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8 |
[문화현장] 한옥마을 이야기
관리자(2008-08-13 15:06:18)
전주한옥마을의 스토리개발, 늦었지만 꼭 시작할 때다
진양명숙
‘스토리(Story)’.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작가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 단어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문화적 요소의 근원이다. 무문자 사회의 원시시대에 신화나 전설은 그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이야기’를 통해 뱃속에서부터 엄마와 교감하는 태아는 정서 발달에도 이롭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어린 아이에서부터 생을 마감하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재미난 이야기는 모든 이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야기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우리사회에 직조물처럼 촘촘히 짜여진 문화적 체계이다. 어느 영역의 이야기든 그것에 주목하고, 이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소멸시키지 않을 때, 그 나라, 그 사회의 문화는 풍요로워지고 삶의 질은 높아지게 된다. 지금의 유럽의 문화도시가 탄생될 수 있었던 데에는 물리적 경관에 대한 보존과 함께, 이를 둘러싼 스토리를 쉬이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주한옥마을이 관광의 시선에 놓이면서 급속한 변화의 물결을 탄지도 어언 5년이 지났다. 전통문화특구, 한옥지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이곳이 ‘전주한옥마을’로 불리기 시작한 때는 2002년 월드컵 시기였다. 월드컵 기간 동안 전주를 찾은 관광객에게 무엇을 보여줄까 고민하다, 전주시는 다른 여느 도시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교동, 풍남동 한옥밀집지역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전주한옥마을에 담긴 ‘스토리’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건물, 길, 도로, 그리고 소비 공간을 중심으로 오래되어 낡은 경관을 새롭게 정비하는 방향으로만 개발이 진행되어 왔다. ‘부수고 짓기를 반복하는 사이’, 그 낡은 가옥과 그 공간에 대한 역사적 맥락이나 문화는 소멸되기 일쑤였다. 이는 곧 전주한옥마을의 스토리가 될 수 있는 ‘구슬’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BK21사업단(전통생활원형구축 및 응용기획전문가육성사업단)이 전주시의 의뢰를 받아 추진한 ‘전주시 한옥마을스토리개발사업’은 그 동안 볼품없이 버려져 왔던 이 ‘구슬’을 수집하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전주시 한옥마을 스토리개발 사업은 한옥마을의 역사와 문화에 주목하면서, 주민들의 삶의 공간으로서의 한옥마을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자 한 시도였다.
지난겨울 우리 조사팀은 한옥마을 여러 공간의 숨은 이야기와 집을 둘러싼 생활문화사를 수집하기 위해 교동, 풍남동 가옥의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보자를 찾는 과정은 매우 어려웠다. 처음 전주시가 ‘오픈하우스(Open House)’ 행사를 통해 대문을 열어줄만한 집 열 채를 소개시켜 주었으나, 인터뷰를 해 준 집은 딱 두 집 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조사를 거부하는 주민도 많았고, 한 두 번 만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더 이상은 오지 말라는 주민도 있었다. 전주시 정책에 대한 주민들의 불신의 골은 깊었고, 들락날락하는 외부인에 대한 시선도 차가웠다. 결국 통장 몇 분을 통해 제보자를 소개받거나, 그네들 집을 조사하거나, 여러 각고의 노력 끝에 모두 이십 여 공간을 조사하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이나 외부인들이 함께 공유하는 곳으로 생각되는 공동 공간 여섯 곳을 포함하여, 단독 개별 가옥들, 새로운 소비 공간으로 변모된 집들, 조선말 대유학자였던 간재 전우(艮齋 田愚)의 제자들인 금재(欽齋)·고재(顧齋)·유재(裕齋)가 살았거나, 또는 살고 있는 곳들을 조사했다. 그 중 몇 곳만 소개해보겠다.
쪾문화연필: 문화연필 공장은 1949년 교동에 세워졌다. 오랜 세월동안 교동의 풍경으로 자리하였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문화연필은 제재소에서 나오는 톱밥을 땔감으로 주민들에게 내 놓았고, 상품화되지 않은 불량품을 동네 어린이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넉넉하고 훈훈한 가슴을 가진 공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쪾동락원(풍남동 3-44번지): 동락원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의 전통 반가형 한옥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집은 솟을대문으로도 유명한데, 전 주인의 아들이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쪾뜰에 들꽃이 가득한 집, 草庭(교동 139번지): 학인당 막내딸이 시집온 곳이다. 그 막내딸을 시어머니로 모셨던 신씨는 아직도 어머니의 유품을 많이 보관하고 있다. 신씨는 한때 집을 떠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집에 자연의 생명을 불어 넣고 기운을 북돋았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펴서 변화무쌍한 계절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집이다.
쪾사대(四代)를 이어 온 교동 선비집(교동 141-1번지): 1928년 건립되었다. 한학자셨던 부친 오산(梧山) 이종림(1901~1981) 선생은 한시와 글씨에 조예가 깊으셨다. 이 가옥의 사랑채는 선비들이 모여서 강학을 하며 글을 짓고 교제를 하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또한 이곳은 전북 바둑의 산실이라는 역사적 장소로 기억될만한 곳이다.
쪾문이 많은 집(교동 132-3번지): 진안의 천석꾼이었던 한씨가 자녀 교육을 위해 이 집을 지었다. 옛날엔 미닫이문·여닫이문 등 그 개수가 무려 마흔 아홉 개나 되었는데, 추석이 돌아올 때면 집의 모든 문짝을 떼어 천변에 갖고 나가 빨았다. 문간채의 머리방, 땅 속에 넣었던 군시암, 앞·뒤뜰의 감나무가 쏠쏠한 재미를 선사한다.
쪾가까운 옛날의 고신(교동 71-4번지) : 1980년대 초 집장사가 지은 한옥이다. 집장사가 두 채를 지어 한 채는 자기가 살고, 다른 한 채는 파는 일종의 분양형 한옥인 셈이다. 70-80년대 한옥마을 집의 변화상을 보여 주고 있다.
쪾금재의 염수당(念修堂) 터와 사우(詞宇) 옥동사(玉洞祠) : 최학자로 더 잘 알려진 금재선생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유학을 전수하여 이 고장의 선비정신을 고취시키고, 비폭력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이자 큰 학자로서 이 고장의 선비정신을 선양하신 분이다. 금재 선생은 1901년 옥류동에 염수당(念修堂)이라는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쳤다. 동시에 각지의 유생들이 모여 경서(經書)를 읽으며 강학을 하였고, 연당(蓮塘)의 못 물로 먹을 갈아 서예를 연마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선생이 길러낸 제자만도 천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금재선생의 사우 옥동사는 전주 남천이 내려다보이는 전주최씨 문중 산속 대나무 숲에 세워진 15평 규모의 목조기와 건물이다. 1979년 10월 선생의 문인들이 ‘금재선생 사우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전국의 유림들로부터 모금한 천만 원으로 1981년 4월 29일 준공하였다.
이렇게 짧게 소개한 각 공간은 그 나름의 풍성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업의 성과물이 곧바로 전주시 한옥마을의 ‘스토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개발을 위한 기초자료이자, 낱낱이 흩어져 있는 구슬일 뿐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한옥마을이 보배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모아진 자료들을 다시 정성스럽게 정리하고, 이야기로 엮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이제 전주한옥마을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혹은 살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각 집들이 어떻게 지어지고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그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건축학적, 인류학적, 역사적 접근을 해 보자. 전주한옥마을에 보존, 개발, 관광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시작했어야 할 이 소중한 작업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해야 할 때이다. 전주한옥마을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고갈되지 않을 문화 컨텐츠를 발굴해야 하며, 이는 ‘스토리’ 개발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진양명숙/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고고문화인류학과 BK21사업단의 실무를 맡고 있으며, 여성다시읽기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옥마을 상량(上樑)하던 날
잘 생긴 돼지머리는 파란 배춧잎을 물고 활짝 웃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상량식에 나선 것이 기쁜가봅니다.
여름 들어 가맥에 자리를 내 주었지만 인기 있는 전주막걸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옆 집 어르신들도 나오셨습니다.
이런 자리는 참 오랜만이라 하십니다.
“옛날에는 말이야”하시며 추억보따리를 풀어 놓습니다.
돈 많이 벌고 하는 일 모두 잘 되라고 축원을 하며 술 한 잔 올립니다.
둘러 서 있는 사람들 모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처음 보는 상량식이라며 다들 한 마디씩 참견도 놓습니다.
드디어 하얀 광목에 감겨 하늘로 들보가 올라갑니다.
모두들 고개 들어 들보 올라가는 모양새를 쳐다봅니다.
올라가던 들보가 중간에 한 숨을 돌리자 구경꾼들 나서서 성화를 합니다.
무녀(巫女)이자 무녀(舞女)인 한영애씨도 한 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영애씨가 내민 오방기(五方旗)에서 김삼열씨가 연거푸 노란색(조상을 잘 모시라는 뜻)을 뽑습니다.
모두들 “멍청한 도깨비 부적 못 알아 본다”고 김삼열씨가 뽑은 깃발을 보며 껄껄댑니다.
보다 못한 부인 이일순씨가 나섭니다. 파란기와 빨간기를 뽑아 듭니다.
터주대감을 상징하는 파란기와 성황신을 의미하는 빨간기가 나왔습니다.
두 기 모두 행운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막걸리 한 사발에 시루떡 한 조각씩 모두가 나눠 먹고 집 잘되라고 기원합니다.
한옥은 수고롭습니다.
하지만 정감이 넘치는 집입니다.
알콩달콩 한 식구가 부대끼며 살 겁니다.
날은 덥지만 모두들 축원하는 마음을 받아 살 겁니다.
그렇게 한옥마을에 또 한 식구가 늘었습니다.