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9 |
[허철희의 바다와 사람] 새만금 매향제
관리자(2008-09-18 10:33:37)
새만금갯벌에 향(香)을 묻은 뜻은...
새만금 매향제
살을 에는 매서운 칼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던 2000년 1월 30일, 새만금간척 현장인 전북 부안의 해창갯벌에서는 ‘새만금사업을반대하는 부안사람들’과 환경단체들의 새만금갯벌살리기 행사인 ‘새만금 매향제’ 의례가 있었다. 이는 뭇생명을 품고 있는 갯벌이, 우리에게는 넉넉한 삶의 터전이자 미래세대에게는 고이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자연유산인 저 갯벌이 절대로 육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규이자, 개발지상주의자들에 대한 깨우침이었다.
원래 새만금 매향제는 묵은 천년의 마지막 날인 1999년 12월 31일로 계획되었다. 여기서 잠깐 1999년을 상기해보자. 그 해는 온 나라가 “밀레니엄[millennium]”이라는 단어에 묻혀 있었다. 특히 예부터 노을이 아름다운 고장으로 유명한 부안은 그 해 마지막 날에 변산반도 서해 끝자락인 격포에서 해넘이축제를 벌인다고 여름부터 벌써 들떠 있었다. 질곡의 천년을 보내고 희망의 새천년을 맞이하자는 뜻은 좋지만, 억장을 가르며 바다를 내뻗는 새만금방조제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부안의 일부 주민들은 이 축제에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았다. 고향의 산이 다 깎이고 갯벌이 다 죽어가는 마당에 축제라니..., 그보다는 한 세기가 저무는 마지막 날 ‘저 갯벌은 천년 후에도 갯벌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매향의례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띄우고 싶었다. 그러나 준비부족으로 달포나 늦게 치러졌는데, 묵은 천년의 메시지보다는 새천년의 메시지가 더 호소력이 있는 듯하여 오히려 더 잘 된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매향이란?
매향이란 민중들이 미륵세상의 도래를 기원하며 갯벌에 향나무나 참나무를 묻는 의식을 말한다. 우리의 옛 선조들은 현실적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륵신앙과의 결합을 염원하며 갯벌에 향을 묻고 바닷가 곳곳에 매향비를 세웠다.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는 고려시대인 1309년(충선왕 1년)에 세운 동해안의 고성(高城) 삼일포매향비(三日浦埋香碑)와 1335년(충숙왕 복위 4년)에 세운 평안북도 정주매향비(定州埋香碑), 1387년(우왕 13년)에 세운 경남의 남해안 사천(泗川) 곤양매향비(昆陽埋香碑), 그리고 조선조에 들어 1405년(태종 5년)에 세운 전남 무안(務安) 암태도매향비(巖泰島埋香碑)와 1425년(세종 9년)에 세운 충남 해미매향비(海美埋香碑)들이 그것으로 공통점은 변방 바닷가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시기적으로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는데, 이 시기는 왕조교체기의 혼란기였고, 또 한편으로는 倭의 침입이 잦았던 시기이다. 이러한 어둡고 불안한 시대상황 속에서, 더하여 倭의 치 떨리는 노략질마저 극심하다보니 바닷가 민중들은 미륵이 주재하는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염원하며 갯벌에 향나무를 묻었을 것이다.
이렇게 묻힌 향은 천년세월이 흐른 후에 침향(沈香)이 된다. 물에 띄우면 가라앉는다 하여 침향(沈香)이라고 한다는데 강철처럼 단단해서 두드리면 쇳소리가 난다고 한다. 그리고 향나무를 태우면 그을음이 생기지만, 침향은 그을음이 없고 향이 좋기로 세상에서 견줄 것이 없다고 한다. 신에게 바치는 공물의 으뜸으로 향을 꼽거니와 민중들은 이렇듯 귀하고 신비로운 향이 발원자의 소망이 미륵자존(彌勒慈尊)에게 연결되어 내세의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매향신앙(埋香信仰)은 불교에 바탕하여 생겨나긴 했지만 승려들이 행하는 불교의식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힘없고 가난하여 시달리고 박해받는 민초들이 이승의 고달픈 고해(苦海)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박한 염원에서 생겨난 민중신앙이다.
저 갯벌은 천년 후에도 갯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침향은 갯벌에 묻힌 후 꼭 천년세월이 흘러야 되는 것일까? 부안의 향토사학자 김형주 선생의 “부안이야기”에 침향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이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1961년 여름 고 함석헌(咸錫憲)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함석헌 선생이 사셨던 용강의 고향마을 앞 바닷가에는 “이곳에 침향목(沈香木)으로 참나무 천 주를 묻었노라”는 비문이 적힌 매향비 하나가 서 있었는데 묻은 연대는 고려 말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1945년 8·15광복이 된 뒤 어느 날, 마을사람들이 정말로 참나무 천 주가 묻혀있는지 파보자고 공론하여 매향비 주변을 파보았다고 한다. 과연 갯벌 속에는 수많은 참나무들이 묻혀있었는데, 묻혀 있음을 확인하였으면 곧바로 되묻었어야 옳았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침향이 되려면 아직도 4, 5백년은 더 묻혀 있어야 할 통나무들을 너도 나도 마구 가져다가 겨우 울타리 말구 등으로 써버렸다고 한다.
6백여 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천년 후의 후손들을 위하여 참나무 천 주를 갯벌에 묻으며 내세의 복을 빌었는데, 4, 5백년도 참지 못하는 후손들은 안타깝게도 이를 파내어 겨우 울타리 말구로나 써버리고..., 자연은 미래세대로부터 잠깐 빌려 쓰는 소중한 유산이거늘..., 그로부터 반세기 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러한 소중한 자연유산을 잘 쓰고 후대에 고이 물려주지는 못할망정 이 산 저 산 마구 깎아다 천혜의 갯벌마저를 모조리 메우고 있으니..., 어리석고 한심함이 분노를 넘어 슬픔을 느끼게 한다.
새만금매향비-비문
<앞>
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았듯이
후대에 물려줄 갯벌이 보전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비를 세우며
해창다리에서 서북쪽 300걸음
갯벌에 매향합니다
<뒤>
새만금간척사업을 반대하여
갯벌이 보전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뜻을 함께한 이름들을 이 비에 남깁니다.
2000년 1월 30일
새만금사업을반대하는부안사람들
전북환경운동연합
그린훼밀리운동연합
녹색연합
환경과공해연구회
한국YMCA전국연합
환경운동연합
허철희 / 1951년 전북 부안 변산에서 출생했으며, 서울 충무로에서 '밝' 광고기획사를 운영하며 변산반도와 일대 새만금갯벌 사진을 찍어왔다. 새만금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자연과 생태계에 기반을 둔 그의 시선은 죽어가는 새만금갯벌의 생명들과 갯벌에 기대어 사는 주민들의 삶으로 옮겨져 2000년 1월 새만금해향제 기획을 시작으로 새만금간척사업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2003년에는 부안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룻 『새만금 갯벌에 기댄 삶』을 펴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