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9 |
[명인명장] 내가 살아온 세상
관리자(2008-09-18 10:31:58)
정성을 다혀서 내 혼이 들어갔을 때 작품이 나오지.
구술 김재중ㅣ 정리 김승민ㅣ 사진 유백영
나무에 심상을 담았습니다.
꽃창살 예쁜 문이 마음에 들어와 앉아 한평생 닫지 못하고 열어 두었습니다. 문을 열고 나오면 세상이요, 문을 닫고 들어 앉으면 적막강산입니다.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의 문 하나 얻어 보고자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소목장 김재중(65세)씨는 꽃창살 문처럼 소박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도 나무와 함께 하며 살아온 세월의 향기가 배어 있어 그런 게지요.
나이테처럼 굵게 주름 잡힌 손마디 마디에 하나씩 새겨왔을 인생역정도 이제는 꽃문이 되어 환하게 웃음 짓고 있습니다.
나무에 새겨온, 그래서 자연을 닮은 김재중씨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문이 그렇게 내 눈에 들어 오드라고요.
올해로 44년생인 게 예순다섯이요.
본관은 경주고, 경주 김씨요. 고향이 용산리라고 허는디 요새는 삼천동이라고 허는 것 같대요. 서학동으서도 오래 살았어요. 부모님은 뭐 농사짓고 그랬는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아홉 살 때 돌아가셔가지고 어려웠어요, 생활이. 뭐 기술이라도 하나 배워야 것다 허는 생각도 있었는디. 어디 절에 어머니 따라 갔었는디, 문이 그렇게 내 눈에 들어 오드라고요. 그래서 그때 그것을 허고 싶다 혀서 시작혔어요. 그때가 열일곱 살 땐가 그랬어요.
지금은 그 양반이 돌아가셨는데 중요무형문화재였는디 고택용 씨라고. 그 양반은 인자 집 짓는디, 한옥 집 짓는디 따러 다녔는디. 대패도 갈고, 어쩌고 허는디, 얼마 안 있었어요. 한 일 년 그랬는디. 그 양반이 내가 나이도 어리고 그런 게 문을 배우라고 이동희 선생님이라고 경기전 사거리 그 카도에 있는 그 양반을 소개 시켜줬어요.
한 5년 배웠어요. 이동희 선생한데는. 연장 한 벌 싹 해줘가지고 나왔어요. 나와서는 박종철 선생한테 삼천공업사라고 거그도 좀 있었고. 또 구만리에 사는디, 이병노씨한테도 배우고. 다 돌아가셨어요. 유양석씨한테 오래 배웠지. 그 양반이 참 잘 혔는디. 이것저것 많이 배웠어요. 양옥문 짜는 것도 배우고. 한옥 문은 찾는 사람이 없응게.
다른 거 한번 돌아 보도 않고 이것만 혔어요.
아버지는 김병순. 어머니는 김정순이요. 아버지는 아홉 살 때 돌아가셨고. 형제가 없어요. 4대독자요. 누나도 없고, 동생도 없고. 지금은 어머님도 돌아가셨고, 한 20년 되았는가.
용산리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정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여그 완산국민학교로 왔응게. 학교를 내가 늦게 들어갔어요. 호적은 아주 어려요. 하도 옛날 으는 죽고 그렁게 호적을 안 혔든 모양이요. 호적은 50년생으로 되아 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외갓집으로 왔어요. 아버지 형제간도 없응 게. 외갓집 외삼촌한테 왔어요. 어머니는 개가 허시고. 어렵게 살었어요.
학교도 인자그냥 대충 다니고, 영생 야간 좀 다니다가 그만 뒀어요. 제대로 공부도 못 혔지요. 어머니 따라 절으 가서 그 문을 보고 반해서 이렇게 되았어요. 어디 절인지는 모르고 지금은. 그렇게 오다본 게 여그까지 왔고만요.
외삼촌이 고택용 선생을 소개해 줘서 시작 혔어요. 그때가 한 열 일곱 되았어요. 우리 때는 그 나이에 나가서 일도 허고 그렸어요. 먹고살기 어려운 게. 입만 풀칠 혀서 사는 거. 그랬어요.
그분이 나보고 소목을 배워라 그랬어요. 재주가 있다고. 내가 뭘 또닥거렸쌓고 그런 게. 집에서 토끼장도 만들고 뭘 만들어 싼게 기술이라도 배우라고 그랬어요. 우리 때만 혀도 최고로 알아주는 기술자가 운전수고, 그 담에가 양복 만드는 사람. 그담에 이발, 구두 만드는 거. 그랬는디 나는 이쪽을 택했어요. 목수를 혀야것다 혀서. 다른 거 한번 돌아 보도 않고 이것만 혔어요.
우리 같이 일 배웠던 사람들은 끝까지 온 사람은 거의 없고, 먹고 살기 힘들은게. 중간에 다른 거 허고. 한옥일 허다 본 게 싹없어졌어요. 한 칠십 년대 넘으니까 거의 없어지고, 양옥식 유리문 허고 그랬어요. 그리서 한창 뒤주 이런 거 만들어서 팔고 그랬어요. 다들 그만둬버리고. 그도 나는 다른 거 안 허고 이것이 재밌으니까.
나는 일 배울 때도 사방간디서 나를 데려 갈라고 그랬어요. 공장에서도 서로 막 나를 데려갈라고. 나는 가먼 오래 있응게. 이리저리 안 옮기고 오래 있응게. 같이 혔던 동기들 보먼 이리가고 저리가고 그러는디, 나는 멍청허게 한군데 가먼 일 배울라고 오래있응게. 나는 인제까지 일이 없어서 놀아보거나 그래본적은 없어요. 힘들 때도.
지금인 게 조금 이렇게 대접해주고 어쩌고 허지.
이동희 선생은 교동이지요. 지금 경기전 사거리 거그서 공장을 혔어요. 문 짜고, 소목일 허고, 한5년 배웠어요. 원래 3년 계약하고 들어 갔는디 한 2년 더 있었어요. 그런 게 그때 돈 아마 돈 천 원씩이나 줬을 거요. 한 달에. 쌀 한말에 천이 백 원인가 그랬는디. 거그 들어가 가지고 화폐개혁이 되았응게. 아마 육십 이년인가 그랬을 거요.
연장 한 벌 사줘서 나왔어요. 그 뒤에도 박종철, 이병노, 유양석 선생들한테 배웠어요. 그렇게 하면서 이렇게 살아왔어요.
뭐 일은 별로 어렵게 느낀 건 없어요. 우리 한옥은 문살이니까 짜서 맞추는 디.
처음에는 잘 안 맞잖아요. 지금사람들은 그렇게 허먼 붙어 있들 안 허지. 발로차고, 미끄러버리고. 문 짜노먼 망치로 두드려 버리고. 이것도 문짝이라고 짰냐고 그러고. 재료만 다 버렸다고 그러고. 재료값 내노라고 그러고. 인자 그렇게 혼내놓고는 당신도 조금 짠 헌가 나중에는 잘 달래갔고 일을 가르쳐 줘요.
그제사 인자 일을 배우는 것이여. 이렇게 이렇게 허라고. 그래서 배우는 거여. 혼나야 배워요. 학교같이 가르치는 거 아니고. 그때만 혀도 선생님이 먹을 노면 구녁파고 대패질, 그런 것만 허고. 일 배울 때는 그것을 허라고 안 맡겨요. 첨에 가면 끌구녁, 그담에 대패질, 그리고 톱질, 이렇게 과정이 있는디. 가르쳐 주들 안 혀요. 끌구녁 파먼은 잘못 팠다고 혼도 나고, 나중에 잘 파면은 다음은 대패질 허라 그러고. 그 담에 맞추는 거 그렇게 과정을 하나하나 거쳐 가지요. 이게 몸에 숙달이 되아야 허니까. 어디 뭐 설명헐 수도 없고 자기가 해봐야 허니까. 허다 보니까 일 배울 욕심으로 저녁으로 안자고 공장으 혼자 나와서. 깍어도 보고. 허다가 배우게 되았지.
그때만 혀도 인건비보다 나무가 비싸요. 인건비는 싼게. 그리서 자그만 헌 문도 짜보고. 어떻게 허다본게 이렇게 되았어요. 이걸로 먹고 살기는 어려웠고. 어렵게 살었지. 지금인 게 조금 이렇게 대접해주고 어쩌고 허지. 그때만 혀도. 우리 막 배울 때는 기술자는 좀 나았어요. 중간에 오니까 바꿔지드라고. 인건비는 싸지고. 그래서 자꾸 나가고 다 없어져 버렸어요. 장사 허고, 다른 일 허고. 나만 여그까지 왔네. 손가락도 다 잘리고. 연장에 다치고. 일을 허다 보면 그래요.
내가 공장허먼서 그때만 혀도 기계가 처음 들어 왔는디. 60년대 이짝저짝인디. 다 손으로 혔을땐디. 기계가 나온 게 첨에는 서툴잖아요. 그래서 허다가 본 게로 손도 다치고 그랬어요. 기계에다가. 넘일 만 한 15년도 더 혔어요. 결혼을 스물여덟 살 때 혔으니까. 결혼을 허고도 3,4년 넘으 일 혔으니까. 그러고 내 공장을 혔어요.
옆에 뒤도 돌아볼 시간도 없이 죽자 살자 일만 혔응게.
안사람은 문숙이. 인자 내가 그 교회를 다니니까 교회서 소개를 혀가지고 중매 혀서 결혼혔어요. 선봐서. 스물여덟에. 평화동교회 다녔어요. 아들 하나 딸 하나 뒀어요. 아들이 지금 34살. 딸은 36살. 둘 다 결혼혔어. 아들이 지금 5대 독잔디. 저는 인자 딸만 셋을 낳어요. 이거 대가 끊기게 생겼어요. 결혼허고 한 삼년 있다가 평화동교회 앞에 평화공업사라고 공장을, 내 공장을 만들었어요. 뭔 돈을 모으것어요. 그때만 혀도 인자 점포는 월세로 얻고. 우리 외숙모한테 50만원 빚 얻고. 그래서 시작을 혔어요. 어떻게 헌게 빚도 갚고. 그랬지. 재료 살라먼 넘으 돈도 얻어서 허고. 일이 끝나먼 갚기도 허고. 어떻게 살었는지 모르것어요. 좌우당간 부지런히 살었어요. 내가 생각혀도. 옆에 뒤도 돌아볼 시간도 없이 죽자 살자 일만 혔응게 밤이 되드락. 아침에 새벽에 일어나서 그렇게 일만 혔어요.
나는 특별히 가진 다른 기술도 없고. 힘들지만 직업을 바꾸자니 그럴 수도 없고. 배포도 없고. 그리고 나는 재미있어요. 일이 뭐 하나 혀서 딱 맞춰서 문을 달고 그러면 뭐라고 할까 재밌어요. 어려운 수학문제를 하나 풀었다고 할까. 기분이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일이 없기도 하고 그랬는디. 나는 그때도 일을 계속 혔어요. 안 놀고. 그러다본게 먹고살고. 이러다 저러다 본게 여기까지 왔어요. 중간에 공장허먼서 집도 하나 수리를 혀서 팔기도 허고. 혔어요. 그러다본게 빚도 갚어지고. 일 년에 한 두어 채 지어서 팔고 그랬어요. 넘들이 빚을 잘 줬어요. 그래서 했지. 그러다본게 집도 하나 이렇게 장만허고 그래지드라고요. 작은집. 삼천동에다 하나 혔어요. 한 50먹어서 그랬는가. 살다가 팔고 여그 인자 들어왔지.
우리 안사람이 고생 많이 혔어요. 먹고살기가 힘든 게. 아주 어려웠어요. 그때만 혀도 쌀을 홉으로 팔어다가 먹고, 연탄도 한 장 두 장 낱장으로 팔어다 쓰고. 힘든 것은 말도 못혀.
애들 키울 때가 젤 힘들었어요. 음료수라도 한잔 마실 놈 안마시고, 애들 차비라도 이놈 가지먼 허것다 그러고. 우리 안식구가 욕봤어요. 아들이 대학교 들어갈 때, 그때 참 내가 보람이 있드라고. 나는 못 배웠는디. 딸도 대학 나오고. 나는 고등학교 졸업도 못혔는디. 학교도 일을 헌다고 못가고. 한 달에 몇 번 가고. 그러다가 선생님이 졸업장이라도 한 장 줄라고 애를 썼는디.일이 이렇게 저기 허니까.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참 후회스럽디다.
졸업장이라고 딸 것을. 그래도 여그까지 왔어요. 인제 교회장로도 허고. 지금 전국노회장도 허고. 각 교회가 모여서 허는 회의가 있는디. 금년에 내가 지금 회장이요. 남신도. 남헌테 못 헐짓 안 허고 살고. 그런 게 괜찮아요. 넘 못헐일 시키고 그런 일은 없어요. 어디 파출소 한번 안가보고. 내 돈 띠었으면 띠었지. 나쁜 짓은 안 허고 살었어요. 술 담배도 안 허고.
아무것도 없이 둘이 맨손으로 올라갔는디.
결혼 헐 무렵 그때가 소목일이 젤 힘들었어요. 좌우간 인건비가 싸고. 찾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서울로 올라갔었지. 그때는 한옥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양옥 일을 혀야혀. 유리 문짝. 나는 한옥을 헐땐디. 그래서 양옥을 좀 배운 게 있어서 양옥도 허고, 한옥도 허고. 강대상이라고 교회 목사님들 설교헐 때 쓰는 것도 허고. 여러 가지 배워논게 허고. 의자, 책상. 뭐 이런 거 저런 거 다혔어요.
그래도 지방에는 일이 없응게 서울로 올라갔어요. 아무것도 없이 둘이 맨손으로 올라갔는디. 그때만 혀도 나는 기술이 있응게 먹고는 살것지 허고 올라갔지. 상계동으로 가서 허허벌판인디 산 밑에서 살면서. 그랬어요.
그때 이동희 선생님이 거그가 있었어요. 공장치우고 거그가서 양옥일도 허고. 그래서 거그로 가서 일을 혔어요. 한 2년 있었는가. 내려와서 예수병원에 가서 조금 일을 혔어요. 소목일을. 문도 고장나 먼 고쳐주고. 목공실이 하나 있었어요. 조금 허다가 나와서 공장을 시작을 혔어요. 한옥문은 없고 양옥문을 짰어요. 그러다 얼마 안 있다가 한옥 문을 시작을 혔어요.
일을 막 신나게 혔어요. 휘파람 소리 나게 혔응게.
다시 본업을 헌거지. 오주환씨라고 문화재 전문허는 업체가 있어요. 그 양반이 남문도 수리도 허고. 해전건설을 혔어요. 지금도 허고 있어요. 그 양반 업자 문을 처음 시작을 혔어요. 한옥 짓고 다니는디 문을 대었지. 업자들이 내 문을 보고, 나헌티 와서 허고. 나는 한옥을 정통으로 배운 거요. 전문으로. 지금 내가 예순 다섯인 게 한 48년 거의 50년 된 거 같네요. 문일을 헌게.
내 공장헐 때 그래도 보람이 있었지. 그때가 젤로 나았어. 이천년대 이짝저짝. 나는 문화재가 있는지 뭣허는지 몰르고 일만혔는디. 저그 최동식이라고 지금 문화재 가야금 만드는 사람이 뭔 협회가 있다고 거그 들어와서 그래라 그래서 했는디. 전북대학교 교순가 누가 와서 한번 내보라고 그래가지고 냈는디. 첨에는 안 되았다고 그랬는디. 그담에 와서 해주드라고.
그때 울었어요 내가. 팔팔 올림픽 때 롯데월드 거그 문을 짰어요. 그때 사장이 전국을 돌면서 꽃살문 허는 사람을 찾을라고 했는디 결국은 나헌티 왔어요. 그 양반이 뭐라고 허냐 먼 이거 헐라 먼 대한민국에서 최고가 된다고 생각 혀고 한번 짜봐라. 그래서 맘을 먹고 혔지. 그전에 민속촌 문도 거의 다 내가 짰고. 그 무렵에 나도 괜찮았어요. 그때만 혀도 일을 막 신나게 혔어요. 휘파람 소리 나게 혔응게. 누가 따러 오들 못 혔응게. 일을.
아침에 일어나서 공장에 나와서 일을 허먼 남들 며칠 걸릴 것 한나절에 허고 그랬어요. 배울 때도 끌구녁을 파도 다른 애들보다 한 개라도 더 파고 대패질도 넘들 보다 한 개라도 더 헐라고 그랬어요. 그런 게 욕도 많이 먹지. 눈치도 먹고. 저 멍청헌 놈 땜에 우리가 혼난다 그랬어요. 그래도 꽤 파고 그런 놈들은 중간에 다 그만두고, 나같이 멍청허게 허는 놈만 남고. 그렇게 멍청허게 헌게 서로 나를 데려갈라고 그랬어요. 일을 내가 배울라고 욕심에 그랬어요. 지금 일허는 것은 눈에 맘에 차들 안 허지.
그래도 이 나무는 어쨌든 그대로 있는 건 아녀.
나는 꽃살문을 많이 혔어요. 전통으로 옛날 그 선조들이 만들어 왔등거. 그걸 그대로 헐라고. 다른 사람들은 인자 이거 보고 혔지. 우리 때만 혀도 꽃살문은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저는 인자 거 지금 내소사, 거그 가서 스님 몰래 종이를 찢고 보고, 집에 와서 만들어 보고. 그래가지고 만들었어요. 제일 대표작이 꽃살문. 금산사 대적광전 거그는 돈은 고사허고 내가 작품하나 남겨야 것다 그래서 했어요.
첫째 나무를 잘 구입을 혀야 혀요. 홍송. 저는 주로 인자 홍송을 썼는디. 육송이 있으면 좋은디 지금은 우리나라에 없고. 홍송도 좋은 놈은 없고. 러시아산. 질이 거의 같어요. 우리나라 것허고. 소나뭇과인데 똑같어요.
옛날 고가 뜯고 그런데서 나오는 거 조금 가져다 써보기도 혔는디. 지금은 인자 그런 것도 안 나오고. 그래서 그 놈을 쓰는디, 대패질 혀보고 그러먼 질이 같어요. 우리 육송은 나무를 킬 때부터가 문제여. 잘못키먼 아무리 말려놔도 틀어져 나무가. 잘 켜야혀. 나뭇결이 있어요. 결대로. 잘 못허먼 나중에 뒤집어져. 재제부터가 인자 시작이여.
잘러서 나무를 쌓아서 눈 맞고 비 맞고 그렇게 말리고. 한 삼년 이상은 말려야 해요. 그런디 인자 그런 시간이 없으니까 쪄요. 기계에다가. 그다음에 한 일 년 말려서 써요. 왜 이렇게 자연건조를 해야 허냐먼. 나무가 수축을 혀요. 습이 있고 그러먼 빨아들여요 습을. 그래서 나무가 늘어나요. 건조 허고 그러먼 나무가 줄고. 처음에는 한 푼이나 두 푼 줄다가 몇 년지나면 조금씩 줄어요. 줄는 격차가 적어져요. 오래갈수록. 그래도 이 나무는 어쨌든 그대로 있는 건 아녀. 아무리 잘 말려도. 그래도 말른 나무로 해야 틀어지지 않고. 오래가고 그러지요.
만들어 보고 안 되면 부셔버리고.
꽃살문 같은 것은 아무래도 재료부터가 신경을 쓰죠. 그담에 나무 치수에 맞게 끊어서, 대패질 혀서 구녁파고 가다 떠서 그림 그려서 조각 허고 그래요. 끼워 맞춰서 그담에 그림 그 서 파요. 꽃모양을. 우담바라고 천년에 한번 피는 꽃이라는 디 불교에서. 여러 가지요. 연꽃 같은것도 허고. 작약 같은 것도 허고. 그림 존 놈 있으면 복사혀다가 맞춰서 허고 그래요. 금산사에도 있고 고창에도 있고, 마산 무슨 절에도 있고 많아요. 내소사 것 보고 종이도 찢고 보고 사진도 찍어오고, 몇 번씩 해보고 안 되면 다시 허고. 만들어 보고 안 되면 부셔버리고. 처음에 헌것이 아마 소요사 것이 아닌가 싶네요. 고창의 소요사. 전주향교도 대성전 거그는 꽃살 조각은 아닌디 육각 오려서 낸 거요. 그것도 허고. 좌우간 많이 혔어요.
혼이 들어가야 혀요.
문이 인자 이런 게 있어요. 목수가 집을 질 때 문을 균형을 맞추는디 그게 잘 되아야 혀요. 집에 맞게 문도 짜야 허고 집도 문에 맞게 혀야 허고. 집을 잘 지었어요. 맞는 문이 들어가야허는디. 집 얼굴이잖아요, 문이. 균형이 잘 맞는다고 허는 것은 영각사치가 젤로 잘 맞어요. 그 다음에 인자 다양 허니 만들어서 작품으로 남겨야 것다 헌게 금산사 대적광전.
나 죽어도 후손들이라도 좀 보고 그러라고 만들었어요. 금산사 치를. 지금 사실 만든 걸 보먼 내소사치보다는 잘 만들었어요. 그지만 인자 내소사치가 왜 값지냐 허먼 그 당시에 지금 봐도 집짓는 것이나 옛날 것 보면은 신기해요. 혼이 들어가야 혀요. 일절 정성을 다혀서 내 혼이 들어갔을 때 작품이 나오지, 글안허먼 나오들 안 혀요. 바로 그런 거예요.
옛날 선조들이 혼이 들어있어요.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때에 연장도 지금 같지 않고. 큰 톱으로 이렇게 나무키어서 각을 만들어서 짯을텐데. 그때 어떻게 이렇게 했을까 싶어. 이런 꽃살문을 만들었을까.
그런거 보면은 참 신기해요. 내가 넋을 놓고 쳐다볼 때가 있당게요. 저 아래 구례에 있는 화엄사 같은디. 아주 그때 잘혔어요. 섬세헌 것은 아마 내소사치보다 나을 거요. 내소사 사분합사 같은 거 보면은 잘해놨어요. 문살이 네 개가 합쳐지는 거요. 반듯헌 살이 네 개가 합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디. 한쪽은 좁고, 한쪽은 넓고, 그렇게 사분이 합쳐지는 것은 어려운 것이요. 지금 내가 그것을 허잖아요.
잘 만들라먼 다 어렵지요. 첫째는 나무가 좋아야 허고. 그리서 나무는 한 채 두 채 헐 놈은 준비를 허고 있어요. 그런 것은 연필 금 하나만 틀려도 저 끝에 가서는 안 맞어요. 눈 어둡고 손 떨리고 그러먼 못 허는 거요.
아들을 목수를 시키냐고 막 싸매고 누워버리고.
우리 아들도 인자 지가 직장가야 45세 이짝저짝 가먼 그런다고. 아버지 이것을 허먼 어쩌요. 아버지가 문화재도 되고 헌게. 뭣허러 이것을 헐라고 그러냐. 이 고생고생을 니가 뭘라고 허냐 그러다가. 식견이 있는 분들한테 물어봤어요. 박물관장, 교수님. 물어보니까 앞으로는 세대가 그렇게 흘러간 게. 내가 보증헐텐게 허라고 그러네. 이쪽 계통에 그런 사람이 없응게. 허라고. 아들이 그래서 헌다고 그러는디. 우리 안식구는 고생을 혔으니까. 뭔 대학교까지 갈쳐가지고 아들을 목수를 시키냐고 막 싸매고 누워버리고. 천길 만길 뛰고. 난리를 치는디. 지가 헌다고 지금 엄마를 설득을 시킨게. 그냥 허게 두드라고. 한 삼년 배웠어요 지금.
그런대로 해요. 아무래도 어려서 심부름도 허고. 어깨너머로 보고 그래서. 또 배웠응게 잘 허지요. 잘해요. 우리아들하고 외사촌 동생이 한 20년 되지요. 내가 공장시작 험서 얼매 있다 가가 들어 왔응게. 가가 잘 혀요. 김연철이요. 외사촌동생. 한 오십 살 되아요 나이가.
기술자라 그 장인정신이 있어.
그니까 지금 전국에서 그도 제대로 짠다 허고 보먼은 몇 없어요. 누가 배울라고 허도 않고. 허든 사람들이 이쪽으로 달라 들어가지고 허는디. 문이 문이 아니지. 우리가 보먼은. 흉내는 낼라고 그러는디. 그 사람들이 가격을 후려 쌓고 그래요. 우리는 문화잰디 그렇게 헐 수는 없잖아요. 돈은 싸지만. 견적 넣으면 다 떨어져요. 업자들은 아무래도 싼디다가 헐라고 그러고. 나 헌티 찾아오는 사람은 절, 또 자기가 직접 허는 사람들. 이번에도 저그 경상도 그쪽으로 지리산 벽송사 거그치 끝나고 당진 저쪽에 제각 한 채 진다고 혀서 가볼라고. 자기 것 허는 사람이 찾아오고, 업자들은 거의 안 오고. 허만옥 씨만 나헌티 와서 꾸준히 혀요. 한옥 짓고 댕기는 사람. 남창당도 짓고, 우석대학교 한방문화센터도 짓고. 그 사람은 원래 기술자요. 단청기술자. 그 사람은 머리가 좋아가지고 어떻게 건축일로 업자로 허는디. 기술자라 그 장인정신이 있어. 그래가지고 집을 지어도 제대로 잘 헐라고 허는 그런 것이 있어. 그래서 문을 꼭 나 헌티 혀요. 가격 고사 허고. 문양에 따라서 여러가진디. 보통 한 20만원. 작품으로 나가는 것은 말헐 수 없지. 꽃살문은 한 삼백오륙십만원. 그런 것은 몇 년에 한번 헐까 말까 해요.
집을 딱 지먼 균형이 맞아야 해요.
먹고사는 거요. 그냥 풀칠하면서 살지. 이거해가지고는 돈을 모으고 살든 못혀요. 조금 요즘 나아진 것은 애들 다 키운 게. 애들 키울 때 같으먼 굶어죽어요. 그때만 혀도 어떻게 키웠는가 몰라요. 그냥 일만 했어요. 집을 지어서 팔기도 허고. 건축도 허고. 업자처럼. 문도 허고. 그렇게 했으니까 애들 갈치고 그랬지. 그놈들 다 갈치니까 이제 돈 들어갈디가 없잖아요. 긍게 지금 먹고살지 글 안 허먼 못 먹고 살아요. 공장들 다 문 닫았잖아요.
대목장은 내가 그런 말은 못 허지만. 내가 이렇게 보면 내가 평생 문을 달고 다녔응게. 저 사람은 모정이나 질 사람. 저 사람은 제각이나 민가나 질 사람. 저 사람은 큰 집 질 사람. 대강 알아. 저 사람은 입이 거칠은 사람. 거칠어도 큰일을 헐 수 있는 사람. 저 사람은 세밀 혀도 민가나 짓고 그럴 사람. 이렇게 보면 알아요.
조목수라고 여그 삼천동 사는디. 저그 벽송사도 지었는디. 나하고 잘 맞아요. 잘해요. 그 사람은 집을 지면서 문을 어떻게 했으면 허것냐고 미리 나허고 상의를 해요. 문이 균형이 있는거요. 집을 딱 지먼 균형이 맞아야 해요. 높이와 넓이와 균형이 맞아야 해요. 그렁게 어떤 때는 문을 달고 와서도 찝찝허고 그래요. 안 맞으먼.
집에 맞는 문이 되어야 해요. 기둥이 몇 자 짜린가 몇 포집인가. 거그에 맞도록 문도 치수를 맞춰야 해요. 그래야 집을 짜노먼 균형이 맞는 거요. 그렇게 맞춰서 하는 사람이 별라 없단 말이지. 우리나라서 서 너명뿐여. 어떤 교수가 그런 것을 책으로 만들 수 없냐고 그러는디 그게 안 되아요.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들 음석허먼 적당히 넣어가지고 허득기 그런 식이요. 딱 재서 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일만 허지 그런 것을 자세히 설명허거나 그러들 못허잖아요.
어른들이 그전에 고상은 꾸어다가도 헌다고 그랬잖아요.
문화재 그거 하나로 보람을 느끼고, 그래도 인자 최고다 그러고 살아요. 그게 최곤지 알았더니 위로 또 뭣이 있등만요. 국가지정. 문 만드는 건 아직 없어요.
연장 한 벌은 끌 몇 개, 대패 몇 개, 톱, 자, 먹줄, 그러지 뭐. 그거만 있으면 되아요. 우리 일 배울 때만 혀도. 몇 년은 괜찮았어요. 목수들이. 운전수가 잘 나가고, 양복장이가 그담이고. 목수가 그담이었어요.
참 어려웠어요. 우리 안사람도 참 고상 많이 혀고. 속아서 왔지. 내가 신앙이 좋다고 그런 게 그거 믿고 왔어요. 지금 잘 히주야 것다 그래도 그것이 안 되더라고. 참 어렵게 살았아요. 평생 살아온 걸 뒤돌아보먼 그렇게 막 고생고생 허고 최선을 다히서 살았는디. 고생헌것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 드라고.
IMF가 와서 다들 힘들었잖아요. 근디 나는 걱정이 하나도 안 되드랑게 이보다 더 헌 놈의 세상도 살았는디. 이까짓 거 뭐 내가 어디가 밥 굶것냐 그랬어요. 긍게 나는 그러고 살응게 오히려 났드랑게. 내 동생 월급 줄여보고 그래본 적이 없어요. 그때도 다주고 일허고. 다들 월급 줄이고 직원 줄이고 그럴 땐데 나는 오히려 열심히 혀서. 새로운 용기가 생기드라고. 아무것도 아니 드라고. 어른들이 그전에 고상은 꾸어다가도 헌다고 그랬잖아요. 그걸 알 것 드라고. 아 이런 것이구나. 지금은 얼마나 살기 좋아요.
지금 애들은 먼지 속으서 땀 흘리고 이런 것은 허들 안 혀요. 우리 아들도 먼지 속으로 땀을 흘리고 그러먼 안쓰러워요. 내가 문화재라고 헌게 지가 열심히 허고 그런가 봐요. 잘 헐라고.
그렇게 욕심나게 잘 혔는디.
근디 이게 갈친다고 다 허는 게 아녀. 재능이 있어야 허고. 우리 배울 때도 보먼은 끌구녁 파고, 넘이 시키는 것 만 허고 그런 사람들은 되들 안혀. 지가 머리 써서, 먹 놓어서, 재다가 나무 끊어와서 문을 만드는 것은 몇 안 나와요. 열 갈치먼 하나나 나올까. 어찌다 하나씩 나오고. 전에 배운 애들도 많은디 다들 인테리어 허로 나가고 그래요. 하나가 참 잘 허는 놈이 있었어. 욕심나게. 근디 가가 벙어리여. 키도 크고 인물도 잘생기고. 집중을 허는 거여. 머리도 좋고. 먼 말허먼 지가 잘 알아서 허고. 내가 뭐허먼 그다음 연장이 뭐가 필요헌지 알고 챙기고. 그렇게 욕심나게 잘 혔는디. 그리서 갈쳤는디. 근디 옆으서 병풍 만드는 사람이, 거그 무슨 협회가 있는 게비여. 돈을 얼마를 준다고 꼬셔가지고 나가 버렸어. 얼마나 서운허등가. 서울로 갔어요. 한번 인사허로 왔는디 오토바이 타고 다니다가 교통사고 나서 죽어 버렸디야. 어떻게 아깝고 그러든지. 또 하나가 좀 잘 혀. 욕심나게 잘 허는디. 인테리어헌다고 나가 버리고. 그리도 내가 일이 바쁘먼 와서 좀 도와주고 그래요. 다들 지그 나름인디, 한 오년 허먼 거의 해요. 오년 아니라 십년 갈쳐도 못 허는 놈은 못 허고. 나는 한 삼년헌게 다 혔어요. 선생님들이 빨리 배운다고 그랬어요. 그냥 취미로 배운다는 사람은 있는디. 누가 안혀요. 힘등게.
내가 이거 혀서 헛되게 살은 것은 아니다 그래요.
나는 뒤돌아 볼 때 후회되든 안 혀요. 손가락하나 다치고 그럴 때는 내가 장사로 돌아섰으먼은 떼부자가 되았을텐데. 그런 생각 잠깐 혀봤는디. 그지만 인자 작품을 만들어서 딱 보먼은 보람이 있고. 더군다나 문화재가 되고 본게. 그리도 내가 이거 혀서 헛되게 살은 것은 아니다 그래요. 넘 못 헐 일 안 혔고. 큰돈은 못 벌었어도. 노년에 먹고 살 것은 없어도 괜찮아요. 집한 채 저그다 지어서 팔라고 그러고. 아직은 뭐 그냥 힘이 있응게.
내가 제일 허고 싶은 것이. 후진을 길러내는 학교를 하나 허고 싶다 그래요. 땅 한 오백 평만 있으먼. 한쪽 으다 공장 허고. 애들 와서 일 년, 삼 년 이렇게 배울 수 있는 학교를 하나 만들고 싶어요. 이론도 갈치고, 실기도 갈치고. 그러먼 빨리 배우지요.
내가 그런 과정을 거쳐 왔기 때문에 내가 갈치 먼 빨리 배울 수 있어요. 목수일은 기본이 있어요. 구녁 파는 것, 톱질, 대패질. 이런 것을 잘 갈칠 수가 있는디. 그런 학교를 하나 만들고 싶어요. 또 하나는 우리나라에 민가 문부터 거적때기, 이런 것들, 그 다음에 궁궐 문, 죽창 대나무로 만든 것, 절문, 고가 문, 이런 것들을 칠십 안짝으 만들어서 칠십에 개인전 한번 허고 나서 어디다 기증하고 이름이라도 남겨야지 그래요. 근디 재력이 없어서. 먹고 살기도 힘든디. 어쩔가 싶어요. 내가 생각은 가지고 있지. 학교하나 만들고, 문들 다 만들어서 전시 한번 허고. 그 두 가지는 내가 꼭 헐라고 그래요.
그전에는 내가 이런 것 저런 것 몰랐는디. 최동식 선생이 정부에서 문화재청에서 허는 그게 있어요. 그걸 몇 번 했어요. 그것을 내가 잘못헌거여. 나는 멍청허게 꽃살문을 잘 만들어서 출품을 혔는디. 종이도 안 바르고 내놨는디. 문 짜는 사람들이 다 와서 보고 만들기 시작헌거여. 다른 사람들은 간단헌 것만 내놓드라고. 나는 내 솜씨 자랑 헐라고 존 놈 그랬더니, 다들 보고 따라서 혀버리드라고. 그것이 잘못 된 거여. 인자는 안 내놓아요.
우리 아들이 열심히 배워서 한번 헐라 먼 무형문화재까지 되아야 헐텐디. 어쩔지 모르것어요. 그래도 잘 허것지요.
김재중 연보
1944년 전라북도 전주 태생
아버지 김병순, 어머니 김정순 사이에 독자
1961년 소목일 시작
(고택용, 이동희, 박종철, 이병노, 유양석 등 기술전수)
1988년 롯데월드 민속관 창호제작
1997년 제6회 전라북도 전통공예대전
1998년 한식목공 문화재수리기능보유자
국가기술자 자격 목재창호 2급
전북기능경기대회 창호부문 금상
2000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소목장
현) 전통한옥문연구소장(평화공업사대표)
현) 전통공예협회 이사
현) 한국문화재 기능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