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9 |
[테마기획] 전북 연극, 소극장을 탐하다 2
관리자(2008-09-18 10:29:02)
창작 소극장.
변방을 중심으로 바꿔 온 전북 연극의 산실
곽병창 / 창작극회 예술감독, 우석대 교수
창작소극장은 1990년 12월에 전주의 오랜 중심 거리였던 아리랑 제과 사거리에 처음 문을 열었다. 그 당시 창작극회 단원들과 주변의 후원인들이 여러 달 동안 지성껏 모은 성금의 결실이었다. 1961년에 창단한 창작극회가, 1987년 막 출범한 전주시립극단으로 통합되면서 활동을 중단한 지 만 3년만이었다. 창작소극장 개관과 함께 창작극회 재창단 공연 ‘남자는 위, 여자는 아래’를 공연하였으니, 명실 공히 전북 연극의 모태 극단 노릇을 다시 충실히 이어받게 된 것이다. 이후 창작소극장은 내리 18년 동안 거의 한 해도 가르지 않고 이 지역 연극의 요람 구실을 해 왔다. 연평균 공연작품 10편, 극장 가동 일수 연평균 200일 이상, 관람 인원만도 연평균 9,000여 명에 이른다. 순수 민간 소극장으로서 창작소극장이 지역 연극에 끼친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수치이다. 연극 전문 소극장으로서 창작소극장이 이 지역의 연극계에 끼친 긍정적 효과는 매우 크고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중장기 공연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공연장 사정으로 인해서 며칠 만에 막을 내려야 하는 중·대극장 공연에 비해 소극장 공연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공연 횟수를 자랑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안정적 연기술을 배양하는 굳건한 토대가 된다. 공연은 말할 것도 없이 배우와 관객이 직접 맞닥뜨리는 가장 충일한 체험의 순간이다. 초보 연기자들뿐만 아니라 중견 이상의 관록을 지닌 연기자들도 공연을 통해 스스로 재충전하는 에너지를 얻는다. 이른바 피드백 효과(feed-back effect)가 공연행위를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둘째, 다양한 창작극의 발굴·수정·재공연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소극장을 통한 장기공연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다양한 통로의 수정·보완 과정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극작 행위에 뛰어들 수 있게 된다. 전국적으로 총 연극인 숫자에 비해 희곡작가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아마도 전주, 전북지역일 것이다. 이들 두터운 극작가 군들이야말로 전북연극의 저력을 형성하고 있는 중요한 한 축이다.
셋째, 이른바 동인제 연극집단의 출현이다. 지속적인 소극장 연극 운동의 결과 양적·질적 상승을 겪은 연극인들이 연극에 대한 관점, 세계에 대한 관점, 장르와 작업방식에 대한 선호도 등에 의해 이합집산하는 단계를 거치면서 새로운 동인제 연극집단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넷째, 결과적으로 여러 형태의 소극장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2008년 현재 전주에는 5개의 연극 전용 소극장이 왕성하게 운영되고 있다. 이들 소극장들은 경우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개별 극단들의 연극적 특성을 충실히 살리면서 각자 새로운 연극 운동의 터전이 되어가고 있다. 마치 8-90년대 서울 대학로의 소극장 중흥시대를 연상할 만하다. 이는 장기적으로 인력, 제작시스템, 새로운 창작 연극 등의 지속가능한 재생산 구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만하다.
엄밀히 말해서 1961년 출범한 극단 창작극회는 이 지역에서 그 이후에 명멸해 온 모든 극단들의 모태이자 학교와 같은 존재이다. 이 지역의 연극인들이 창작극회의 창시자인 고 박동화 선생을 가리켜 ‘전북 연극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창작극회의 작업 방식이나 인적 구조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했던 많은 극단들, 연극행위들마저도 궁극적으로 창작극회의 요람에서 커 나온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창작극회 또는 박동화는 과연 어떤 존재였는가? 더 줄여서 박동화의 예술관, 연극적 경향, 방법론적 특징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거칠게나마 이를 규명해 보는 것은 지금의 전북연극을 제대로 점검해 보고 앞으로의 건강한 행보를 모색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박동화와 창작극회는 출범 당시부터 철저한 사실주의 연극관을 지녔고 이를 구현하는 작품으로 일관해왔다. 박동화 이래 창작극회가 추구해온 사실주의 연극관을 거칠게 정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관적 측면으로는 연극이 당대의 현실을 예술적으로 충실히 재현하여 반영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개선, 변화시키려는 인간 행위의 소산임을 분명히 한다. 둘째, 연극 기법적 측면으로는 당대 현실에서 소재를 찾는 창작 희곡을 생산해 내며, 이를 자연스럽고 토속적인 연기술을 통해 무대 위에 형상화하려 노력한다. 창작극회가 추구해 온 위의 두 가지 관점과 방법론은 그대로 이 지역 연극의 소중한 전범이 되어 부지불식간에 전승되어 왔다. 최근 들어 전국 규모의 연극 경연대회에서 우리 지역 극단들이 좋은 성과를 내는 비결 또한 여기에 있다. 사실주의적 연극관에 입각한 창작 희곡의 전통, 그리고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화술과 연기술 등이 박동화 이래 초창기 전주 연극인 선배들로부터 입은 가장 큰 음덕인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번역극, 부조리극의 홍수 속에서 자라난 일부 연극의 허술한 연극관과 국적 불명의 화술, 연기술 등을 떠올려 비교해 보면 이런 주장이 허언이 아님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창작극회와 창작소극장은 이제 그 막강한 중심의 자리에서 서서히 비껴나고 있다. 물론 이는 전혀 슬픈 일이 아니다. 이제 더 많은 연극인들이 더 발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연극 어법을 개발하고 연극의 새 유통 구조를 개척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으니, 더 이상 창작극회가 고전적인 중심 노릇에 안주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또 그만큼 세상을 더욱 또렷이 꿰뚫어 보고, 급변하는 당대 관객의 미학적 요구를 담아내며, 궁극적으로 연극을 통해 세상을 따뜻하게 개변하자던 생각을 제대로 구현하라는 뜻이다. 돌아보니 그것이 곧, 근 오십 년 전 창작극회의 초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