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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8 |
[박물관대학] 전북대학교 제2기 박물관 대학 지상강좌
관리자(2008-08-13 15:08:53)
I.풍속화의 개념 ‘풍속화’란 어떤 그림을 의미하는가? 먼저 ‘풍속’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옛적부터 사회에 행하여 온 의·식·주, 그 밖의 모든 생활에 관한 습관’ 또는 ‘세상의 時體, 風氣’  (이희승, ??국어대사전??, 민중서관, 1974) 2. 그 시대의 유행과 습관 따위 풍속화란 위와 같이 정의된 인간의 풍속을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풍속을 영어로는  manners(풍습,습관,방법), customs(습관), popular(public) morals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풍속화는 일반적으로 ‘genre painting’이라고 부른다.   한편 사람의 풍속을 그리면 무조건 풍속화가 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풍속화가 되려면 우선 필수적으로 ‘사실성’을 갖춰야 하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그 ‘시대상’을 기록할 수 있다. 다음으로 풍속화는 ‘예술성’ 내지 “일종의 품위, 정취, 시정, 감각미”(이동주) 등을 갖추어야 한다. 풍속화가 사진과 다른 ‘예술’이 되려면 필요한 요건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풍속화는 인간의 풍속을 다룬 그림인 만큼 ‘인물화’가 일반적이지만, 간혹 다른 그림도 포함된다. 맹인재 선생은 “풍속화의 개념에서 인간의 행위 이외에 ‘옥우정사’와 같은 역사적 존재도 시간적 현실성을 지닌 그림이면 풍속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잘 지적한 바 있다. II.풍속화의 종류 풍속화의 종류는 그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작가에 따라 분류한다면, 먼저 ‘화원이나 직업화가’의 풍속화와 ‘문인화가’의 풍속화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그림의 종류에 따라 분류한다면 ‘감계용’, ‘실용적 기록화’, ‘감상용’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흔히 나누는 방법은 그림의 내용에 따른 분류이다. ▶그림내용에 따른 풍속화의 종류 그림 내용에 따라 풍속화는 서민용, 사대부용, 국가나 왕실용으로 세 구분 할 수 있다. 먼저 서민들의 풍속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종류로서 김홍도, 김득신 등의 많은 작품들을 들 수 있다. 둘째, 사대부들의 풍속화로는 계회도, 아집도, 평생도 따위가 있다. 셋째, 국가나 왕실의 풍속화로는 공식적으로 그려진 각종 기록화, 의궤반차도, 수원능행도 등을 들 수 있다. III.풍속화의 역사 한국의 풍속화는 조선후기에 본격적으로 발달하였지만, 그 이전에도 풍속화는 꾸준히 그려졌다. 1. 본격적 풍속화 발달 이전 풍속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여러 가지 모습인 만큼 풍속화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청동기 시대에 그려진 암각화에서 풍속화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암각화란 바위 표면에 새긴 그림을 말하는데,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그 연대가 초기철기시대로 낮추어 비정되기도 하고, 일부에는 삼국시대의 암각까지 섞여 있지만, 그 주요부분은 선사시대 그림들이다. 여기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사냥과 주술 행위를 하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현재 그림다운 작품이 본격적으로 남아있는 시기는 삼국시대 중 고구려의 고분벽화부터 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세 시기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초기, 중기의 고분벽화에 풍속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안악3호분>의 대행렬도나 <무용총>의 수렵도, 무용도,  <각저총>의 씨름장면 등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실경산수도로서 <예성강도>, <금강산도>, <진양산수도> 등이 그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실경산수도도 그 시대 인물들의 모습이 담긴 넓은 의미의 풍속화라고 할 수 있다. 또 고려시대에는 ‘기로회도’와 여러 계층 인물들의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는데, 이것도 넓은 의미의 풍속화 범주에 포함시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초기와 중기는 아직 본격적 풍속화가 그려지기 이전이지만, 그래도 고려시대에 비해 더 많은 풍속화가 그려졌다. 이때의 풍속화로는 고려의 전통을 이은 계회도와 각종 기록화, 그리고 유교 성리학적 이념을 담은 감계화들이 있었다. 특히 이런 감계화에는 빈풍칠월도, 무일도, 경직도 등이 있는데, 조선후기 본격적 풍속화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성행하였다. 빈풍칠월도(?風七月圖)란 <시경>의 ‘빈풍칠월편’을 도해한 것으로, 백성들의 농업과 양잠업 장면을 표현하여 왕과 지배층으로 하여금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무일도(無逸圖)도 역시 <서경>의 ‘무일편’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지배층으로 하여금 “안일하지 않고 노력하라”는 감계의 뜻을 담고 있다. 경직도(耕織圖)는 농사와 직조를 표현한 것으로 농업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일을 그린 것이다. 경직도는 원래 중국 남송대 누숙(樓璹:1090-1162)이 경직시를 짓고 그것을 도해한 경작도 21점, 잠직도 24점, 합 45폭의 그림을 고종에게 바친 데서 유래하였는데, 청나라 강희제 때인 1696년 초병정(焦秉貞, c.1689-1726)이 <패문재경직도> 46폭을 새로 그려 동판인쇄로 보급하여 우리나라까지 널리 퍼져, 풍속화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2.조선후기의 풍속화 조선후기가 되면 숙종, 영조, 정조대에 정치가 비교적 안정되고 경제도 발전함에 따라 문화전반에 걸쳐 조선초기 세종대에 비견될 만큼 크게 발전하였다. 이때의 융성한 문화 속에서 회화도 크게 발전했는데, 명화가들이 구름처럼 나타났을 뿐 아니라 회화 종류에서도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같은 가장 한국적 특징이 나타난 분야가 발달하였다. 풍속화는 그 발전경과를 볼 때 18세기 전반의 발생기와 18세기 후반의 전성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18세기 전반 : 발생기 18세기 전반기 본격적 풍속화의 발생기에는 윤두서, 정선, 조영석 등 사대부 화가들이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실학자인 윤두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앞선 인물인데, ‘공리공담’과 양반들의 유한한 여가생활 보다는 백성들의 실생활 모습을 담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풍속화를 발생시킨 원인으로는 실학의 발달, 경제의 발달, 조선중화사상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자신과 환경에 대한 자각”이 그 저변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때의 대표적 작가와 대표작을 간단히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윤두서(尹斗緖, 1668-1715) : 호 공재(恭齋), 윤선도의 증손. 풍속화의 선구자 <나물캐기>, <짚신삼기>, <경작> 윤덕희(尹德熙, 1685-1766) : 호 낙서(駱西), 연옹(蓮翁), 윤두서의 아들 <공기놀이>, <독서하는 여인>, <아이보는 여인> 윤용(尹?容, 1708-1740) : 호 청고(靑皐). 윤덕희의 차남으로 요절 <나물캐기> 정선(鄭敾, 1676-1759) : 호 겸재(謙齋), 진경산수화의 대성자, 풍속화도 그림 <독서여가(讀書餘暇)>, <인곡유거(仁谷幽居)> 조영석(趙榮?, 1686-1761) : 호 관아재(觀我齋), 문인 풍속화의 대가. <새참>, <선차>, <말징박기> 김두량(金斗樑, 1696-1763) : 호 남리(南里), 화원으로 풍속화도 잘 그림. <타작과 전원행렵>, <목동오수> 2) 18세기 후반 :전성기 18세기 후반은 영조 후반에서 정조연간에 해당하는 시기로 조선후기의 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시기였다. 이때는 18세기 전반 선구적 사대부 화가들이 이룩한 업적을 기반으로 단원 김홍도, 긍재 김득신, 혜원 신윤복 같은 뛰어난 화원화가 내지 직업화가, 즉 프로페셔널들이 등장하여 한국 풍속화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즉 18세기 전반기에는 사대문 문인화가들이 한국적 풍속을 그림의 주제로 도입하기 시작하였다면, 후반기에는 전문적 실력을 갖춘 직업 화가들이 예술적으로, 또 대규모로 풍속화를 그려 완성시킨 것이다. 18세기 전반기의 사대부화가들은 아마추어로서 이념적 기반을 닦았다면, 후반기의 프로 화가들은 그림 자체를 스케일 면에서나 예술면에서나 명실상부하게 완성시킨 것이다. 이 시기에도 물론 사대부 화가들도 활약하였다. 이인상(李麟祥, 1710-1760) : 자 원령(元靈), 호 능호관(凌壺觀) <송하수업> 정황(鄭榥, 1737-?) : 호 손암(巽菴). 정선의 손자 <평양 연광정> 강희언(姜熙彦, 1738-1782) : 호 담졸(澹拙), 김홍도의 벗. <사인휘호>, <사인사예>, <사인시음> 강세황(姜世晃, 1713-1791) : 호 표암(豹菴), 김홍도의 스승, ‘예원의 총수’ <현정승집>, <송도전경> 김홍도(金弘道, 1745-1805년경) : 자 사능(士能), 호 단원(檀園), 최대의 풍속화가 <행려풍속도>, <풍속화첩>, <후원유연>, <시흥환어행열도> 김득신(金得臣, 1754-1822) : 호 긍재(兢齋), 김홍도의 후배로 화풍 계승. <풍속도병풍>, <투전>, <파적>, <짚신삼기> 신윤복(申潤福, 18세기말, 19세기 전반 활약) : 호 혜원(蕙園), 女俗표현의 대가. <단오풍정>, <검무>, <납량만흥>, <월하정인>, <미인도> 3) 19세기 : 쇠퇴기 19세기는 정조대왕의 급서 이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고 외척이 발호하면서 점차 ‘세도정치’로 퇴행한 시기이다. 조선후기 문화의 활력이 점차 사라지고 나라도 기울어지는 시대상을 반영하여 풍속화에서도 전대 전통의 계승 속에 점차 창조적 활기가 희미해져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의 풍속화 속에는 여전히 500년 문화대국 조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유운홍(劉運弘, 1797-1859) : 호 시산(詩山) <기녀> 이형록(李亨祿, 1808-?) : 호 송석(松石) <장날> 마군후(馬君厚, 19세기 중엽 활동) <촌녀채종(村女採種)> 유숙(劉淑, 1827-1873) : 호 혜산(蕙山), 19세기 풍속화의 대가 <대쾌도>, <수계도권>, <벽오사소집도> 김준근(金俊根, 19세기말-20세기초) : 호 기산(箕山), 개항기 외국인들을 위해 그림. <단오추천>, <투호> IV.한국 풍속화의 의의, 특징 한국 풍속화의 의의와 특징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풍속화는 조선시대, 특히 후기의 발달한 문화의 구체적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각적 자료로서,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 회화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풍속화가 없다면, 우리는 조상들의 생활상을 이처럼 뚜렷하고 구체적으로 알 수 없을 것이며, 현재 많이 진행되고 있는 역사의 여러 모습들의 재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의 풍속화는 각종 계회도나 기록화, 경직도, 무일도 등 주로 왕실이나 사대부 지배층을 위한, 혹은 그들의 ‘시각(視覺)’을 담은 풍속화였다. 반면에 조선 후기에는 왕실이나 사대부들의 풍속화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풍속화도 크게 발달했는데, 그 이유는 정치의 안정과 실학의 발달, 현실에 대한 자각, 경제의 발달 등 여려 요인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 풍속화와 비슷한 성격으로 중국의 ‘민간연화(民間年畵)’, 일본의 ‘우끼요에(浮世繪)’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연화나 우끼요에는 주로 ‘판화’인데 비해, 한국의 풍속화는 직접 손으로 그린 ‘육필화’로서 유일성과 독창성 면에서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공동기획:문화저널, 전북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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