는 여강 고성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고성 구역 내 모든 길들을 택시정도만 들어갈 수 있도록 좁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라 한다. 불편하기는 했지만 전주 한옥 마을에 한옥형 호텔을 짓는다면 검토해볼만 하다고 생각된다. 짐들을 방에 넣어 놓고 다시 고성 중심부의 야경을 보러 나갔다. 비슷한 집들과 좁은 골목이 계속되고 늦은 시간이라 문을 닫는 상점들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전통적인 미닫이 문으로 문을 닫는 모습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한가지 특징은 가게들이 많은데 세로형 돌출 간판이 없고, 가로형 간판들도 길이 1~2m정도로 아담하게 걸려있는 점이었다. 또한 한자 아래에 나시족(納西族)의 고유문자인 동파문자(東巴文子)를 병기하여 나시족의 문화를 홍보하는 한편 간판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골목의 상가에는 먹거리, 나시족 전통 옷, 나시족의 문양들을 변형한 다양한 의류제품, 가죽제품을 직접 제작해서 파는 곳, 각종 은·옥제품 등을 파는 다양하고 많은 상점들이 있었다. 여강 고성의 중심가라 할 수 있는 사방가(四方街)는 광장인데 젊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주점식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니 24시가 조금 넘어 9일이다. 첫날이나 마찬가지인 밤을 맞이했으니 우리가 머무는 호텔 앞 광장에서 현지 길거리 음식을 가벼운 주머니로 입, 코, 귀, 손, 머리를 02시까지 즐겁게 하고 둘째날 일정을 마감하였다 셋째 날 2008. 8. 9(토) 오전 9시 오늘도 아침부터 버스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아침에 다른 곳에서 이곳까지 왔고 시동을  끈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몇 분전 김실장이 오늘은 차가 말썽부리지 않겠지 했는데. 여러 걱정과 우스게 소리를 한지 몇 분 후 세 명이 밀어서 시동을 걸었다. 오늘 액땜은 짧았다. 오전 일정인 수허구전(束河古鎭)으로 간다. 5분쯤 갔을 때 여강의 재래시장이 보였다. 30여분을 달려 수허구전에 도착하였다. 수허는 차마고도(茶馬古道)의 도시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운남성의 남부에서 나는 차를 티벳으로 교역하는 역참로 중의 한곳이며 8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돌다리인 대석교와 마방의 최후 사람들이 현존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도 마을 안 마방에서 말을 기르고 있었다. 옛날의 수허구전 건물들은 주차장에서 최근에 만들어진 상가를 지나 대석교를 넘어서 시작된다. 대석교 위에서는 나시족의 전통 음악을 노인들이 연주하고 있었다. 또한 예전의 마방 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건축물 또한 원형들을 잘 보전하고 있어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을 받는다. 영화를 촬영했던 곳이기도 해서 결혼 전 웨딩사진을 많이 찍는다고 하며 내가 갔던 날에도 세 쌍이 웨딩 사진을 찍고 있었다. 대부분의 집에는 구멍이 뚫린 기둥을 여러 개 세워 두는데 두 기둥 사이에 나무를 걸치고 곡식이나 옥수수 등을 걸어 말리거나 보관하는 시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도 골목마다 상가와 숙박시설들이 날로 증가되어 가고 있어 주민들의 실제 생활이 적어지고 있다고 한다. 12시 20분 동파박물관에 도착하여 부관장으로부터 나시족과 동파문자, 여강의 역사에 대해서 상세하게 들었다. 박물관에서는 나시족과 동파문자 등에 관련된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특히 운남과 티벳사이의 산악 지형을 축소해 험난한 차마고도의 통행로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15시부터 여강 고성(麗江古城)을 관람하였다. 여강 고성은 약 800여년 전인 송나라(宋) 말기에서 원(元)나라 초기에 걸쳐 건설되었다. 여강 고성은 나시(納西)족의 집단 거주지이기도 하다. 여강 총인구는 32만으로 그중 나시족이 58%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1996년 진도 7의 지진으로 신시가지는 거의 모두 파괴되고 고건축물들은 거의 파괴되지 않아 1997년 세계문화유산(UNESCO World Heritage)에 등록되었다. 그 후 여강은 년간 50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나시족의 심장부이면서 동파문화(東巴文化)가 발원했던 발원지이다. 동파문화는 나시족의 독특한 문화다. 나시족은 지금 현재 사용되는 세계 유일의 상형문자인 동파를 사용했는데, 지금까지도 그 습성이 남아있다. 또 모계사회인 나시족의 생활상 일부를 볼 수가 있는데, 가사일부터 사회적인 일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여자들의 모습과 여자가 무거운 건축현장에서 나시족 전통의 운반용 통에 모래를 가득 지고 운반하는데 반해 남자는 삽으로 모래만 퍼주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고성은 수세기동안 여러 지역으로부터 받아들인 건축학적 요소들을 잘 융합한 건축물들과 독창적이고 효율적인 물 공급체계가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수질은 관광지 개발 이전보다 많이 나빠졌다고 하며, 건축물은 변형이 너무나 심하여 알맹이가 없어진 상업화된 관광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전통유산이 잘 남아 있는 수구허전과 고성을 짧은 시간에 보고 평한다는 것은 무리라 생각한다. 기회가 된다면 여강 만을 다시 방문해보고 싶다. 또한 여강 고성의 중심인 사방가(四方街)에서는 나시족 민속춤이 매일 때때로 대부분 여성 노인들에 의해서 시연되면서,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듯하다. 나시족들이 동파경을 찍기 위해 만들던 나시 종이로 만든 여강 안내책자가 디자인과 내용, 질감들이 너무 좋다. 한지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전주에서 참고 했으면 한다. 여강의 건축물의 외부에는 용마루 합각 부분에 태극문, 쌍물고기, 팔괘 등이 조각된 나무판이 달려있고, 건물의 문에는 사슴, 학 등 동물과 모란꽃 문양 등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마당에는 넓적한 돌로 사각형을 구획한 후 이를 4등분해서 나누고 기와편과 작은 둥근 돌을 이용해 가운데 부분에는 수(壽)자를 네 모서리에는 박쥐를 장식한다. 이것은 길상문양으로 길상벽사ㆍ다산기자ㆍ수복장수ㆍ부귀유여ㆍ부부화합 등을 바라는 목적으로 장식한 것이다. 물고기 문양 쌍어는 음과 양을 함께 갖추어 있는 것을 말하는데, 부부화합의 뜻한다. 편복은 복(福)과 같은 음(音)으로 두 마리의 박쥐형태를 쌍복(雙福)이라 하여 기물이나 조각의 장식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복(福)과 부(富)가 합하여 백체부복(百體富福)이 됨으로 사람들은 편복무늬를 좋아한다. 그래서 각종 기물에 오복(五福)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편복 다섯 마리를 표현하는 예가 많은데, 오복이란 수(壽)·부(富)·강(康)·덕(德 )·명(命)을 말하는 것으로 이처럼 복합적 의미를 표현할 때 다섯 마리의 편복을 표현한다(길상부분은 문화원형 백과사전에서 전재). 넷째 날 2008. 8. 10(일) 옥룡설산(玉龍雪山)은 여강의 서북쪽 20㎞ 지점에 있는 여강의 상징적인 산으로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한다. 주봉은 5,596m이며 아직까지 정상이 정복된 적이 없다고 알려지고 있다. 4,000m 이상에도 꽃이 피고 있으며 희귀한 식물들이 많아 식물의 왕국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3,000 ~ 4,000m 사이에는 수직으로 곧게 자란 수십 미터 정도의 나무들이 많다. 설산에 오르려면 <인상 여강>공연장에서 전용 버스로 해발 3,356m 지점까지 이동 후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4,506m 옥룡설산 케이블카 정거장까지 간다. 그 다음은 4,680m까지 걸어서 20여분 올라가는데 일부 사람에게는 약간의 고산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번은 8월인데 12~3월 정도면 온산이 눈에 덮여 더 웅장하고 아름다울 것으로 생각된다. 여강에 여행을 간다면 옥룡설산은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권하고 싶다. 오후에는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인상 여강>뮤지컬을 관람하였다. 연극, 뮤지컬이 무엇인지 개념이 희박한 나였지만 여강의 서북쪽에 있는 만년설산 배경과 3,500m 고원지대를 실경무대로 하여, 배우가 아닌 소수민족 농민 500여명을 주인공으로 소수민족들에 생활을 보여주는 뮤지컬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작품이 만들어진다면 다시 이번의 감동과 같은 것을 느껴보고 싶다. 저녁에는 여자양궁 단체전 결승전을 보면서 저녁식사를 했다. 중국에서 올림픽 경기를 그것도 중국을 상대로 하는 경기를 보다니 감회가 새롭다. 바쁜 일정으로 여강에서 곤명으로, 곤명에서 인천까지 현지시간 8월 10일 12:50분에 이륙하여 4시간을 날아 8월 11일 05:50(곤명보다 1시간 빠름)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짧고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해외기행이 막을 내렸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 한번 길 떠날 채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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