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9 |
[최효준의 숨쉬는 미술이야기] 미술은 즐길만한가?
관리자(2008-09-18 10:33:00)
예술 문화 향수의 일상화 - 일본에서 배우기
최효준 / 전북도립미술관장
오늘 우리에게 ‘미술’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간접적인 방편으로 이번 호에서는 바다 건너 일본의 실상을 잠시 엿보기로 한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하정웅 선생의 소장품 수증 협의와 가나자와 시각디자인협회 전시 협의차 일본 가와부치시(川口市)와 가나자와시(金澤市)를 방문하는 길에 도쿄도(東京都)를 함께 다녀왔다. 그곳에서 틈을 내어 나흘 동안 일곱 군데의 미술관을 둘러보았다.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은 미술문화의 대중적인 향수 면에서 우리보다 많이 앞서 있다. 우선 다양한 주제의 퍽 좋은 전시가 전국 곳곳에서 빈번하게 열리고 있다. 서양미술에 관한 전시도 도처에서 늘 열리고 있다. 주로 방송사나 신문사 등 언론사의 문화기획팀들에 의해 문화사업으로 추진되는데 약 3-5개소의 미술관, 박물관으로 순회되는 계획이 수립되면 각 미술관의 큐레이터 들이 연구를 하여 서문을 쓰고 기획팀은 사업 프로젝트로서 추진하는 협업체계가 가동된다. 3-5개소의 전시관은 소요경비를 분담하고 홍보와 도록출간 등을 공동으로 하게 된다.
수십 년 간 이러한 방식으로 수많은 명품 전시를 개최하여 이제는 대체로 총론 차원에서 각론 차원으로 심화되어 있고, 해외 전시의 경우 외국의 원 소장처에서 보다 더 심도 있고 감동적인 전시를 내 고장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된다. 모리(森)미술관, 산토리 미술관과 함께 ‘록본기 예술삼각지(Art Triangle Roppongi)’의 하나인 국립신미술관(國立新美術館)은 엄청남 규모와 독특한 건축 디자인 그리고 대중적 접근성으로 유명한데, 그곳에서 개최되고 있는 <비엔나 미술사미술관 소장 정물화(靜物畵)의 비밀(秘密)>과 같은 전시가 그런 것이다. 서양의 미술관을 무수히 돌아다닌 필자도 네델란드 화훼 정물화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전시의 기획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단순한 나열식 전시가 아니라 미술사적 배경을 함께 알려주며 ‘비밀’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을 붙여 흥미를 유발하고, 17-18세기 회화의 도상학적 상징체계, 표현 기법, 사회사(社會史)와의 연관성을 상세하게 풀어가는 전시의 맥락은 그 어떤 관객이라도 사로잡을 호소력이 있다. 그래서인지 개별 관람객이 각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이 우리에 비해서 3-4배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사실 일본 어느 전시장을 가보아도 개별적으로 미술의 세계에 침잠하여 조용히 ‘감상삼매’에 빠져드는 관람객들이 대부분이다. 그것이 오늘날 100여년 가까이 된 일본의 근대적 예술 감상 전통이 일상화된 모습이다.
전시장 밖에는 충분한 휴게 설비가 갖추어진 공간이 있고 외창을 통해 주변 공원의 빼어난 풍광을 끌어들여 이른바 ‘미술관 피로(museum fatigue)’에 대한 해독제를 마련해 주며, 로비의 카페로부터 상층부의 고급 레스토랑까지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게 되어 있다. 다른 기획전시실에서는 <중국 당대미술 20년>전이 열리고 있어, 이른바 ‘따뜻한 전시’와 ‘찬 전시’를 함께 열어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미술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전위적이고 현대적인 미술에 대한 관심을 동시에 충족시켜줄 수 있게 프로그래밍하고 있다. 이 국립신미술관의 운영개념은 과연 성공적인 것이었다.
‘록본기 예술삼각지’의 모리(森) 미술관은 쇼핑센터를 갖춘 최신 다자인의 고층건물 최상층에 자리 잡고 있는 최고 시설의 사설 미술관으로 전망대 관람과 미술관 관람을 패키지로 하여 일일 3천에서 7천명의 관람객을 유치하는 도쿄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건물 앞 광장에 여류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와(Louise Bourgeois)의 대형 거미 작품(삼성미술관 리움(Leeum) 앞 광장의 것과 같은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그곳에서는 우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던 아네트 메사제(Annette Messager)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고 이 전시 하나를 위한 설치와 공간 연출에 투입된 예산만도 전북도립미술관의 연간 전시 예산 총액에 맞먹는 규모가 족히 되어 보였다.
우에노(上野) 공원에 위치한 국립서양미술관에 가면 유럽을 방문하지 않고도 서양 현대미술의 역사를 한번의 투어로 개괄할 수 있을 만한 컬렉션이 상설 전시되어 있고 정원에는 <지옥문>, <칼레의 시민> 등 로댕의 대표작이 영구 설치되어 있다.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동경도미술관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잘 알려진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와 델프트 화파의 특별전을 개최하여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고 있었다.
동경도미술관으로부터 분리되어 건립된 동경도현대미술관은 도시 외곽에 위치하여 전위적인 소장품 전시와 현대미술 기획전, 특별 설치전 등만을 개최하면서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이 미술관은 일본 최고 호황기에 엄청만 규모로 건립되어 십여 년 전 일본 경제가 불황기에 접어들자 관람객은 상대적으로 적은데 막대한 액수의 냉난방비가 지출되는 ‘돈 먹는 하마’가 되어버려 당시 소설가 출신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동경도지사 후보가 이 미술관의 폐관을 공약으로 걸었던 에피소드까지 있었는데, 수년전 하세가와 유코(長谷川陽子)라는 뛰어난 여성 큐레이터를 영입하여 재정자립도 높이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가나자와시(金澤市)는 전주시와 결연을 맺고 있고 전통문화 중심의 성격과 규모도 비슷하여 전북, 전주의 많은 문화관련 공무원과 민간 인사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4년 전에 개관된 ‘21세기 미술관’이라는 곳이 있다. 원형의 평면에 여러 형태의 독립 건물들이 산개되어 있는 공간 배치로 무료입장 가능지역(free zone)이 유료입장 지역(paid zone)을 감싸고 있어 도심의 공원을 찾는 시내외의 방문자들을 연간 백 수십 만 명을 유인하며 그중 4십여만이 결국 유료입장객이 되어 현대미술관의 성공적 운영 사례로 손꼽히는 곳이다.
개관 당시 세계적인 유명작가에게 작품 제작을 의뢰하였고 그 결과물인 영구 설치 작품들이 많은데 대부분 특이하고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새로운 방문객뿐만 아니라 재방문자에게도 매력 있는, 즉 본 것을 다시 보아도 좋을만한 컬렉션을 갖추었다는 점이, 랜드마크가 된 개성 넘치는 미술관 건축 디자인과 함께 방문자 만족도가 높은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기획전 내용의 구성과 전개에서도 ‘고급문화의 대중화’라는 목표가 확고하고 치밀하게 구현되어 있어 향수자 중심의 미술관 운영 개념의 시대인 ‘21세기’의 미술관이라는 명칭이 걸맞아 보였다. 시내의 옛 공장지대와 창고지대를 개조하여 만든 가나자와의 명소 ‘시민예술촌’은 그 대중적 참여도와 적극적인 시민 자원봉사 시스템, 알찬 프로그램과 운치 있는 시설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방문 필수 코스이다.
일본방문 마지막 날, 동경도내지만 기차로 수십 분 이동해야 하는 근교 위성도시 후츄시(府中市)의 시립미술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열리고 있는 <민중의 고동(鼓動)-한국미술의 리얼리즘>전을, 전시의 다섯 개 순회처 중 마지막 순회처에서 폐막일날 관람할 수 있었다. 인구 이십만 규모 소도시의 공영 미술관이었지만, 다양한 시민참여 프로그램, 어린이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훌륭한 자료실, 인근 공원의 조망이 빼어난 카페와 로비 등, 지역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문화향수시설과 휴유(休遊)공간으로서 모자람 없는 실상을 보며 부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소규모지만 알차게 운영되는 미술관, 박물관이 전국적으로 수천 개에 이른다는 것만으로도 일본의 지방 균형발전의 현재 위상을 알 수 있는데 향락문화·소비문화가 지배하는 도시의 다른 한 구석에, 그리고 방방곡곡 지방에 이렇게 인간다운 삶, 질 높은 삶,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격조 높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마련된 나라가 이웃 일본이다. 일본을 배우려면 바로 그런 면을 철두철미하게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설과 기관들을 여러 차례 방문한 우리나라의 많은 이들이 “우린 안 된다”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한다. 왜일까? 길은 없는 것일까? 우선 “이것이다”라고 느껴지는 것을 철저하게 파고들어 깊이 내재된 그 본질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깨달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실상과 문제점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철저한 자기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일본만큼의 문화향수 여건을 갖추는 것. 그 작업은 사실 전문가, 행정가들의 몫이 아니다. 그들에게 맡겨서는 결국 “우린 안 된다‘로 그치고 말 것이다. 향수자인 일반 도민, 시민들이 그 창발·혁신의 진정한 주역이 되어야 한다. 전문가·행정가들은 시민들의 열망, 그 강한 드라이브를 결국 쫓아가게 된다. 가나자와의 평범한 시민들이 오늘의 가나자와를 만들었듯이 말이다.
일본의 경우 한적한 소읍의 거리와 상점에도 다자인 개념이 두루두루 적용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네들의 경우, 미술과 같은 순수 예술문화가 나날의 삶 속에 녹아들어 가 있고 대중화되어 있는 덕이다. 그것이 우리와의 차이점이다. 주말을 이용하여 우리네 젊은이들은 배낭여행으로, 어른들은 초중고생 자녀의 감성지수(EQ) 증진을 위한 가족여행으로 다녀옴직한 미술관 박물관들이 동경도 근처에만도 넘치게 많다. 위에 열거한 곳들은 그 일부일 뿐이다. 다녀오시라. 단, 다녀오신 분들은 변별할 것을 변별하여 우리 지역에서 일본 수준의 일상적 예술 문화 향수가 가능한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을 가지시라. 그리고 여론을 일으키고 요구할 것을 요구하는 그런 역할을 부디 해주시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